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콩 또 골라내면 뒤질 줄 알아라, 너.”
“형…… 저 콩밥 진짜 싫어한단 말이에요.”
“어쩌라고. 건강에 좋은 거니까 그냥 처먹어.”
“……지후 형 보고 싶다.”
“걔도 너 콩 안 먹는 거 알면 뭐라 할걸.”
욕실에서 나오던 식이 눈앞의 풍경에 시선을 둔 채 멈춰 섰다. 부엌에 앉아 티격대는 둘을 발견한 그의 얼굴빛이 묘해졌다. 그의 존재를 눈치챈 듯 뒤돌아본 윤성과 우람도 동시에 멈칫 하는 게 보였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뭐.”
“잘 어울리시네요, 앞치마.”
퉁명스럽게 말을 건넨 우람을 시작으로 식도 입을 열었다. 입가에 맴도는 웃음을 굳이 감추려 노력하지도 않으며 그가 우람의 앞치마를 눈짓했다. 불만스러운 표정으로도 시선을 내린 우람의 얼굴이 빨개지는 게 보였다. 그도 잠깐, 고개를 다시 든 그가 식에게 짜증을 냈다.
“병아리가 어때서 지랄이야.”
“지랄이라뇨. 칭찬한 건데.”
“재수없는 새끼…… 웃지나 말고 말해라.”
툴툴대는 그는 그러나 예전처럼 날을 드러내지 않았다. 새삼스러웠지만 눈앞에 있는 얼굴이 제게도 딱히 불편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걸음을 옮기던 식이 제 팔을 붙든 손을 따라 시선을 올렸다.
“형. 밥…… 드셨어요?”
윤성이었다. 어색한 표정으로 묻는 그는 그러나 팔을 붙잡은 손에 힘을 풀지 않았다. 눈에 보일 정도로 기죽어 있던 그의 얼굴은 못 본 새에 많이 밝아져 있었다. 어쩔 줄 모르는 얼굴에서마저 묻어나는 천진한 빛을 관찰하던 식은 이 모든 걸 가능하게 한 사람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잠시 가라앉은 눈빛을 하던 그가 윤성에게 붙잡히지 않은 손으로 머리에 얹어놓은 수건을 집어 뒤로 던졌다. 빨래통 안으로 깔끔하게 빨려 들어간 수건을 확인한 그가 고개를 돌려 우람을 응시했다.
“뭐.”
“먹어도 돼요?”
“……그걸 왜 나한테 묻는데. 네가 알아서 퍼 먹어.”
퉁명스럽게 말하면서도 옆 의자에 얹어놓았던 발을 내린 우람은 결국 일어나 밥까지 퍼서 식의 앞에 가져다 줬다. 그의 앞에 놓인 콩이 수북하게 쌓인 밥을 본 윤성이 대신 헛숨을 들이켰다.
“남기면 뒤진다.”
“괜찮아요. 저 콩도 잘 먹거든요.”
나름의 장난이었는지 콩밥을 흘끔거리는 우람의 광대가 작게 씰룩대는 게 보였다. 유치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식은 숟가락에 밥을 한 가득 퍼 입에 넣었다. 일부러 더 맛있게 씹는 척을 하며 시선을 마주하자 구겨지는 얼굴이 보였다.
“형, 반찬도 드세요.”
몇 개 되지 않는 반찬을 밀어주는 윤성은 아직도 식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고개를 돌릴 때마다 마주치게 되는 순한 눈을 보던 식은 지후가 왜 그렇게나 윤성을 신경 쓰는지도 알 것도 같았다. 그의 밥공기를 보니 더 그랬다. 흰 밥이 안 보일 정도로 한 구석에 쌓여 있는 검은콩을 본 식은 결국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입매가 허물어지고 결국 작은 웃음이 새어나왔다.
“심하긴 하다 너. 그래도 조금은 먹어야지.”
“……형까지 왜…….”
“봐봐. 내가 이상한 게 아니라니까. 야. 콩을 먹어야 키가 큰다고. 그 칼…… 칼륨?”
“칼슘.”
“그래. 칼슘이든 칼륨이든 쨌든 그거! 많다고 선생님이 그랬어. 전문가의 의견이니까 믿고 먹어.”
“전 키 안 커도 되는데…….”
“야, 너 내가 여기서 키 제일 작다고 까는 거지. 그래봤자 너랑 나랑 4센치 차이 나거든?”
울상을 한 윤성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한 말에 발끈하는 우람까지. 눈앞의 풍경은 식이 그룹 활동을 시작하고 한 번도 그려본 적 없는 것들이었다. 연습실, 무대 등 한정된 장소에서 섰을 때에나 하나로 묶여 있던 사람들은 이제 그 밖의 공간에서도 자연스럽게 어우러지기 시작했다. 그를 가능케 한 사람만 지금 이 자리에 없었다. 씁쓸하게 느껴지는 그 사실을 식은 입안에 든 밥과 함께 씹어 넘겼다.
얼마 전부터 회사에서는 식과 마주할 상황을 만들지 못해 안달이었다. 그들의 속셈이 뻔히 읽혔지만 더는 피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동안은 촬영 일정을 핑계로 이리저리 미뤄왔다지만 얼마 전 미팅을 요청했던 자동차 광고주는 식이 회사와 제대로 된 재계약을 맺지 않았다는 사실에 유독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게 아마 그들이 이렇게 자리를 마련하려 애쓰는 이유겠지.
오늘쯤 회사에 한번 들려야겠다고 생각했지만 그가 언제 올지 촉각을 곤두세우는 듯한 그들의 연락이 귀찮은 것도 사실이었다. 오후쯤에 간다고 진수를 통해 말을 해놓았음에도 몇 시에 올 거냐고 묻는 연락이 끊임없이 오는 문자를 무시한 식이 핸드폰을 덮어놓을 때였다.
노크 소리가 들렸다.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으면서도 순간 지후일까 생각했다. 어제 들어오자마자,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확인한 그의 방은 비어 있었다. 어제 병실에서의 분위기를 봤을 때 그가 금방 돌아오지 않으리란 건 알 수 있었음에도 막상 빈자리를 확인하니 기분이 이상한 것도 사실이었다. 다행히 윤성과 우람에게도 따로 연락을 해놓은 모양인지, 식이 설명하기 전부터도 지후의 부재를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둘을 보며 그 와중에도 멤버들을 잊지 않는 그에 대한 복합적인 감정이 들기도 했다.
“들어와.”
지후가 없는 숙소에서 그의 방을 굳이 찾아와 노크를 할 사람은 윤성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온 반말이었으나 문을 연 사람은 식의 예상과 달랐다.
“바쁘냐?”
어색해 죽을 것 같은 표정의 얼굴은 식이 빤히 바라보자 헛기침을 했다. 그제야 그의 얼굴에서 시선을 뗀 식이 의자 옆에 서 있던 몸을 옮겨 침대에 앉았다.
“아뇨.”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식의 시선을 피하는 얼굴은 당장이라도 이 방을 뛰쳐나가고 싶은 듯 보였다. 그럼에도 그의 두 발이 아직 방에 붙어 있는 건 그 모든 걸 참고도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이리라. 판단을 끝낸 식이 의자 쪽으로 눈짓을 했다. 앉으실래요? 잠시 망설이던 그는 토를 달지 않고 의자 쪽으로 걸어가 앉기까지 했다.
이쯤 되니 그가 그 어색함을 참고 찾아오게 된 이유가 궁금했다. 호기심을 숨기지 않은 식이 그의 얼굴을 관찰하듯 바라볼 때였다.
“이지후 있잖아.”
한참을 기다려야 할 줄 알았던 첫 마디는 싱거울 정도로 빨리 나왔다. 말을 꺼냄과 동시에 식을 마주보는 시선은 진지했다. 팔을 뒤로 짚은 다소 풀린 자세로 그를 응시하고 있던 식이 자세를 바꾸며 그의 시선을 받아쳤다.
“걔…… 혹시 무슨 일 있냐?”
“…….”
“요새 얼굴도 안 좋고…… 집에 안 들어오는 날도 많아지는 것 같아서. 내가 물어보면 대답을 잘 안 해. 맨날 괜찮다고만 하고.”
“…….”
“걔가 그래도 우리 중엔 널 제일 신뢰하는 것 같아서 물어보는 거야. 혹시 아는 거 있나 싶어서.”
식은 그제야 우람이 자신보다 한 살이나마 더 많은 형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조심스럽게 말을 잇는 얼굴에는 그가 늘 내세우곤 하던 자존심이 보이지 않았다. 지금에야 사이가 나아졌다지만, 그 전까지만 해도 둘은 일상적인 대화 한 번 나누지 않는 사이였다. 그런 사이에서 먼저 방까지 찾아와 물어볼 생각을 한 건 그가 다른 것을 위해 기꺼이 제가 중요시 여기던 걸 뒤로 제쳐 놓을 수 있다는 걸 의미했다. 그리고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사람은 식에게도 중요한 사람이었다.
설명할 수 없는 묘한 간지러움이 그의 마음을 간질였다. 고마운 것 같기도, 한편으로는 어딘가 미안한 것 같기도 했다. 그러니까 처음으로 눈앞의 그가 자신과 같은 편의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건 매우 이상한 느낌이었다. 할 말을 잊고 가만히 그의 얼굴을 응시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야. 그만 보고 말을 해.”
줄곧 쏟아지는 시선이 부담스러웠던지 인상을 찡그린 그의 투덜거림을 듣고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식이 말을 골랐다. 어제 들은 이야기를 앞의 우람에게 곧이곧대로 전할 수는 없었다. 애초에 지후가 그걸 원하는지도 알 수 없었고. 거기다가 그가…… 진짜 지후가 아니라는 것을 우람이 어떻게 받아들일지도 모르니까.
생각을 마친 그가 입을 뗐다. 우람의 시선을 마주한 채로 천천히 뱉어내는 말들은 그래도 거짓말들은 아니었다.
“저도 잘은 모르지만 친구분이 다치셨다고 들은 것 같아요.”
“진짜? 언제?”
“……그건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래서 걔가 그런 거야? ……많이 친하대?”
“……네.”
친한 것 이상일지도 모른다. 핸드폰 너머에 건너온 소리에 하얗게 질리던 얼굴을 어렵지 않게 떠올린 식이 작게 고개를 저었다. 질투를 할 타이밍은 아니었다.
“……난 또. 알았어.”
생각에 빠진 얼굴을 하던 우람이 이내 자리에서 일어섰다. 별 생각 없이 그를 따라 시선을 올리던 식이 멈칫한 것도 그쯤이었다. 그가 한 말 중 ‘난 또’라는 말이 갑자기 마음에 걸린 탓이었다. 마치 그가 예상한 다른 이유라도 있었다는 어조에 불안해졌다. 어쩌면 당연한 수순으로 질문이 튀어나갔다.
“왜요?”
“뭐가.”
“방금 난 또, 라고 하셨잖아요. 뭐 짚이는 게 있으셨나 해서요.”
“아…….”
식이 물어볼 거라 생각하지는 못했는지 당황한 얼굴을 하던 우람은 그러면서도 식에게 자신이 생각했던 이유를 털어놓았다. 이야기를 다 들은 그의 얼굴은 우람이 멈칫할 정도로 굳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