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최애와 거리두기-91화 (91/119)

91화

“……안 가도 돼?”

“몰라. 안 가.”

“…….”

“가게 생겼냐, 이 판국에.”

그 말에는 선우도 할 말이 없었다. 때맞춰 다가온 주인이 둘의 앞으로 석쇠와 소주 한 병을 내려놓았다. 두 병을 시켰던 것 같은데. 의아한 둘의 시선을 느꼈는지 엄한 표정을 지어보인 그녀가 명령했다.

“술 적당히 마시고 가서 화해해. 알았어?”

셋이 중학교 때부터 뻔질나게 다닌 이곳은 함께해 온 세월의 무게가 느껴지는 곳이기도 했다. 마치 단골에게 얼른 가라고 하는 그녀의 축객령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쌈 채소 중에 당근을 집어 먹던 영민이 선우를 노려봤다.

“뭐.”

“너랑 오니까 이모가 사이다 서비스도 안 주잖아.”

“……그게 내 탓이냐?”

“네 탓이지, 그럼! 정대랑 오면 맨날 받는데!”

어이가 없어 웃음이 터졌다. 고개를 돌리고 하- 웃음을 뱉어내는 선우를 본 척 만 척 영민이 젓가락을 들어 앞에 놓인 야채곱창을 뒤적거린다. 평소 환장해서 달려들 메뉴를 앞에 두고도 한숨을 푹푹 쉬는 얼굴은 어제 있었던 일을 생각하고 있는 게 뻔해서 선우는 힘이 빠진 상태로도 조금 짜증이 났다. 그럴 거면 먹지 말라고 소리를 치려던 그가 멈칫했다.

“정대 보고 싶어…….”

입을 삐죽거리는 영민의 중얼거림이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찡그리고 있던 미간을 편 선우가 옆에 놓인 소주병을 들었다. 뚜껑을 따 영민 쪽으로 내밀자 불만스러운 표정으로도 잔말 없이 잔을 내민다. 슬쩍 얼굴을 확인한 선우가 이내 시선을 내렸다.

“따라줘?”

“됐어.”

소주를 따르자마자 입으로 가져가 넘기고는 또 잔에 소주를 채웠다.

“너, 차는. 대리 부르게?”

“어.”

깜빡 잊었다는 듯이 말하는 영민에 대답을 한 그가 목에 맨 넥타이를 조금 헐겁게 풀었다. 방학 시작과 동시에 아버지 회사에서 인턴으로 근무하기 시작하며 매일같이 타이를 매게 된 지도 어느덧 두 달이 다 되었다. 평소라면 그러려니 했을 것들이 이렇게 답답하게 느껴지는 건 둘이 이렇게 오만상을 한 채 앉아 있게 한 사람 때문이라고 보는 게 더 정확했다.

이제껏 한 번 속 썩인 적 없던 친구였다. 오히려 그래서 더 마음이 쓰이곤 하는 친구. 영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제게는 다소 예민한 성격을 드러낼 때도 있는 그는 대현을 대할 때만큼은 늘 솜방망이처럼 굴었다. 대현의 할머님이 돌아가시고 나서는 더 그랬다. 장례식장에서 홀로 선 얼굴은 장례식장에 들어선 저와 영민을 보고서야 눈물을 흘렸다. 할머니가 투병 생활을 하실 때도 늘 씩씩했던 그였다. 한 번도 운 적 없던 얼굴이 결국 지쳐 쓰러질 때까지 눈물을 흘려대는 걸 보며 선우는 대현이 그렇게 약해 보일 수도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김선우? 맞지. 내가 걔네 보고 가랬으니까 나와도 돼.’

‘…….’

‘자. 뚝. 그만 울어.’

‘…….’

‘난 울보랑 친구 안 해.’

어릴 적 선우는 덩치가 작았다. 거기다 친구를 사귈 무렵에 아버지의 전근으로 인해 해외로, 국내에서 옮겨 다닌 시간들은 그가 또래 친구들에게 다가가는 걸 어렵게 만들었다. 그 유치원도 대현이 아니었다면 얼마 있지 않아 옮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선우는 제 앞에 선 젖살 가득한 얼굴이 내민 손을 잡았고, 그의 밝은 웃음을 동경했고, 결국 그 사람을 제 첫 친구로 두게 됐다. 그래. 대현은 그의 첫 친구였다. 그리고 마지막 친구였으면 하는 친구이기도 했다. 그만큼 소중했고 아꼈다.

그런 친구가 철저히 무너질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건 그의 하나뿐인 가족이 세상을 떠났을 때였다. 그때의 대현은 마치 모든 감정을 잃어버린 것만 같았다. 분명 웃기도 하고 말도 하는데 왜 그렇게 느껴졌는지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선우는 그냥 알 수 있었다. 대현은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사람처럼 굴고 있었다. 그래서 무서웠다. 그가 하루아침에 사라져 버릴 수도 있을 것 같아서.

그러던 그의 눈빛이 살아났다고 느낀 건 그가 저와 영민에게 플러그의 앨범을 한 장씩 나누어줬을 때였다. 아이돌 그룹이라니. 그것도 남자. 앨범을 받자마자 당황한 표정을 한 영민과 시선을 나누면서도 선우는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네가 살고 싶다고 생각하게 만들 수 있는 거라면 뭐든지 괜찮아. 그렇게 말해주고 싶었지만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그렇게 제 친구가 다시 제가 알던 모습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밥도 잘 먹었고, 예전처럼 잔소리도 잘했고, 입꼬리만 끌어올리는 웃음이 아니라 정말 눈을 휘고 웃었다. 그렇게 극복해 가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모든 게 잘 굴러가고 있다고 믿었던 일상에서 그가 갑자기 꺼낸 이야기들은 제가 놓친 부분이 있나 자문하게 만든다.

“야. 저번 주 금요일 우리 둘째 누나 생일이었대.”

“……진짜?”

“너 몰랐지.”

“어. 죄송해서 어쩌지. 연락 드려야겠다.”

“됐어. 나도 몰랐어.”

“자랑이다.”

비꼬듯 던진 말이었지만 영민은 평소처럼 대찬 반응을 하는 것 대신 한숨을 크게 쉴 뿐이었다. 앞의 소주를 들이켠 그가 입을 쓱 닦고는 말을 꺼냈다.

“우리 둘 다 모른 걸 또 정대현만 알았네.”

“…….”

“문자에다 꽃까지 보냈더라. 개새끼.”

끝에 조그맣게 붙은 욕설은 마치 투정과도 같았다. 어쩌면 영민이 할 말을 알 것도 같아서, 선우는 병을 내려놓고 그의 얼굴을 응시했다.

“너 알았냐.”

“뭘.”

“걔가…… 그러니까…… 좀 다르다는 거.”

선우가 멈칫했다. 어제, 그리고 오늘 그의 머릿속에 맴돌던 것은 몸을 바꾸고 싶어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대현에 대한 궁금증과 회의감이었지, 대현의 몸에 들어간 다른 사람에 대한 게 아니었으므로. 선우의 눈빛에서 대답을 읽어냈는지 영민은 그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말을 잇고 있었다.

“난 자꾸 그 생각이 드는 거야. 솔직히 웃기잖아. 십오 년을 넘게 봤는데 친구가 평소랑 다르게 구는 것도 눈치 못 채는 게.”

“…….”

“물론 우리가 이상한 건 아니지. 누가…… 솔직히 누가 그런 일이 일어나리라고 생각이나 하겠냐. 사실 난 지금도 꿈 같아. 씨발…… 이게 꿈인지 아닌지 아리까리해서 어제 잠도 못 잤다고.”

“…….”

“근데 생각해 보니까 못 알아챌 만했던 것도 같은 게…… 정대현이 그러고 있으면서도 할 일은 다 해서인 것 같아. 걔가 그런 거 잘 챙기잖아. 우리가 잊고 있는 거. 걔가 그런 걸 까먹거나 그랬으면 걔답지 않은 일이라 생각해서 의심해 봤을 법도 한데.”

“…….”

“누나 생일도 그렇고…… 나 저번에 어떤 선배가 물어본 것 때문에 걔한테 물어본 거 있는데. 그것도 선배가 고맙다고 문자 왔었거든. 네 친구가 메일로 정리해서 보내준 거 도움 많이 됐다고.”

“…….”

“보나마나 통장에 돈도 꼬박꼬박 넣었을걸. 맞지?”

확신이 담긴 말투로 건너온 말에 선우는 입술을 깨물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 그랬다. 셋은 스무 살이 된 순간부터 세계여행을 목표로 한 적금을 넣고 있는 중이었다. 졸업선물로 셋에게 세계여행을 보내주겠다는 통 큰 제안을 한 선우의 아버지를 설득한 대현이 내놓은 나름의 절충안이었다. 관리는 선우가 하기로 했다. 그리고 방금 영민이 한 말처럼 대현은 매달 넣는 일정한 금액을 한 번도 까먹은 적이 없었다. 저번 달에도, 이번 달에도 그랬다.

“거기다 그 사람…… 이름이 뭐랬지.”

“……이지후.”

“아, 그래. 이지후. 그 사람도…….”

“그 사람이 뭐.”

“좀 무뚝뚝하긴 했지만…… 그래도 의심할 정도는 아니었다고. 그래서 난 정대가 걔네 그 뭐냐, 플러그 걔네 해체해서 뒤늦은 사춘기가 온 건가 싶었지.”

“…….”

“심지어 전화는 정대보다 더 잘 받아줬어. 나 실기실에서 찌들어서 전화 진짜 많이 했었는데.”

“……그래서.”

“그래서는 뭐 그래서야. 그냥 그렇다고…….”

몇 번째인지 모를 침묵. 선우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를 기분에 휩싸였다. 대현만으로도 골치 아팠는데 진짜 얼굴조차 모르는 사람이 끼어들기까지 하자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선우의 눈치를 보던 영민이 자신의 머리를 뒤죽박죽으로 헤집는 게 보였다.

“아, 몰라. 생각 안 할래. 대가리만 아프고. 어제 자려고 누웠는데 자꾸 정대 우는 얼굴만 생각나서 죽는 줄 알았어. 아. 나 오늘은 개겼다 쳐도 내일은 진짜 가야 되는데.”

“안영민.”

“왜. 뭐.”

“대현이…… 운 거 얼마만이지.”

“……모르겠는데. 그건 왜?”

“……그냥. 오랜만에 본 것 같아서.”

선우가 기억하는 대현이 마지막으로 운 건 할머니의 장례식장이었다. 의중을 알 수 없는 그의 말에 영민이 갸웃했지만 선우는 굳이 더 설명하지 않고 앞의 소주를 들이켰다. 소주가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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