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가라.”
“어. 야. 잠깐만.”
뒷좌석에 나른하게 기대던 선우가 멈칫했다. 아까 뒷좌석에서 본 종이 봉투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어제 영민을 집에 데려다준 것 빼고는 아무도 태우지 않았으니 영민이 놔두고 간 것일 게 분명했다. 옆 좌석에 놓인 종이봉투를 잡은 선우가 창문이 열린 사이로 봉투를 건넸다.
“정신 좀 똑바로 챙기고 다녀라.”
“갑자기 웬 시비. 뭐야. 이건 왜 주는데.”
“네가 놔두고 갔잖아.”
“엥? 아닌데. 이게 뭔데?”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이 제 앞으로 내밀어진 봉투를 어리둥절하게 응시했다. 봉투를 한 번, 저를 한 번 보는 얼굴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아 보이진 않았다. 미간을 찌푸리던 선우가 봉투의 겉면에 적힌 글자를 읽으려 할 때였다. 영민의 알겠다는 듯한 감탄사가 들려온 건.
“아.”
“기억났으면 들고 가, 얼른.”
앞에서 기다리시는 기사님에게도 죄송하고, 영민의 것일 게 분명한 걸 가지고 씨름하는 것도 짜증이 난 선우가 손에 든 봉투를 흔들 때였다. 고개를 갸웃한 영민이 갑자기 뜬금없는 말을 건넸다.
“이거 네 거잖아.”
“뭐래. 이게 왜 내 거야.”
“병실에 네 코트랑 같이 있던데. 그래서 네 건 줄 알고 가져왔지. 뭐야. 네 거 아니야?”
“뭐. 엊그제?”
“어.”
“……미치겠네.”
“뭐야. 아니었어? 헐. 그럼 그 사람 건가 보다. 그 이지후.”
발을 동동대며 헐헐 소리를 내뱉는 얼굴을 상대로 얘기해 봤자 해결책이 나올 것 같진 않다. 인상을 찡그린 선우가 창문 틈새로 손을 휘휘 저었다. 알아서 할 테니까 가. 결국 짜증을 내고 나서야 창문에 붙은 얼굴이 떨어져 나갔다.
내려간 창문을 올리려던 선우가 멈칫했다.
“야, 선우야.”
“아 ㅆ…… 쌍욕 나오게 하지 마라 진짜. 취했냐, 너?”
“응. 좀.”
“집 안까지 모셔줘?”
“그럴래?”
“뒤진다. 얼굴 빼.”
창 사이로 얼굴을 내민 영민의 이마를 힘주어 밀던 선우가 진지한 눈빛을 마주하고 멈칫했다.
“그래도…… 정대현은 어디 가는 거 아냐.”
“…….”
“그치.”
“……몰라, 병신아.”
“어차피 우린 걔 못 이겨. 인정해.”
답지 않게 진지한 눈빛을 얼마간 마주보던 선우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렸다. 그제야 창문 사이로 넣었던 얼굴을 쏙 뺀 영민이 양손을 들어 장난스럽게 흔든다. 저거 진짜. 씩 웃어 보이는 얼굴이 얄미웠다. 갑작스러운 진지한 말로 사람 기분은 복잡하게 해놓고, 이제 자신은 홀가분하다는 양 돌아서 대문으로 들어가는 유유자적한 뒷모습을 노려보던 선우가 휙 소리가 날 만큼 크게 고개를 돌렸다.
“기사님, 죄송합니다. 이제 출발하셔도 돼요.”
차가 부드럽게 출발했다. 영민에 대한 복수라도 하듯 창문부터 올린 선우의 시선이 그가 창문 사이로 다시 던지고 간 종이봉투에 닿았다. 잠시 망설이던 선우가 종이봉투를 들어 무릎 위에 올렸다. 자세히 보니 봉투에 서점 로고가 크게 박혀 있었다. 선우가 기억하기로는 대현이 병실로 뛰쳐들어와 자신이 대현이라고 주장하기 전부터 있었던 것이기도 했다. 의자 위에 비스듬하게 놓여있던 종이봉투를 떠올린 선우가 멈칫했다.
그럼 이 종이봉투는 그…… 이지후라는 사람의 것이겠지.
며칠 전만 해도 대현이라고 믿었던, 생일파티까지 해주었던 사람의 얼굴을 생각하자 기분이 묘했다. 입술을 깨문 선우는 그러면서도 봉투 안을 슬쩍 들여다보는 자신을 막지 못했다. 차 내부는 밖의 가게에서 새어 나오는 빛이 아니면 어두웠다. 핸드폰을 들어 안을 비춰보던 선우의 행동이 우뚝 멎었다.
순식간에 표정을 굳힌 그가 손을 뻗어 종이봉투 안에 든 책을 꺼냈다. 자연스레 시선이 책의 반을 가린 띠지에 쏠렸다.
「이별한 당신을 위한 단 하나의 책, 지금 당장 선택하세요.」
유치한 문구에 눈을 찌푸리던 그의 생각이 며칠 전의 일에 멎은 것도 그쯤이었다.
‘……그게 네 잘못인지 어떻게 알아.’
‘…….’
‘그냥…… 맞는 사람을 못 찾은 걸 수도 있잖아.’
시선을 돌리고 조곤조곤 내뱉던 말은 제가 이름밖에 모르는 그의 작품이었을까. 그렇다면 그 말에 위로를 받은 자신은 대현이 아닌 그에게 위로를 받은 건가. 이름밖에 모르는, 몸이 바뀌었다는 친구의 얼굴을 보고서야 알 수 있는 사람에게서.
그 사람은…… 무슨 생각을 하면서 대현으로 살았던 걸까. 어지러이 스쳐 지나가는 바깥 풍경을 멍하니 응시하는 얼굴이 어두워졌다. 짧게 망설인 그가 곧 운전석 쪽으로 몸을 구부렸다.
“기사님, 죄송한데…….”
자연스럽게 도어락을 누르려던 손을 멈춘 선우가 방향을 틀어 결국 옆의 벨을 눌렀다. 띵동. 청량한 벨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졌다. 마치 그의 집처럼 드나들던 곳을 낯선 이의 집처럼 대하려니 기분이 이상했다. 오른손에 든 종이봉투를 내려다 본 선우가 벨을 한 번 더 누르려다 멈칫했다.
문 뒤로 둔탁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사고로 다친 다리 때문에 목발을 짚어야 하는 그가 움직이며 나온 소리일 터다. 애초에 그만 있을 거라 생각하고 왔지만 막상 마주할 생각을 하니 조금 긴장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입술을 깨문 선우의 왼손이 움찔거렸다. 그렇지만 마음을 굳게 먹었기에 몸을 돌리지는 않았다. 반은 심술로 나온 행위였다지만 생각보다 문 열어주는 시간이 오래 걸리자 마음이 약해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착실히 가까워지던 발소리가 이내 문 앞에서 멎었다.
문이 열리고 몸을 드러낸 사람은 제가 오래도록 알아온, 그러나 하나도 모르는 사람이다. 한 손으로는 현관문을 열고, 한 손으로는 목발을 짚은 얼굴을 잠시 관찰하던 선우가 제 얼굴로 쏟아지는 시선을 느끼고는 눈을 맞췄다. 작게 흔들리는 눈은 마치 겁을 내는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제야 알 것도 같다. 대현에게 안 어울린다고 느껴지는 표정은 그가 대현이 아니기에 나올 수 있는 표정이라는 걸.
눈을 떼지 않은 채로 선우가 종이봉투를 그들의 눈높이까지 들어올렸다. 왼손으로 종이봉투를 받치고 그 안의 책을 꺼냈다. 그리고는 말을 건넸다.
“나 이거 읽었어.”
지후에게 건네는 첫 마디였다.
“그러니까 바꿔줘. 딴 책으로.”
“…….”
“네가.”
책을 훑고, 다음으로 저를 멍하니 바라보는 창백한 얼굴은 선우로 하여금 인정할 수밖에 없게 한다. 결국 바닥을 내려다보는 뒤통수를 보며 선우는 새삼 깨달았다. 그래. 영민의 말대로 자신들은 대현을 이기지 못한다. 늘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야, 울지 마.”
대현은 한 번도 틀린 결정을 한 적 없으니까. 지금이야 이해가 되지 않아도, 언젠가는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알게 될 것이다. 그걸 알 수 있을 때까지는 그를 믿고 지지하는 것이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마치 대현이 줄곧 저와 영민에게 그래왔던 것처럼.
아니, 어쩌면 벌써 선우는 조금 알아버린 것도 같았다.
‘이상하게… …걘 혼자 두면 안 될 것 같아.’
대현의 말마따나 눈앞의 남자는 혼자 두면 안 될 것 같은 어깨를 하고 있었다. 우는 지후에게 손을 뻗은 선우가 그의 어깨를 다소 어색하게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난 울보랑 친구 안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