101화
차 안에 어색한 침묵이 들어찼다. 대현이 황급히 고개를 돌려 밖을 응시했다. 머릿속에서 예준이 방금 한 이야기들이 정신없이 뒤엉키고 있었다. 가볍게 하려던 이야기였다. 애초에 이런 식으로 이야기가 흐를 줄은 상상도 못했다.
근데 이건 마치…… 고백 같잖아. 예준의 입에서 좋아한다는 말이 직접적으로 나온 건 아니었지만 대화가 흐를수록 분위기는 확실히 이상해지고 있었다. 그걸 느낀 건 자신만이 아닌 듯 평소라면 그가 묻기도 전에 뭐라고 더 말해올 예준도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둘이 아무 말을 하지 않는 동안에도 그들이 탄 차는 저번에 예준과 왔던 곳을 향해 가고 있었다. 누가 돈을 낼 것인지를 놓고 아웅다웅 다퉜던 츄러스 가게가 시야에 들어왔다. 입술을 깨문 대현이 결심한 듯 고개를 돌렸다. 결연함이 배인 얼굴과 달리 조심스러운 물음이 잇새를 가르고 흘러나갔다.
“강예준.”
“…….”
“너 그러니까 방금…… 나 좋아한다고 한 거야? 그러니까. 멤버들이랑 다른 방식으로?”
급하게 낸 결론이지만 뱉고 나니 이렇게 어이없을 수가 없었다. 친분이라 할 게 딱히 없는 관계임에도 이상하리만치 제게 하는 위로에 집착하는 듯한 그와 방금 이상한 뉘앙스의 말들이 겹쳐 나온 결론이었지만 아마 이건 은호의 일을 겪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나온 성급한 결론일 수도 있다. 멤버들이랑 친구랑은 좋아하는 방식이 다르다고 보는 걸 수도 있지. 멤버들은 가족 같은 우정, 친구들은 말 그대로 우정, 그런 것처럼. 근데 우리가 친구라고 불릴 수 있는 관계이긴 한가……?
아니다. 은호에, 예상치 못했던 미역국에, 식에게 느끼는 이유 모를 설렘까지. 최근 몰아치듯 다가온 일들 때문에 판단 능력을 상실한 게 틀림없다. 얼굴을 쓸어내린 대현이 차분하게 방금 한 말을 수정했다.
“아냐. 대답 안 해도 돼. 내가 이상한 질문을 했다.”
그들이 어색한 대화를 나누는 중에도 계속 움직이던 차가 멈춘 것도 그쯤이었다. 기어를 바꾼 예준이 시동을 껐다. 몸을 돌리는 그를 마주한 대현이 멈칫했다.
“그게 왜 이상해?”
“…….”
“내가 너 좋아하면 이상한 거야?”
까만 눈이 대현을 정면으로 응시해 왔다. 거기다 몇 번 보지 못했던 진지한 표정까지. 게임 중에 느닷없이 껴안질 않나, 도착했다는 말 대신 숙소 앞에서 찍은 셀카를 보내지 않나,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거리에서 커다란 곰인형을 옆구리에 끼운 채 담배를 피우고 있질 않나. 늘 ‘조금 특이한‘이라는 범주에 두었던 그의 행동이 이렇게까지 낯설게 느껴진 건 처음이었다. 그래서인지 대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예준의 시선은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떨어져나갔다. 핸들 위로 팔을 포개고 그 사이로 머리를 박은 그에게서 이내 작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대현은 그를 만난 후 처음으로 머릿속에 있던 모든 생각을 비운 채 예준을 응시했다. 그가 들어내지 않으려 하는 감정이 모순적이게도 너무나 적나라하게 닿아왔다.
“난 내가 겁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
“아닌 것 같아.”
핸들에 머리를 박고 중얼거리는 그의 목소리는 억눌려 있었다. 밀폐된 공간이 아니라면 아무도 듣지 못했을 것처럼 낮고 느릿느릿 나오는 말들은 한 번도 작아 보인 적 없던 그를 작아 보이게 만들었다. 그렇게 만든 사람이 이 상황이 오기까지 눈치조차 채지 못했던 자신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지금도. 내가 좋아한다 해도 달라지는 게 없을까 봐 무서워.”
결국 그의 입을 통해 나온 고백은 갑작스러웠다. 그렇지만 그건 눈치가 없었던 자신에게나 그런 것일 테고, 눈앞의 예준에게는 그렇지 않을 거였다. 그가 여태껏 제게 해준 걸 조금이나마 갚고 싶어서 보낸 가벼운 문자에 달려온 그의 행동에서도 볼 수 있듯이. 고백을 듣기 전까지만 해도 조금 특이한 그이기에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행위들은, 그의 마음이 얹어졌다는 걸 알게 된 뒤 그 전과 다른 무게를 가지고 다가왔다. 다른 무엇보다도 그 사실이 마음이 아파서 대현은 그처럼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그가 모르는 사이에도 착실히 그에게 다가오고 있던 마음은 결국 그의 앞에 멈춰 섰다. 여태까지 몰랐다 해서, 결국 제 몸을 드러낸 고백까지 모른 척할 수는 없는 거였다.
“강예준. 난…….”
대현은 언젠가 받았던 고백을 기억해 냈다. 이름만 알던 반 친구였다. 솔직하게 마음을 고백해 오는 그녀를 보던 대현은 그만큼의 마음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마음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표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미안하다는 말로 시작한 대현의 말을 듣던 그녀는 한동안 말이 없더니 웃지도 않고 울지도 않는 얼굴로 그가 생각도 하지 못했던 부분을 지적했다.
“고마워.”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마, 대현아. 그거 되게 힘 빠지는 일이야. 마치…… 내가 널 좋아하는 게 너한테는 꼭 사과해야 할 일이 된 것만 같잖아.'
잊을 수 없었던 그 말을 떠올리며 대현은 말을 골랐다. 미동 없이 엎드린 등을 생각하며, 천천히. 그의 마음이 조금이나마 덜 아프게 해줄 수 있는 말을 해주고 싶다고 생각하며.
“내가 눈치가 빨랐다면 다른 말을 할 수도 있었을 거야. 네가 겁이 나지 않게 할 수도 있었을 거고. 그렇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어서.”
“…….”
“그래서 그냥 고맙다고밖에 말을 못 하겠다.”
핸들 위에 포개졌던 손이 서서히 풀렸다. 이내 드러난 예준의 얼굴을 마주한 대현이 입에 남은 말을 마저 꺼냈다.
“넌 모르겠지만 네가 위로가 된 순간들이 참 많았어.”
놀이터에서, 한강에서, 그의 고민을 하나도 모르는 얼굴은 그렇기에 그의 젖은 마음을 말릴 수 있는 훈풍과도 같았다. 해맑은 얼굴이 뱉어내는 말들은 대현을 웃게 했고, 그를 몰아세우는 것들을 조금이나마 견딜 만하게 만들었다.
그래. 그건 눈앞의 사람이 예준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조금이나마 갚고 싶다고 생각했어. 근데 그런 내 행동이 널 더 힘들게 만들었을 거란 생각을 하니까…… 마음이 아프다.”
“…….”
“앞으로 보고 싶지 않대도 이해해. 뭐든 네가 편해질 수 있다면…….”
말을 이으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안전벨트를 풀고 넘어온 예준이 그의 어깨를 당겨 제 품 안에 가뒀기 때문에. 함께 리얼리티를 찍었을 때, 놀이터에서 우울해하는 제 머리 위에 턱을 올렸을 때, 그 모든 순간에 먼저 손을 뻗어온 그를 대현은 함께 안아준 적이 없었다. 새삼 아프게 느껴지는 그 사실을 곱씹으며 대현이 손을 올렸다. 긴장한 것 같은 등에 손을 올리고 그의 목 부근에 머리를 기댔다. 천천히 전해져 오는 심장 소리를 들으며 그가 할 말을 기다렸다.
“나 생각보다 속 좁아.”
“…….”
“엄청 오래 걸릴지도 모른다고.”
마찬가지로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예준이 투정을 부리는 것처럼 중얼거렸다. 어깨에 입술을 대고 속삭인 탓인지 웅웅 울리는 것처럼 들리는 말을 뒤늦게 이해한 대현의 입에서 작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가 더 기대기 편하게끔 어깨에 주고 있던 힘을 푼 대현이 다정하게 대답했다.
“응. 기다릴게.”
얼마나 걸리든 상관없었다. 그 기다림이 그에게 작은 위로로라도 다가가 결국은 그에게 제가 느꼈던 것과 같은 안정감을 줄 수 있다면.
* * *
“이태영. 내가 작업할 땐 건드리지 말ㄹ…….”
목 부근에 느껴지는 묵직한 무게감. 짜증을 내며 헤드폰을 벗어 던지려던 지웅이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태영이라기에는 뭔가 이상했다. 묘하게 불편한 자세도 그렇고. 예스 중 키가 작은 편인 태영은 의자에 앉은 지웅의 목에 매달릴 때도 별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었다. 하지만 지금 제 목에 안긴 사람은 앉은 허리를 불편하게 구부린 채 지웅까지도 불편해지게 만드는 자세를 고수하고 있었다. 슬쩍 시선을 내려 제 목에 이상한 폼으로 매달린 머리통을 보던 지웅이 슬쩍 미간을 구겼다.
“강예준?”
신발까지 까먹고 뛰쳐나갈 때는 언제고, 지웅의 말에도 미동 없이 목에 매달려 있는 머리통은 어두운 방 때문인지는 몰라도 어딘가 우울해 보였다. 평소라면 진작 떨쳐 냈을 그를 가만히 둔 것도 그래서였다. 지웅이 마우스를 쥔 손을 움직여 한창 작업 중이던 화면을 닫았다.
“형.”
핸드폰을 찾기 위해 몸을 돌리려던 지웅이 멈칫했다. 방금 들려온 목소리는 그가 머리통만 보고도 알아챘던 것처럼 예준이 맞았다. 그렇지만 가라앉은 목소리는, 진지한 상황이 아니고선 그가 잘 부르지 않는 호칭은, 별 생각 없던 지웅마저도 무슨 일이 생겼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거라서, 지웅은 그의 이어질 말을 기다리며 행동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브레이크를 걸어야 한다고 했잖아.”
“……브레이크?”
“응.”
한참을 지나서야 예준이 꺼낸 말은 뜬금없었다. 인상을 찌푸린 지웅이 브레이크라는 단어와 관련된 모든 추억을 헤집고 나서야 알아들은 듯한 표정을 했다. 항상 어디로 튈지 모르는 예준을 예스 내에서 가장 잘 컨트롤 할 수 있는 사람은 지웅이었다. 언젠가 그를 앉혀놓고 했던 대화에서 브레이크라는 말을 먼저 꺼냈던 자신을 떠올린 지웅이 까만 머리통을 내려다봤다. 얘기를 했던 그조차도 잊고 있던 단어를 꺼내는 예준의 머릿속은 언제나처럼 읽을 수 없었다.
“근데 브레이크가 고장 나면.”
“…….”
“그래서 이미 너무 늦어버렸으면 어떻게 해야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