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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애와 거리두기-94화 (94/119)

94화(Ch 4_2.)

“지금 각도 좋아. 좀 쉬다 이대로 한 번만 더 가자. 괜찮지?”

이런 외지에서 일주일이 넘는 촬영 일정을 잡았을 때부터 눈치챘어야 했지만, 광고 촬영감독은 열정이 넘쳐도 너무 넘쳤다. 어렸을 때부터 촬영장에서 살아 버릇했던 탓에, 웬만해서는 촬영현장에서 필요 이상의 감정을 드러내는 일 없는 식도 슬슬 지친 티를 낼 수밖에 없 을 정도였다.

같은 앵글에서만 슛이 벌써 몇 번째인지. 원하는 대로 톤을 바꿔 여러 번 대사를 뱉었으나 아직 그가 바라는 느낌이 나오지 않았는지 계속 시켜대는 그 덕에 이제는 누가 툭 건들면 대사부터 나올 정도였다. 상대편 배우도 식과 별다르지 않은지, 첫날만 해도 모두를 향해 방긋대던 그녀의 화사한 얼굴은 이제 누가 보아도 언짢음이 느껴질 정도로 찌푸려져 있기도 했다.

화장을 고쳐 주러 다가온 코디가 건넨 핫팩을 받던 식이 멈칫했다. 덜덜 떨고 있는 상대 배우를 본 그가 망설임 없이 핫팩을 그녀 쪽으로 건넸다. 깜짝 놀란 눈으로 보던 그녀가 고개를 숙이며 받는 걸 본 그가 별 감흥 없이 시선을 돌렸다. 카메라 앞에 서 있는 감독을 확인한 그가 이내 표정을 정돈했다. 대사를 중얼거려 보던 그가 뱉은 숨이 연기가 되어 허공에 흩어졌다.

“식아, 여기 봐.”

“아, 네.”

“뭐 묻었어서. 됐다. 뗐어.”

코디의 신장에 맞춰 허리를 숙여주던 식이 멈칫했다. 식에게 그의 코트에 붙어 있던 먼지를 보여주던 코디가 이내 물러섰다. 앞의 얼굴과 하나도 닮지 않았음에도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뭘 이렇게 묻히고 다녀.’

코디가 방금 먼지를 떼어낸 곳과 비슷한 곳을 스쳐 간 손은 그러나 전혀 다른 감정을 느끼게 했다. 그의 손이 닿은 곳이 화끈거리는 것만 같고, 그래서 더더욱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게 되어버려서 결국 입을 꾹 다물고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그때를 떠올린 식의 표정이 묘해졌다.

“자. 촬영 들어가겠습니다~”

촬영장을 쩌렁쩌렁 울리는 스탭의 고함을 듣고서야 정신을 차린 그가 다시 감정을 잡았다. 그들이 촬영하고 있는 건 의류광고. 여행을 간 커플이 밤하늘을 보며 서로에게 기대 있는 단순한 콘티로 진행되는 촬영은 현재 밤하늘을 보며 낯간지러운 말들을 뱉어내는 장면에 걸려 멈춰 있었다.

“아까 거기부터 다시. 자, 그럼 슛!”

촬영 신호음이 들리자마자 손의 핫팩을 입고 있는 옷 주머니에 넣은 그녀가 식을 돌아봤다.

“예쁘다. 그치?”

식처럼 표정을 빠르게 정돈한 그녀가 눈을 접어 웃으며 어깨를 기대왔다. 그 위로 자연스레 겹쳐지는 얼굴은 마치 식에게 말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이제는 인정하라고 말이다.

“……응.”

추위에 얼은 얼굴이 그의 생각만으로도 자연스럽게 풀려가는 걸 느낀 식이 마찬가지로 눈을 휘어 웃었다.

“예쁘네.”

더는 부정할 수 없었다. 그가 그리웠다.

거실에서 자고 있는 그를 한 번 더 살핀 식이 침대에 걸터앉았다. 집 안 온도도 좀 올려두었고, 담요까지 덮어주었으니 감기에 걸릴 일은 없겠지. 안심한 식이 뻑뻑함이 느껴지는 눈을 꾹꾹 누르면서도 노트북을 잡은 이유는 별다른 게 없었다. 단지 제가 없을 때의 그가 어떻게 지냈을지가 궁금했다.

영상을 틀자마자 윤성이 나왔다. 스케이트보드를 든 그는 카메라를 향해 어색한 브이를 그려 보이더니 이내 불안한 폼으로 스케이트보드 위에 올라탔다. ‘야, 조심 안 하냐? 이쪽으론 오지 말라고!’ 배경음악처럼 깔리는 소리는 우람의 목소리임이 분명했다. 조심을 하라는 건지, 화를 내는 건지. 도통 알 수 없는 목소리를 들으며 픽 웃던 식이 갑자기 반전된 화면에 멈칫했다. 화면이 거칠게 흔들리더니 이내 우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저럴 줄 알았다.]

혀를 차던 우람은 그러면서도 넘어진 윤성과 그에게 달려간 지후를 담아냈다. 윤성의 바지를 올려 상처를 확인하는 지후의 얼굴이 다급해 보였다. 다행히 다친 건 아니었는지 윤성의 깨끗한 무릎을 확인한 얼굴은 굳어 있던 표정을 풀고 이내 앞의 윤성을 향해 씩 웃어 보이기까지 했다. 그 얼굴에 시선을 둔 식의 속눈썹이 깜빡거렸다.

[저 괜찮아요, 여러분! 걱정하지 마세요!]

[야, 뛰지 마. 저게 진짜! 또 넘어지고 싶어서 환장을 했지 아주.]

[형, 카메라 저 주세요.]

[싫은데.]

[지후 형 찍으려 그런 건데.]

[……떨어뜨리기만 해봐라, 너.]

화면에 가깝게 다가온 윤성과 우람의 투닥거림이 들리더니 이내 또 화면이 흔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화면에 등장한 얼굴은 방금 넘어진 사람이라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해맑아 보였다. 셀프캠을 찍듯 자신의 얼굴을 화면에 꽉 차게 들이대던 윤성의 뒤로 지후가 보였다. 윤성이 내팽개친 스케이트보드를 들고 오던 얼굴이 카메라에 시선을 맞추고 걸음의 속도를 늦추는 게 보였다.

[형! 저희 같이 찍어요!]

[촌스럽게. 이게 무슨 셀카인 줄 아냐?]

[형은 안 찍으셔도 돼요.]

[이게 갈수록……&^%ㄴ%^]

이제는 익숙하게 느껴지는 투닥거림 뒤에 결국 지후가 윤성의 팔에 끌려왔다. 어색한 얼굴로 카메라를 바라보는 얼굴은 다음 순간 윤성의 애교 아닌 애교에 풀어졌다. 누군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것도 모르는 듯 하얗게 웃는 옆얼굴이 낯설게 느껴졌다. 투덜거리면서도 웃음기가 묻어나는 우람의 음성도, 화면에 가득한 윤성의 얼굴까지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는 사이에 영상은 끝나 있었다. 다시 보겠냐는 알림 문구가 뜨는 화면을 바라보던 식이 무릎 위에 괸 손으로 턱을 만지작거렸다.

그러고 보니까, 언제부터 이 모든 게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더라. 방금 느낀 낯섦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거였다. 교류는커녕, 함께하는 활동이 아닌 한 서로 얼굴을 마주보는 것도 어색해했던 멤버들이었기에. 근데 언젠가부터 그 당연하게 여겨졌던 것들이 바뀌기 시작했다. 지후를 중심으로 모인 셋은 어느새 대화를 하고 함께 시간까지 보내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게 언제부터였지? 머리에서 뚝뚝 흘러내리는 물도 깨닫지 못한 채 생각에 빠졌던 식은 곧 고개를 돌리며 일어설 수밖에 없었다.

“김 식?”

문가에 선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흩어진 상념들은 그가 모르는 곳으로 사라져 버렸다. 남은 건 그가 촬영 내내 이상하리만치 그리워했던 얼굴. 잠기운을 완전히 떨쳐 내지 못한 얼굴과 달리 식을 응시하는 옅은 갈색의 눈은 또렷했다.

“……형. 일어나셨어요?”

방 안을 훑는 그의 시선이 별 의미 없는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입이 말랐다. 어색한 그의 표정이 제 상체에 꽂힌 걸 안 순간 그 이유 모를 갈증은 더해갔다. 집히는 대로 옷을 주워입은 그가 뒤를 돌자마자 보인 풍경에 멈칫했다. 화면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옆얼굴은 복잡해 보였다. 그의 물음에 답하던 식은 이어진 그의 말에 가슴 속에서 일어나는 충동을 꾹 누를 수밖에 없었다. 묻고 싶었다.

“바빴잖아. 숙소에도 잘 못 들어오고.”

그렇게 못 본 동안 형도 제가 보고 싶었어요? 생각난 말을 꺼내는 대신 그는 중얼거렸다.

“보고 싶었으니까요.”

되묻는 얼굴을 보며 더 하고 싶은 말들을 꾹 눌렀다. 섣부르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를 볼 때마다 한 손에 잡힐 것처럼 다가오는 감정들은 그러나 그 얼굴을 마주할 때는 어딘가로 숨어버리는 것 같았다. 왜일까. 거추장스럽게 내려온 머리를 쓸어 올리던 그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는 지후를 따라 시선을 옮겼다.

“저…… 내가 너무 방해한 것 같아. 촬영하느라 피곤했을 텐데. 쉬어.”

그렇지만 그 감정을 정확히 정의할 수 없다고 해서, 굳이 그와 거리를 둘 필요는 없다. 섣부르다 해서, 그게 나쁜 결과로 이어지리란 보장도 없다. 그렇게 거슬리는 것들을 하나둘 지워가면 남는 건 눈앞의 얼굴과 자신뿐.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몸이 나갔다. 제 손에 잡힌 팔목을 내려다보던 식은 어색하게 돌아보는 얼굴을 마주하고서야 할 말을 고민해야 했다. 뒤죽박죽 엉기는 머릿속에서 공통되는 것들이 있다면, 눈앞의 그가 계속 제 앞에 있었으면 좋겠다는 것. 여태껏 그에게 등을 보인 사람은 많았다. 어린 아들을 뒤에 두고도 망설임 없이 외국으로 떠난 부모님도 그랬고, 빠르게 제 앞길을 찾아 나선 형들도 예외가 아니었으며, 그의 지나간 애인들도 그랬다.

“같이 있으면 안 될까요, 형이랑.”

그렇지만 식이 붙잡은, 그리고 붙잡혀 준 사람은 그가 처음이었다. 거기서부터 모든 것은 새롭게 정의될 필요가 있었다. 결국 고개를 작게 끄덕이는 얼굴을 보며 식은 그 정의의 끝이 멀지 않았음을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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