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왔냐?”
“네. 주무시게요?”
“어. 12시 넘었잖아.”
“그렇네요.”
“아, 맞다. 야.”
“네?”
“이지후 왔어.”
“……언제요?”
“저녁쯤에. 피곤해 보여서 자라고 방에 억지로 넣긴 했는데 자는지는 모르겠고. 어쨌든.”
“아…… 네. 알려주셔서 감사해요.”
하품을 한 우람이 성의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옆을 지나쳤다. 지후가 돌아왔기 때문인지 한결 편한 표정이 된 그가 방에 들어가는 뒷모습까지 지켜 본 식이 방에 들어가려다 말고 걸음을 멈췄다. 시선이 향한 곳은 당연하게도 구석에 위치한 방이다. 잠시 망설이던 그가 결국 걸음을 옮겼다.
자는 얼굴만 보는 건 괜찮겠지. 불이 꺼진 집 안, 아무도 그를 주목하고 있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합리화까지 마친 식은 최대한 힘을 주지 않은 손으로 문고리를 잡는 자신을 막지 못했다.
“…….”
조용한 방 안. 문을 열자마자 그의 시선이 가 닿은 건 침대 위에 누운 지후였다. 이불 덕분인지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 형상을 지켜보던 식이 결국 방 안으로 걸음을 뗐다. 소리를 죽여 몇 걸음 걷자, 제가 찾던 얼굴이 보였다. 곤하게 자는 얼굴부터 엎드려 누운 자세까지 확인한 식의 입가에 결국 작은 미소가 걸렸다.
며칠 전 거실에서 잠든 그에게 담요를 덮어줄 때 보았던 자세와 같았다. 옆에 있는 베개 위에 아무렇게나 뻗쳐진 손의 각도까지도 비슷했다.
“……왔네요, 형.”
돌아오지 않을까 봐 걱정했다. 말없이 훌쩍 떠날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병실 밖에서 들은 이야기를 봤을 때 아예 불가능한 이야기 같지도 않았다. 물론 자신은 다시 돌아온 사람이 지후였다 해도 어떤 수를 써서든 그가 누군지 알아내려 했을 것이다. 그래도 당장은 제 앞에 있는 그가 숙소로 돌아왔다는 사실이 그저 감사하게 느껴졌다.
작게 속삭이긴 했지만 눈앞의 얼굴은 앞에 누군가 서 있다는 것도 모르는 거처럼 꿈쩍도 않고 색색 고른 숨만을 뱉어내고 있었다. 귀엽다는 느낌과는 거리가 먼 긴 눈매는 긴 속눈썹을 드리우면 순해 보였다. 가만히 바라보던 식은 홀린 듯 그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 와중에도 코트가 구겨지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천천히 몸을 낮춘 그는 눈앞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자요?”
이렇게 가까이서 얼굴을 볼 수 있는 것도 그가 잠에 들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실없는 물음이 튀어나갔다. 대답이 들려올 리 없음에도 식은 기다렸다. 쿵쿵 뛰기 시작한 심장 소리가 그에게 닿지 않을 거라는 걸 확인받고 싶어 하는 것처럼.
“왜 자요.”
내가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
그가 정말 아무것도 듣지 못하는 깊은 수면 상태라는 걸 눈으로, 귀로 확인하고 나서야 튀어나간 말은 어딘가 투정처럼 느껴졌다. 오늘은 특히나 당신이 더 보고 싶었다고. 한 번도 해본 적 없던 이야기를 하니 기분이 이상했다고. 그래서 내내 당신을 생각해야 했다고. 그가 알아줬으면 싶다가도 하나도 몰랐으면 싶은 이야기들을 꾹꾹 목 뒤로 묻은 식이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으려다 멈칫했다. 속눈썹 부근에서 멈춘 손은 결국 그 끝에도 닿지 못하고 다시 돌아왔다.
식이 자리에서 일어선 건 그가 방문을 열며 스스로에게 허락했던 잠깐의 몇 배는 될 법한 시간이 흐른 후였다. 방을 나서기 전 한 번 더 지후의 얼굴을 돌아보던 식이 미소 지었다. 긴 속눈썹에 시선을 고정한 그가 작게 중얼거렸다.
“잘 자요, 형.”
언젠가 읽은 책에서 그랬다.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 그 사람의 속눈썹 개수까지도 다 셀 수 있게 된다고. 식은 비로소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 *
“윤성아, 제일 중요한 건 안전이야. 알지?”
“네, 형. 거기 공항 도착하자마자 바로 연락할게요.”
“진짜로. 꼭 해. 기다리고 있을게.”
“네 절대 안 잊어요, 절대.”
“영화를 찍어라, 아주 둘이.”
윤성이 홱 고개를 돌려 우람을 쏘아봤다. 껄렁껄렁한 자세로 현관문에 기댄 우람이 인상을 구겼다. 와, 이 새끼 또 눈빛 바뀌는 거 봐. 윤성의 표정을 가리키며 이르는 듯 말하는 우람을 본 대현이 픽 웃으며 윤성의 어깨를 토닥였다.
“내가 너무 오래 붙잡고 있긴 했다. 형 기다리시겠네. 가.”
“네, 형. 근데 진짜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진수도 있잖아요.”
“응. 안 그래도 진수가 짐 바리바리 싸고 있다고 지웅이가 그러더라. 완전 도라에몽 수준이라며.”
“그 뜻으로 말한 건 아니지만…… 뭐…… 어쨌든 괜찮을 거예요, 형.”
배낭을 메고 서서 안심시키려는 듯 웃는 얼굴은 왜 이 순간에도 이토록 어리고 순해 보이기만 하는지. 괜히 찡해진 대현이 포옹해 오는 윤성의 등을 같이 안아주려 할 때였다.
“진수 형이 내려오라고 하시더라.”
“……아. 진짜요?”
“응.”
아까까지만 해도 베란다에서 통화를 하고 있던 식이 어느새 그의 뒤에 서서 대현의 팔에 매달린 윤성을 자연스레 떼어냈다. 눈을 깜빡이던 윤성이 아쉬운 얼굴을 하며 배낭을 추슬러 멨다.
“야. 이거.”
못마땅한 얼굴로 옆에 서 있던 우람이 뜬금없이 윤성에게 무엇을 던져 준 것도 그쯤이었다. 얼떨결에 그것을 받아낸 윤성이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고 우람을 응시했다.
“그, 뭐 물리면 바로 발라. 독하긴 한데 효과도 있어서 금방 아문대. 약국에서 사온 거야.”
“……혀엉…….”
“됐으니까 얼른 갖고 꺼져. 너 또 포옹하면 가만 안…… 씨발! 너 내가 이런 거 하지 말랬지!”
감동받은 얼굴로 달려드는 윤성을 진저리 치며 떨쳐내는 우람을 본 대현은 결국 웃을 수밖에 없었다. 둘 다 너무 귀여웠다. 흐뭇한 미소를 짓고 바라보던 대현이 멈칫했다. 좁은 현관 앞, 갑자기 움직인 윤성 덕에 덩달아 발을 옮긴 탓인지 뒤에 있던 식과 몸이 닿았다. 고개를 돌리자마자 마주한 까만 눈에 대현이 깜짝 놀라 허둥지둥 발을 옮겼다.
“아, 미안.”
“괜찮아요.”
당황한 자신과 다르게 차분한 식은 걱정 말라는 듯 웃어 보이기까지 했다. 멋쩍은 기분이 된 대현이 괜히 뒷목을 만지며 그의 시선을 피했다.
“형 기다리실 텐데.”
“아, 맞다.”
현관에 선 모두가 잊고 있던 사실을 한 번 더 일깨워 주는 식 덕에, 우람의 팔에 매달렸던 윤성이 정신을 차린 듯 떨어졌다.
“저 진짜 갈게요!”
“응. 조심해서 다녀와. 필요한 거 있으면 카드 쓰고.”
머리 위로 손을 뻗어 헝클어준 식을 마지막으로, 윤성이 손을 흔들며 문 사이로 사라졌다.
“카드? 너 쟤한테 카드 줬냐?”
“네.”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식에게 묻는 우람을 보고서야 대현은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그의 뒤에 선 식이 윤성에게 손을 뻗느라 제 어깨와 식의 어깨가 맞닿았었다. 순간 그 닿았던 부분에 신경 쓰느라 마지막 대화를 거의 흘려듣고야 만 탓에, 우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 죄다 낯설었다.
“미친. 누가 스무 살한테 카드를 줘. 어떻게 쓸 줄 알고.”
“어떻게 쓰면 뭐 어때요.”
“이거 완전…… 야, 그렇게 치면 나도 주지 그러냐.”
“형은 안 돼요.”
“왜 안 되는데? 꼴에 또 나름의 기준은 있나 보지?”
“쓸데없는 짓만 하실 거 같아서요.”
“와…… 이 새끼 봐, 이지후. 개어이없어.”
카드? 정신을 붙잡고 쫓은 대화에서 유난히 튀는 단어에 대현이 당황한 얼굴로 식을 응시했다. 의식하기도 전에 질문이 나갔다.
“어…… 정말 카드 줬어?”
“네.”
뭐라 말해야 할지 몰라 말을 고르는 사이, 식이 다시 입을 열었다.
“용돈 받아 써서 그런지 해외 결제되는 카드가 없대서 준 거예요. 한도도 낮고.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아…….”
덧붙인 설명에 대현이 멍한 표정을 지우고 이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아무런 이유도 없이 건네진 않았을 것 같긴 했다. 옆에 선 우람이 입을 떡 벌렸다.
“너 나한테는 왜 그렇게 설명 안 하냐?”
“제 마음이에요.”
약 오른 우람에게 어깨를 으쓱한 식이 거실로 걸어갔다. 그 뒤를 따라가며 툴툴대는 우람을 보던 대현이 함께 걸음을 옮기려다 말고 멈칫했다. 주머니 속의 핸드폰을 꺼내자마자 화면에 보이는 이름에 그가 망설임 없이 전화를 받았다.
“김지웅?”
[어. 나야. 윤성이 갔지?]
“응. 방금. 진수도?”
[어. 배웅해 주다가 생각나서 전화 해봤지. 너 혹시 우는 거 아닌가 싶어서.]
“……그만해라. 진짜.”
반가운 얼굴로 통화를 이어가던 대현이 인상을 찌푸렸다. 윤성이 정글에 가는 게 결정되고 바로 전화부터 했던 자신이 퍽이나 인상 깊었었는지, 메시지로든 전화로든 가끔씩 이야기를 꺼내는 지웅이 얄미웠다. 처음에야 예스에서 가장 멀쩡해 보이는 그가 어떻게 그 안에서 팀을 이끌어가는지 의아했지만, 겪다 보니 알 것도 같았다. 아니다, 어쩌면 더했다. 지웅은 눈치까지 빨라서 치고 빠지는 것까지 잘하니까. 이를 악문 대현을 느낀 듯 건너편에서 웃음이 건너왔다.
[뭐 해. 이제?]
“글쎄. 모르겠는데. 넌?”
[나도 아직은 계획 없어. 좀 있다 영화나 보러 가든지 하려고. ……아. 이태영. 떨어져.]
갑자기 톤이 달라진 지웅의 목소리에 멈칫하던 대현의 귀에 이내 태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후 형? 저희 영화 보러 갈 건데 같이 가실래요?]
“태영이?”
[역시 형…… 목소리만으로도 저를 알아보시는…… 아, 왜 때려! ……내놔.]
지웅과의 통화는 늘 이런 식이다. 다른 멤버들의 목소리가 중간 중간 끼어드는 통화는 처음에야 당황스러웠지만, 이제는 꽤 유쾌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웃으며 대꾸하던 대현이 옥신각신 다투는 소리를 듣다 멈칫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