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야, 절로 가서 놀아. 넌 꼭 내가 지후랑 통화할 때만 이러더라.
누구랑 놀아여? 아, 형 심심해여. 이진수도 없고.
또라이 있잖아.
형 몰라여? 예준이 형 요새 완전 노잼인 거.
어, 그러게. 그러고 보니 걔 왜케 조용하냐, 요새.
몰라여. 저번 주에 영화 보고 와서 계속 땅굴 파고 있어여. 봐여. 지금도 방에서 안 나오잖아.
영화 뭐 봤길래 그래. 우울한 거였어?
아녀, 액션이었는데.
제목이 뭔데.
몰라여. 노잼이라 기억에서 지웠어여.
넌 노잼 없으면 대화가 안 되냐?
대현의 존재를 잊은 것처럼 이어지는 대화 속에서 귀에 꽂힌 이름은 유독 대화 내용이랑 매치가 안 됐다. 강예준이 우울해……? 상상이 안 된다. 늘 해맑은 얼굴만 봐서 그런가. 가끔 가다 비쳤던 진지한 얼굴을 애써 떠올려 보던 대현이 이내 포기하고는 핸드폰을 귀에서 뗀 채 그와의 메시지창을 켰다. 그래도 저번 주까지는 실없는 문자가 몇 번 왔었던 것 같기도 한데. 알 수 없는 이모티콘으로 도배된 창을 잠시 보던 대현이 고민 끝에 메시지를 작성했다.
<강예준>
보내자마자 없어진 1 표시를 본 대현이 당황한 얼굴을 했다. 위에 홀드해 놓은 통화 창에서는 여전히 태영과 지웅의 대화가 들려오고 있었다.
형. 그래서 우리 영화 언제 보러 가여?
밥 먹고 갈까? 가서 먹을래?
오늘 평일이죠. 그럼 가서 먹어도 될 것 같은데.
그러든지. 야, 강예준한테 한 번 물어봐. 갈 건지.
안 그래도 아까 물어봤어요. 오늘 나갈 기분 아니라던데.
나갈 기분이 아니라니…… 진짜 우울한가 보네. 그러고 보니 여태껏 예준에게는 받기만 한 것 같아 뭐라도 사줄까 했었는데. 순식간에 엎어진 플랜에 고민하던 대현이 메시지 창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을 때였다.
<응>
예준에게서 답이 왔다. 위의 문자들과 비교되는 간단한 문자는 대현을 더 고민에 빠지게 했다. 대현이 커서를 위로 올렸다. 빨대가 꽂힌 초코우유가 있는 사진을 한참 바라보던 대현이 이내 문자를 입력했다.
<초코우유 사줄까>
밖에 나갈 기분이 아닐 정도인 그에게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여태껏 그가 자신을 위로해 온 방식으로 이번에는 자신이 조금이나마 위로를 건네고 싶었다. 아까처럼 금방 올 줄 알았던 답변은 오지 않았다. 대신 통화하는 중인 걸 깨달은 지웅이 대현을 찾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메시지 창을 닫고 귀에 핸드폰을 가져다 댄 대현은 곧이어 들려온 말에 또 다시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이지후. 미안. 내가 지금……. 야, 강예준! 너 어디 가? 미친놈아, 신발은 신고 가야지!]
혹시나 해서 대현이 다시 열어본 메시지창에는 때마침 예준이 보낸 메시지가 가장 아래에 떠 있었다.
<30분>
<아니 20브ㄴ>
두 번째 메시지에서 보이는 오타부터가 그가 급하게 출발했음을 보여주는 듯했다. 우울해하던 거 맞긴 하겠지. 잠시 생각하던 대현이 이내 어깨를 으쓱하고는 방으로 걸어갔다.
통화에서 의도치 않게 알 수 있었던 정보처럼, 예준은 그에게 문자를 보낸 즉시 출발한 듯했다. 이번에는 제가 그쪽으로 가겠다고 말하려 전화했지만, 어디냐고 묻기도 전에 이미 다리를 건너고 있다고 말해오는 예준에는 당할 수가 없었다. 결국 두 손 두 발 다 든 대현은 결국 숙소와 한 정거장 떨어진 곳에서 그를 만나기로 했다.
택시정류장이지만 택시가 한 대도 서 있지 않은 그곳은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도, 그리고 음료 캐리어를 들고 예준을 기다리며 서 있기에도 적절한 장소 같아서 내심 만족스러웠다. 그나저나 아이스도 괜찮겠지. 우울할 때 단 거를 사주던 그를 생각해 고른 음료를 내려다보던 대현이 고개를 들었다.
시계는 어느덧 둘이 만나기로 한 시간에서 삼 분 정도를 남겨두고 있었다. 혹여나 반대편에서 오는 차 중 예준의 차가 있기라도 할까 봐 건너편 도로까지도 살피던 대현이 눈에 들어온 범상치 않은 차에 멍하니 입을 벌렸다. 불안함이 슬그머니 머리를 들었다.
“설마…….”
대현이 애써 부정하며 고개를 돌릴 때였다. 행인들이 걸음을 멈추고 돌아볼 정도로 빨간 아우디 하나가 그의 앞으로 미끄러지듯 정차했다. 내려온 창문 사이로 보이는 얼굴은 역시나 예준이 맞았다. 손을 붕붕 흔드는 예준을 보던 대현이 정신을 차리고 좌우를 살핀 후 재빠르게 차로 다가섰다.
문을 열고 타 마주한 얼굴은 저번에 본 얼굴과 특별히 달라 보이지는 않았다. 지웅과 태영의 대화 내용을 제가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였던 모양이다. 그의 화려한 등장도 잊고 얼굴빛을 살피던 대현이 안심하고는 음료 캐리어를 예준에게 건넸다.
“자.”
캐리어를 받질 않고 대신 멀뚱히 바라보고만 있는 예준에 대현이 설명을 덧붙였다.
“초코우유보다 더 진한 건데, 예전에 누가 되게 달다고 했던 게 생각나서 사봤어. 아, 그리고 왼쪽 음료는 내가 기다리면서 좀 먹어서. 넌 오른쪽에 있는 거 먹으면 돼.”
그제야 예준이 캐리어를 받아들었다. 캐리어를 넘기고는 안전벨트부터 매던 대현이 고개를 돌리자마자 보인 풍경에 미간을 모았다.
“야, 그거 내가 먹은 거라니까.”
“응. 알아.”
천연덕스럽게 대꾸하는 얼굴은 대현이 방금까지도 물었다 놓았던 빨대를 여전히 입안에 넣은 채였다. 뭐가 문제냐는 듯한 눈빛을 읽은 대현은 여태까지 예준을 만나면서 늘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설명하기를 포기했다. 어차피 제 쪽에 가까운 빨대를 별 생각 없이 문 게 분명했다. 많이 먹은 것도 아니니 괜찮겠지. 더구나 같은 음료를 샀으니까. 생각을 마친 대현이 오른쪽 음료를 집어 들며 예준에게 질문했다.
“밥 먹었어?”
“아니.”
“왜?”
“……별로 안 먹고 싶어서.”
행동에 거침이 없는 그답지 않게 대현이 느낄 정도로 크게 멈칫한 얼굴은 의외의 대답을 내어놓는다. 무언가를 더 묻기도 전에 손에 든 음료를 내려놓으며 차를 출발시키는 옆얼굴을 본 대현은 그가 우울해 보이지 않았다고 생각한 제 판단이 섣불렀나를 고민했다.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차 안의 분위기가 어색해진 것 같았다. 헛기침을 한 대현이 결국 말을 돌렸다.
“근데 이거 네 차야? 저번에 수리 맡겼다던?”
“응.”
“와, 장난 아니다. 나 아우디 처음 타봐.”
벤츠야 선우 아버지의 차종이기도 해서 종종 타봤다지만 아우디는 처음이었다.
차 안을 둘러보는 대현의 눈이 반짝거렸다. 대현은 다른 남자애들처럼 슈퍼카에 대한 거창한 로망이 있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직접 손에 꼽히는 슈퍼카를 타니 신기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고 보니 승차감이 남다른 것 같기도 하고. 절로 벌어지는 입가를 의식하지 못한 채 열심히 구경하던 대현이 이내 돌아온 물음에 예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줄까?”
“……뭐?”
“차.”
터무니없는 농담이었다. 웃으며 받아치려던 대현이 진지한 예준의 얼굴에 멈칫하고는 입가를 굳혔다.
“야…… 무슨…… 장난을 그렇게 진지한 얼굴로 하냐.”
엉뚱한 건 알았지만, 장난기 하나 없는 얼굴로 억이 훌쩍 넘는 차를 주겠다고 말하는 거에는 대현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장난 아닌데.”
“…….”
“난 너 만나고 한 번도 장난이었던 적 없어.”
때마침 걸린 신호에 맞춰 기어를 조작한 예준이 대현을 돌아봤다. 늘 짓고 있던 개구진 미소가 사라진 얼굴은 마치 처음 보는 얼굴처럼 느껴졌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얼굴이 대현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묘하게 이상한 분위기를 견디지 못한 대현이 결국 먼저 시선을 돌렸다. 다행히 타이밍 좋게 바뀐 신호 덕에 뜬금없는 예준의 말에 대해 더 대꾸를 할 필요는 없었다. 뒷목을 만지며 창밖을 보던 대현이 자세를 바꿔 앉았다.
자꾸만 의도치 않은 방향으로 흐르는 듯한 대화의 주제를 바꿀 만한 게 떠올라서였다. 연인에게 받은 듯한 곰인형을 들고 뒤뚱뒤뚱 걸음을 옮기는 거리의 여자에게 시선을 고정한 대현이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한번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해놓고 매번 그의 페이스에 휘둘려 꺼내지 못했던 질문이 떠올랐다.
“근데 그 기사 있잖아. 왜. 네가 봤다던.”
“응.”
“그거 기사 제목이 뭐야?”
“……궁금해?”
궁금할 수밖에. 도대체 어떤 기사가 제 또래의 남자한테 곰인형을 선물하라고 추천했을지 진지하게 궁금했다. 베란다에서 아직도 어마어마한 존재감을 뽐내고 있는 곰인형을 떠올린 대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하는 사람이 우울해할 때 위로하는 방법.”
“……어?”
“제목. 궁금하다며.”
분명히 들었음에도 이해를 하지 못한 대현의 눈이 빠르게 깜빡였다. 대현은 폭탄발언을 던져 놓고도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예준의 옆얼굴을 멍하니 훑었다. 곧 작은 탄성이 터졌다. 아. 그러니까, 친구로서 좋아하는 사람을 말하는 거겠지? 당연한 건데 순간 너무 텍스트 그 자체로 받아들였다 싶어 민망해진 대현이 말을 돌렸다.
“너네 숙소에는 그럼 곰인형만 다섯 개야? 터져 나가겠네.”
“왜?”
“어?”
“왜 터져 나가?”
“그거야…… 너 멤버들한테도 사줬을 거 아냐. 위로할 때.”
초코우유가 좋다는 걸 기사에서 읽고 바로 종류별로 가져다 바친 그를 보았을 때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 저를 대하던 것과 다른 행동을 한다는 건 상상이 힘들었다. 그랬기에 나온 시나리오였고, 당연한 거라 생각했는데 빤히 대현을 쳐다보는 예준은 방금 대현이 한 말이 이해가 가지 않는 사람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대현의 목소리가 점차 잦아들었다. 그의 머릿속에서 경고등이 울렸다.
“아닌데.”
고개를 갸웃한 예준의 대답은 경고등이 빛까지 내게 만들었다.
“내가 왜 걔들한테 곰인형을 사줘?”
“……좋아하는 사람을 위로할 때는 곰인형을 사주는 거라고 기사에서 봤다며.”
“응.”
“멤버들이 우울해한 적이 없어?”
“아니.”
“……너 멤버들 좋아하잖아.”
“응.”
“근데 왜 걔네들이 우울해할 때는 곰인형 안 사줬는데?”
“다르잖아.”
“……뭐가 다른데.”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