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지후가 거실로 나온 건 그 후로 한참이 지나서였다. 영민과 선우가 돌아가고, 한참을 가만히 앉아 있던 대현이 부엌을 치우는 소리를 듣고, 유일하게 집 안에서 빛을 내던 부엌의 등이 꺼지고 나서도 시계 바늘이 몇 바퀴를 더 돌아가고 난 시간이 돼서야 그가 움직였다.
최대한 소리를 죽이고 싶었지만 이런 짐 덩이를 들고 가능할 리 없었다. 그래도 대현은 깨지 않은 것 같으니 다행이었다. 소파 위 누운 인영은 눈 위로 손등을 대고 누운 자세 그대로였다. 소파에서 두 걸음을 남기고 걸음을 멈춘 지후가 목발을 내려놓았다. 다소 불편한 자세로 몸을 구부려 앉은 그가 옆구리에 끼고 있던 이불을 바닥에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러그 위에서 엉덩이를 몇 번 끌자 이불을 덮어줄 수 있을 만큼 거리가 가까워졌다. 지후가 이불을 들어 대현의 몸 위에 조심스럽게 올려놓았다. 뭉친 부분을 풀어 몸 위에 조심스레 덮어준 그가 목발을 찾아 다시 몸을 돌렸다.
“이지후.”
몸을 돌리다 말고 멈칫한 지후가 대현을 돌아봤다. 대현은 여전히 손등으로 눈을 가린 상태였다. 분명 아까 나와서 확인했을 때까지만 해도 일정한 속도로 위아래로 움직이던 가슴은 아까보다 빠르게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다. 나름 조심한다고 한 건데도 이불을 덮는 과정에서 깨우고 만 모양이다. 자책한 지후가 잠시 망설이다 대답했다.
“응.”
부른 대현은 말이 없었다. 하지만 지후는 재촉하지 않고 가만히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가파르게 움직이던 대현의 가슴이 다시 아까처럼 고르게 움직일 때까지. 그의 눈 밑으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모른 척하면서.
“미안해.”
아까보다는 한층 진정한 목소리가 대현에게서 흘러나왔다. 그가 방금 우는 걸 볼 때도 잘 참아놓고, 왜 또 눈물이 날 것 같은지 모를 일이었다. 눈물을 참기 위해 부러 고개를 돌리던 그가 멈칫했다. 소파 앞 탁자에 올려져 있는 하얀 쪽지는 제가 어제 대현에게 준 것이었다. 제가 건넬 때만 해도 가로로 한 번만 접혀 있던 쪽지는 어느새 꾸깃꾸깃해져 있었다. 마치 대현이 그 쪽지를 보며 했던 엉킨 생각들을 보여주는 것처럼.
하얀 쪽지. 그리고 그 위에 쓰인 글자들은 거실에 가득한 어둠 탓에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지후는 손을 뻗어 쪽지를 쥐는 자신을 막지 못했다. 쪽지를 내려다보던 그가 숨을 골랐다.
“정대현.”
대현에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지만 지후는 그가 듣고 있으리란 걸 알았다. 불규칙한 숨소리를 배경 삼아 지후가 말을 시작했다. 그의 가슴 속에 있던 말들이자 누구에게도 꺼내놓을 생각이 없던 이야기였다. 특히나 눈앞의 대현에게는 절대 꺼내놓으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이야기기도 했다.
“난 소중한 사람이 없었어.”
“…….”
“생길 거라고도 생각 못 했어. 왜냐면 사람들은 내게 늘…… 스쳐 지나가는 존재였거든. 잡을 수도 없고. 잡히지도 않는 그런 존재들.”
“…….”
“네 덕분에 알았어. 그런 존재가 생기는 기분이 뭔지.”
“…….”
“그래서 알아. 네가 아까 말했던 게 뭔지. 나도 처음엔…… 이런 존재가 생길 거라고는 생각 못했으니까.”
대현이 움찔하는 게 느껴졌다. 아까 부엌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제가 들었으리라고 생각하지 못했었기에 나온 반응이겠지. 지후가 대현에게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닿기 전 잠깐 허공에서 멈칫하던 손은 이내 대현의 가슴 위로 내려앉아 일정한 속도로 그의 가슴 위를 두드렸다. 이 작은 행위가 대현에게 조금의 위로로라도 다가갈 수 있길 바랐다. 의도가 전해진 건지는 모르겠지만 대현이 눈을 가린 손을 내리는 게 보였다. 부러 시선을 떨어뜨린 지후가 손 안에 쥔 종이를 내려다봤다. 그래야만 말을 이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처음에는 싫었어, 네 친구들. 싫다는 거 티내는 데도 달라붙고. 자꾸 말 걸고.”
“…….”
“어색했거든. 여태껏 그런 식으로 다가온 사람들이 없었어서. 평생 익숙해지지 못할 것 같더라고. 근데…… 익숙해지더라. 어느새 내가 걔들 농담에 웃고…… 걔네랑 장난을 치고…… 그러고 있더라.”
“…….”
“누구한테 혼났다 하면 속상하고. 걔네 일이 내 일 같이 느껴지고.”
대현의 가슴 위를 두드리던 손은 이제 움직임을 멈춘 상태였다. 하지만 가만히 듣고 있는 대현도, 말을 이어나가는 지후도 그 사실은 알지 못하는 사람들처럼 굴었다. 둘이 나누고 있는 숨소리만으로도 거실이 꽉 찬 것 같았다.
“너도 그랬겠지.”
“…….”
“서툴러서 그렇지, 나쁜 애들 아니니까. 나도 아는 걸 네가 눈치채지 못했을 리 없잖아. 근데…… 안다고 해서 다 해결되는 건 아니더라. 그래서인지 지난 삼 년 동안…… 아무것도 못 했어 나. 하고 싶었는데. 하자고 마음먹은 적도 있었는데. 하지는 못했어.”
“…….”
“아까 방에서 영상 봤어. 삼 년은 넘게 본 애들인데…… 걔네들이 그런 표정도 지을 수 있는지 모르고 있었어, 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거…… 네가 한 거야. 난 못 할 거야. 다시 돌아간대도.”
“……흐으…….”
대현의 입에서 결국 울음소리가 튀어나왔다. 이번에는 지후도 그를 달래줄 수 없었다. 그도 울고 있었으니까. 그렇지만 멈출 수 없었다. 그래서 메인 목소리로도 지후는 말을 이어야 했다.
“정대현. 모르겠지만…… 넌 나한테…….”
“…….”
“나한테…… 처음 가져 본 가족 같은 존재야…… 그냥…… 어느 순간 그렇게 되어버렸어.”
“…….”
“그러니까 난 네가 행복하면…… 상관없어. 이대로도 괜찮아.”
더 이상은 무리였다. 목으로 차오른 감정들을 차마 더 뱉어내지 못한 지후가 손으로 눈을 가렸다. 그 순간 대현이 그를 잡아당겼다. 소파에서 내려온 그가 지후의 목을 당겨 안았다. 어깨에 얼굴을 묻은 그 덕에 어깨가 금세 축축해졌다. 숨도 못 쉬고 우는 그의 품에서 팔을 뺀 지후가 그의 목 뒤로 손을 가져갔다.
“괜찮아.”
힘을 뺀 손으로 대현의 목 뒤를 두어 번 쓸어준 지후가 중얼거렸다. 마치 언젠가 대현이 그렇게 해주었던 것처럼. 그때 자신이 느낀 것과 같은 안도감을 대현이 느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그렇게 한참 동안.
* * *
단골손님들을 맞은 아주머니는 익숙하게 그들을 구석의 자리로 안내했다. 이모, 저희 야채 2인분 주세요. 오리지널도 한 병. 아니다. 두 병 주세요. 굳은 얼굴을 풀며 평소처럼 곰살맞게 굴던 영민이 이내 돌아온 그녀의 물음에 멈칫했다. 대현이는? 약속이라도 하듯 입을 다문 둘을 쳐다보던 그녀는 이내 다 큰 놈들이 싸우며 못 쓴다며 잔소리를 했지만, 선우와 영민은 아니라는 말도 꺼내놓지 못했다.
엄밀히 따지면 싸운 건 아니지만. 어제 대현의 집에서 있었던 논쟁을 생각하면 아니라고 하기도 애매했다.
“…….”
“…….”
어색한 침묵이 허름한 탁자 위로 흘렀다.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어도, 둘 다 대현을 생각하고 있으리란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한숨을 쉰 선우가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이 모든 상황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짜증이 났다.
대현의 사고 소식을 듣고 병원에 달려갈 때만 해도 이런 일이 생길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몸이 바뀌어? 그것도 두 달이 넘었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뱉어내는 낯선 남자는 이상하게도 무시할 수가 없었다. 말을 하는 방식부터 시작해서, 셋만 알고 있는 이야기를 꺼내며 증명하는 남자는 대현일 수밖에 없었다.
앞에 있는 영민의 표정도 착잡해 보였다. 항상 속없는 것처럼 구는 놈이지만, 셋에 관해서는 예민할 정도로 세심하게 구는 그였기에 이해가 갔다. 그를 증명하듯 ‘폼에 살고 폼에 죽는다’를 좌우명을 갖고 사는 그는 현재 유명 스포츠 브랜드의 츄리닝 안에 목이 다 늘어난 목티만을 입은 채 건너편에 앉아 있었다. 잠을 하나도 못 잔 얼굴로 목을 스트레칭하는 얼굴은 탁자 위로 울리는 진동을 가뿐히 무시하고 있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