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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애와 거리두기-98화 (98/119)

98화

그가 예상했던 것처럼 눈앞의 둘의 표정이 굳어가고 있었다. 시선을 교환하는 둘을 본 식이 입가에 미소를 띠웠다. 이럴 줄 알았다. 저만 따로 불러 이렇게 미팅을 잡으려 했던 건 저와만 재계약을 맺기 위한 초석을 다지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식은 현재 플러그 멤버들 중 가장 활동이 활발한 편이었다. 광고부터 시작해 영화, 드라마 등 들어오는 대본만 해도 다 보기에 벅찼다. 그래서인지 소속사는 눈에 보일 정도로 그와의 재계약에 욕심을 내고 있었다.

몇 달 전이라면 그도 못 이기는 척 내버려 뒀을 것이다. 소속사가 저를 잘 챙기지 못하는 편도 아니었고, 애초부터 큰 야망을 가지고 덤벼든 적도 없는 일이니까. 그는 지금 제가 가진 것에 만족했고 그 이상을 욕심내지 않았다.

그러니까 욕심 낼 만한 게 생기기 전까지는 그랬다. 그 사람이 그 몸에 남아 있던 게, 멤버들을 아우르기 위해 노력했던 게, 해체를 막기 위한 거였다는 걸 듣기 전까지는 그랬다. 그래. 그렇기에 그가 아무렇지 않게 생각해 왔던 것들은 이전과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됐다.

“저…… 식아. 너 혹시…….”

당황한 기색을 보이던 둘 중 결국 총대를 멘 건 한 실장이었다. 표정을 정리하고 식을 바라보는 안경 너머의 눈은 차분했다. 그래. 뼈가 굵은 그들이 이 정도 도발에 흔들릴 거라고는 애초에 기대도 하지 않았다. 식이 이어질 그의 말을 기다리며 의자에 등을 살짝 기댔다.

“마음이 바뀌거나 그런 건…….”

“제가요?”

“식아.”

“에이.”

그가 말도 안 된다는 듯이 고개를 저으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마주본 얼굴이 안심한 표정을 하고 풀려가는 게 보인다. 어깨를 으쓱한 식이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말했다.

“전 원래부터 따로 갈 생각 없었어요. 플러그랑.”

“…….”

“그래서 왜 자꾸 저만 이렇게 따로 미팅을 하자고 하신 건지 이해가 안 가던데. 삼 개월 보류. 아직 안 끝났잖아요.”

“…….”

“기대해도 좋다고 귀띔해 주시려고 그런 거면 다행이구요. 멤버들한테 전해줘도 되나요?”

코트 주머니 속으로 손을 넣어 핸드폰을 찾는 시늉을 하자마자 따라오는 시선들이 다급했다. 결국 벌떡 몸을 일으키기까지 한 남자를 확인한 식이 얼굴에 띠고 있던 미소를 지웠다. 그가 주머니에 넣었던 손을 뺐다. 애초부터 시늉만 한 거니 핸드폰을 꺼낼 필요는 없었다. 건너편을 앉은 얼굴들을 찬찬히 훑던 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갑자기 이러는 건 아닌 것 같다, 식아. 네 말대로 아직 대표님이랑 이야기도 안 끝난 사항이잖아.”

“갑자기요.”

“그래. 갑자기! 이게 무슨 짓이야. 사람을 앞에 두고 뜬금없이…….”

“어디까지가 갑자기인 건지 말해주세요. 모두가 쉬쉬하면서도 다 알고는 있는 유은호 기사는 막고 있으면서, 재계약 실패 예상하는 기사는 안 막는 이유가 뭔지.”

“…….”

“방금 전까지도 제 재계약 예상 기사 보고 왔어요. 언론사 다섯 개에서 말하는 시나리오가 다 똑같더라구요. 마치 누가 써준 것처럼.”

“…….”

“그것도 갑자기 일어난 일이죠? 제 재계약 성공한 다음에 한 번에 터뜨리려고 준비하고 있는 게 아니라. 그냥 우연의 일치인 거죠?”

할 말을 잃은 둘을 번갈아 본 식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대표님 어디 계세요.”

“대표님은 왜…….”

“이렇게 된 이상 덜 끝낸 이야기나 마저 끝내볼까 하구요.”

“김 식! 너 정말 왜 이래! 미쳤어?”

남자가 결국 이를 악물며 소리쳤다. 창백한 얼굴을 마주 본 식이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냥요. 갑자기 그러고 싶어졌어요, 저도.”

문을 열자마자 보인 얼굴은 언제나처럼 여유로웠다. 식이 싫어하는 모습이기도 했다. 늘 모든 게 제 손 위에 있다는 것처럼 구는 저 얼굴을 볼 때마다 자연스레 떠오르는 것들은 그를 괴롭게 했으니까.

“그래. 깽판은 치고 싶은 만큼 쳤고?”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는 그는 그럼에도 문가에 선 사람이 식인 걸 아는 듯 말하고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이 드디어 정면을 응시한 건 식이 문을 소리 나게 닫고 그의 앞에 섰을 때였다. 동요할 뻔한 자신을 애써 가라앉힌 식이 무표정으로 그를 내려다봤다.

“말씀 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대답 대신 한참이나 그를 바라보던 얼굴은 이내 뒤의 의자를 턱짓했다. 자리에 앉은 식이 표정을 죽이며 그를 마주봤다.

“저 재계약할 생각 없어요.”

“…….”

“멤버들이랑 같이 하거나, 아니면 안 해요.”

모든 걸 꿰뚫어볼 것 같은 눈빛에 그가 읽어내지 못할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그럼에도 식은 음절마다 힘을 주어 내뱉는 행위를 멈추지 않았다. 말이 끝나자마자 사무실 안을 가득 채운 침묵이 양보 없이 시선을 나누는 두 남자의 주위를 얼어붙게 했다.

그가 입을 연 건 한참 뒤였다. 옆에 놓인 물 잔을 들어 목을 축이는 얼굴은 그러는 동안에도 식을 빈 틈 없이 응시하고 있었다.

“이유는?”

“말할 필요성 못 느껴요.”

“건방지네. 그것도 엄청.”

뱉어낸 말과 다르게 식을 바라보는 눈은 흥미로움을 가득 담고 깜빡이고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줄곧 읽어내려 했지만 한 번도 성공한 적 없는 얼굴을 앞에 둔 식은 처음으로 감정이 이성을 이겨 지르는 행위를 하지 않고 그의 시선을 받아칠 수 있었다.

“그래서…… 나보고 선택을 하라는 건가.”

의자에 등을 기대던 그의 시선이 식을 벗어나 허공에 닿았다. 이내 그의 비스듬히 기울어진 입가 사이에서 웃음이 흘러나왔다.

“언제부터 이렇게 재밌어진 거지, 너네.”

“…….”

“사실 볼 때마다 지루했거든. 도대체 뭘 하자는 건지도 모르겠고.”

“…….”

“근데 얼마 전부터는 안 그러네. 신기하게.”

조곤조곤 말을 이어나가는 얼굴은 눈앞의 식을 보면서도 그가 보이지 않는 것처럼 눈썹 뼈 부근을 긁기도, 픽 웃기도 했다. 식은 그 모든 모습을 가만히 관찰했다. 주먹을 꽉 쥐고, 그의 행동은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것처럼.

“근데 그거 알아?”

마침내 그의 눈빛이 식에게 닿았다. 웃음기가 남은 눈은 어느덧 식을 날카롭게 응시하고 있었다.

“이거 되게 위험한 마인드거든, 특히 투자자한테. 재밌다고 해서 그게 다 수익이랑 연결되는 건 아니잖아.”

“…….”

“근데 보다시피 난 수익을 창출해야 하는 위치에 앉아 있고. 내가 어떤 결정을 하는지에 따라 밥줄 끊길지 모르는 사람도 수두룩하고.”

“…….”

“이게 무슨 말이냐면, 네가 지금 나한테 제공하는 흥미만으로는 내가 네가 바라는 선택을 할 확률이 거의 없다는 거야. 알겠어?”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리고 예상하지 못한 반응도 아니었다. 식이 의자에 앉은 몸을 앞으로 뺐다. 사무실에 들어올 때부터 손에 들고 있었던 하얀 뭉치를 책상에 올려놓은 그가 차분한 눈빛으로 앞의 사내와 눈을 맞췄다.

“굿즈 판매량, 앨범 판매량, 화제성 수치. 어림잡아도 두 배 이상으로 올랐어. 그 모든 게 지원 없는 상태에서 이뤄졌다는 건 애초에 당신이 건 조건이었으니까 잘 알 테고.”

“…….”

“투자비 회수는 진작 끝난 거 알아. 콘서트만 두 번을 했는데. 회수를 못 했으면 그건 우리 문제가 아니라 소속사 문제지. 안 그래?”

“…….”

“남은 건 앞으로 수익 창출이 가능할까 문제일 텐데…… 잘 생각해 봐. 인지도도 없는 신인 키우며 얻을 수 있는 게 멀쩡한 그룹 해체시켜서 얻을 수 있는 편익보다 커?”

한 번도 끊지 않고 그의 말을 듣고 있는 얼굴은 제 앞의 종이 뭉치를 들여다보지도 않았다. 그의 시선을 느낀 식은 지금이 그가 여태껏 한 번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던 이야기를 할 타이밍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왜 이 회사에 왔는지 알아?”

“…….”

“나한테 외롭냐고 물어본 사람. 거기서 당신밖에 없었거든.”

‘외로워 보인다, 너.’

‘……누구세요?’

대답 대신 빙그레 웃던 얼굴은 말없이 제게 손을 내밀었다. 홀린 듯 그의 손을 잡고, 양복 차림의 그에게 이끌려 들어간 큰 응접실에서야 알았다.

‘숙모님. 안녕하세요.’

그 응접실 안에서 제게 시선을 준 사람은 그뿐이었으며, 아무도 마음 한켠 내주지 않는 저택에서 쭈그리고 앉아 있는 저를 발견한 것도 그뿐이었고, 그 사람은 자신의 사촌형이라는 걸.

‘저희 회사에서 지금 아역 배우들을 키우고 있는데…….’

그리고 그의 외로움을 눈치채는 것에 그치지 않고 손을 내민 사람도 그뿐이었다. 그 모든 게 너무 벅차서 식은 감히 그 손을 거절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어쩌면 외로움을 눈치챈 그가, 자신을 덜 외롭게 해주지 않을까 기대도 했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그의 회사로 따라간 식은 여전히 외로웠다. 바쁜 그는 보기도 힘들었으며, 가끔 만나게 되었을 때도 식에게 별 다른 애정을 보여주지 않았다. 손을 내밀었던 그가 사실 제 외로움을 덜어줄 생각이 아니었을 수도 있겠다고 냉정히 생각할 수 있게 된 때는 식이 외로움을 익숙하게 감출 수 있을 정도로 큰 이후였다.

그리고 플러그로 데뷔를 했다. 애초에 기대도 하지 않았건만 약속하기라도 한 것처럼 각기 다른 방향으로 엇나가는 멤버들은 기대도 없었던 그를 실망케 했다. 가끔은 못 견디게 화가 났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멍청한 자신에게 분노했다.

뭘 믿고 자신은 그를 따라왔고, 또 기대를 한 걸까. 팀워크를 기대한다며 웃는 총괄팀장의 뒤에서 빤히 보고 있던 눈이 이번만은 정말 자신을 위한 거였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자신이 멍청했다. 이 정도 되면 병이 아닌가, 자조하고 스스로를 업신여겼다.

“그 세월들을 다 지나서. 이제야. 겨우. 안 외롭게 될지도 모르는데.”

“…….”

“또 그 과정을 반복하게 하는 건 외롭냐고 물어봤던 사람이 해서는 안 될 일 같은데.”

일어선 식을 응시하는 그의 표정이 처음으로 흐트러졌다. 식이 앞의 플라스틱 명패를 건드렸다. 조금 삐뚤어진 명패의 각도를 조절하고 손을 놓았다. 천장에서 쏟아지는 빛에 맞춰 반짝, 빛을 내는 이름을 바라본 그가 마지막으로 읊조렸다.

“어떻게 생각해, 김 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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