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어떻게 알고 왔어.”
“그게 지금 중요해?”
“……보는 것만 이렇지 괜찮아. 물론…… 너한테는 미안한 일이지만.”
“……네가 나한테 미안할 게 뭐 있어.”
“네 몸이잖아. 한우람한테 맞고 왔을 때는 뭐라 해놓고 똑 같은 일 한 거니까. 심지어 더 심한 거 같기도 하고…….”
머쓱하게 말을 마친 지후가 대현의 눈치를 봤다. 금방이라도 뭐라고 잔소리를 할 줄 알았던 대현은 의외로 말이 없었다. 몸을 돌려 탁자에 놓인 종이 상자를 여는 얼굴은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무언가를 참고 있는 것처럼. 화가 많이 났나 보다. 그럴 만도 했다. 어색하게 시선을 떨어뜨린 지후가 침대 시트를 괜히 툭툭 건드렸다.
“이지후.”
화나서인지는 몰라도 대답도 해주지 않던 대현의 부름에 반사적으로 고개가 들렸다. 그러나 대현은 여전히 지후를 쳐다보고 있지 않았다.
“나한테 미안하다는 소리 하지 마.”
“…….”
“네가 그럴 때마다…… 나야말로 죽을 것 같으니까.”
“무슨 소리를…….”
“하지 말아줘. 제발. 부탁할게.”
인상을 찡그린 지후가 부정의 말을 뱉기도 전에 혼자 말을 끝내고 대화의 종지부까지 찍은 대현은 묵묵히 종이상자에서 꺼낸 물건을 정리하고 있었다. 수건 몇 장과 칫솔, 치약이 그의 손에 들려 나왔다. 대화할 구멍을 차단하기라도 한 듯 뒤도 돌아보지 않던 대현이 다시 목소리를 내놓은 건 한참이 지난 후였다.
“너 깨면 퇴원해도 된다고 했는데. 늦었으니까 오늘은 그냥 자고 가는 게 나을 것 같아서 세면도구 좀 사왔어.”
“정대현.”
“씻을래? 도와줄게.”
“야. 너 말 돌리지 마.”
“…….”
“너 무슨 일 있지. 왜 그래. 애들이…… 사고쳤어? 그래서 그래?”
오랜 시간 동안 그를 본 건 아니지만, 정대현이 이런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안다. 정대현은 말을 피하는 스타일도, 상대의 말을 무시하고 제 할 말만 하는 스타일도 아니었다. 늘 그의 안에서 숨을 죽이고 있는 불안감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불안감을 잠재울 수 있는 건 그의 입으로 아무 일도 없다는 소리를 듣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직도 돌아서 있는 등은 그러한 대답을 들려줄 것 같지 않았다. 지후의 눈이 흔들렸다.
갑작스러운 사고에 까마득히 잊고 있던 것이 떠오른 것도 그쯤이었다. 지후가 고개를 돌려 방금 머릿속에 떠올랐던 것을 찾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쪽지를 본 건 오토바이에 몸을 부딪치기 전이었다. 마지막까지 꼭 쥐고 있었던 종이의 촉감을 떠올린 지후가 급히 병원복 주머니를 뒤졌지만 그가 찾는 건 없었다.
허탈한 표정을 하던 그의 눈에 침대 옆 탁자에 놓인 하얀 쪽지가 들어왔다. 잃어버린 게 아니었다. 누군가 그가 손에 쥐고 있는 것을 보고 빼놓은 것 같았다. 누가 봤든 어차피 쪽지에 적힌 숫자만 보고 뭔지 알아보지는 못했을 테니 상관없었다. 손을 뻗어 종이를 잡아챈 지후의 표정이 잠깐이지만 밝아졌다.
여전히 뒤돌아 있는 등을 본 지후가 작게 헛기침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주리라고는 예상 못 했었지만, 지금 보니 최고의 타이밍인 것 같기도 했다. 특히나 대현이 저렇게 우울해 보이는 상황에서는. 그가 그렇다고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분명 플러그 관련 일로 마음을 썩이고 있는 게 분명했다. 이 쪽지를 전해주면, 그래서 둘이 다시 몸이 바뀌면, 더는 그런 문제로 고민할 일이 없을 것이다.
대현의 생일을 알게 된 순간부터 선물을 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대현이 좋아할 만한 걸 찾아 방을 샅샅이 훑기도 하고, 나름 치열하게 고민해 보기도 했지만, 결국 마지막에 떠오른 건 어떻게 이걸 잊고 있었나 싶을 정도로 싱거우면서도 가장 중요한 거였다. 대현은 제게 무언가를 바라거나 요구한 적이 없었다. 항상 저를 배려했던 그가 단 한 가지 요구했던 것이 있다면, 소원나무에 대해 알아봐 줄 수 있냐는 것이었다.
여행에서 돌아온 날, 고개 숙인 그가 묻던 걸 떠올리자 다른 선물은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 같았다. 그 길로 지후는 별 성과 없이 돌아와야 했던 재단에 다시 방문했다. 얼마 전 상대했던 직원의 조금 곤란해 보이는 얼굴을 보면서도 지후는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한 번도 해본 적 없던 일이라 어색하고 당황스러웠지만, 대현을 위한 일이라 생각하고 견뎌냈다.
척인지 진짜인지 모르겠지만, 어딘가 전화를 돌리는 것 같던 직원은 다소 뜬금없는, 그러나 지후가 기대했던 것보다 더 좋은 소식을 가져왔다. 이전 방문 때 목적을 묻는 직원에 말에 지후는 그 나무를 꼭 다시 봐야 할 일이 있다고 말했다. 이해하지 못하는 그녀를 두고 더 좋은 설명을 생각해 보려 했지만 그 말 말고는 딱히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민원실 의자에 앉은 지후에게 밝은 얼굴로 다가온 직원이 내민 쪽지에는 처음 보는 주소가 적혀 있었다.
-충청북도 xx군 oo리 032-1
그녀는 설명을 덧붙였다. 대현의 동네에 있던 소원나무는 사실 그 전 다른 곳에서 옮겨온 거라고 했다. 지금 적힌 주소가 바로 원래 그 나무가 있던 곳이라는 거라고. 거기까지 들었음에도 왜 이 주소를 주는지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한쪽 눈썹을 찡그린 지후가 쪽지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걸 본 직원이 비밀을 말하듯 속삭였다.
‘저도 방금 전화해서 안 거긴 한데…… 거기에 쌍둥이 나무가 있대요.’
‘……네?’
‘소원나무가 두 그루였다는 얘기예요. 한 그루는 이곳으로 옮겨와서 아프리카로 기부됐지만, 나머지 한 그루는 그 곳에 그대로 남아 있는 거죠.’
‘…….’
‘자꾸 찾아오시는 거 보니까 급하신 것 같은데, ‘소원나무’라는 것 때문에 그러시는 거면 한 번 찾아가보시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요. 아프리카 쪽에 넘어간 나무는 저희가 알아보긴 하고 있지만, 솔직히 연락이 힘들어요. 저희 말고 다른 단체들도 다 함께 협력한 일이라서 소재도 명확치 않구요.’
설명을 이어나가는 그녀의 말에서 쌍둥이라는 말이 유독 귀에 박혔다. 그 순간 이상하게도 확신이 들었다. 쪽지에 적힌 주소로 간다면 바뀐 몸에 대해 뭔가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더 나아간다면, 대현이 바라던 것처럼 다시 몸을 바꿀 수 있을지도 몰랐다. 대현이 바라니 이제 지후가 바라는 것이기도 했다.
아프리카 쪽은 솔직히 주소를 안다고 해도 대현이 지후의 몸에 들어가 있는 이상 당장 가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국내라면 이야기는 다르다. 당장 내일이라도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감사한 마음을 담아 꾸벅 인사를 한 지후는 그제야 하루 종일 몸을 뭉개고 있던 재단 건물에서 빠져 나왔다. 얼른 대현에게 이 좋은 소식을 전하고 싶었다.
그 마음이 너무 지나쳤던 모양인지 긴장을 놓고 걷다 이렇게 사고가 나고 말았지만.
한숨을 쉬며 깁스한 다리를 훑던 지후가 고개를 돌렸다. 일부러 크게 한 헛기침 덕분인지 영원히 돌려지지 않을 것 같던 대현의 몸이 지후를 향해 천천히 뒤돌고 있었다. 그제야 마주해 오는 눈은 어딘가 슬퍼 보였다. 자신도 모르게 쌍욕을 내뱉을 뻔한 지후가 꾹 참고는 말을 삼켰다.
괜찮다. 어차피 좀 있으면 다시 몸이 바뀔 테니까. 그럼 정대현이 저런 눈을 할 일도 더는 없어질 것이다. 정대현은 다시 원래 그가 그랬던 것처럼 빛이 가득한 세상에서 빛을 내며 살아가면 된다. 그래. 그럼 다 해결될 것이다. 결심을 마친 지후가 대현에게 오른손을 내밀었다. 대현의 시선이 지후의 손을 따라 움직였다. 오른손을 뒤집은 지후가 말고 있던 손가락을 하나씩 폈다. 하얀 쪽지가 빼꼼 몸을 드러냈다.
“그……나무 재단에 다녀왔거든 오늘.”
“…….”
“직원분이 새로운 정보를 알려주셨는데 잘하면 우리…… 몸 다시 바뀔 수도 있을 것 같아. 그 소원나무가 원래는 쌍둥이 나무였대. 한 그루만 우리 동네로 가져왔던 거라고 하더라고. 그러니까 나머지 한 그루는 여전히 한국에 있다는 거야.”
“…….”
“잘하면 그곳에 있는 나무도 우리 몸을 다시 바뀌게 할 수 있을지도 몰라. 확신은 못하지만 그래도 아프리카 가는 것보다는 해볼 만한 일이니까. 난 언제라도 괜찮으니까 너만 괜찮으면 당장 내일이라도 갈 수 있어.”
기뻐할 거라 생각했던 대현은 반응이 없었다. 지후가 들고 있는 쪽지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지후가 말을 멈추고 그의 얼굴을 불안하게 응시할 때가 돼서야 나온 목소리는 잔뜩 갈라져 있었다. 지후는 쪽지를 든 손을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너 여기 다녀오다가 이렇게 된 거야?”
“어?”
“이거 알아내려고 갔다가 이렇게 된 거냐고.”
“……꼭 그랬다기보다는…….”
대현의 눈이 울렁이고 있었다. 지후가 어색하게 눈을 깜빡였다. 대현이 우는 걸 보는 건 처음이었다. 물론 들은 적은 있다. 해체한다는 걸 알았을 때 대현은 전화로 한참을 울었다. 그 직후 찾아간 숙소 앞 카페에서 운 흔적이 역력한 얼굴을 보기까지 했다. 그렇지만 그때는 이런 느낌이 들지는 않았었다.
그러니까……이상할 정도로 마음이 아팠다. 대현이 우는 걸 더는 지켜볼 수가 없을 정도로. 울 것 같은 눈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 어딘가를 쿡쿡 찔리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인지 툭 건드리면 울 것 같은 얼굴을 보던 지후는 결국 변명이라도 하듯 말을 늘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울 필요가 없는 일이라고, 제 잘못일 뿐이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내가 알아봤어야 했던 거잖아 원래. 사실 너 생일…… 선물 해주고 싶었는데 딱히 떠오르는 게 없어서.”
“…….”
“말하다 보니까 선물이라도 하기 좀 그렇긴 한데…….”
그러나 지후의 노력은 소용없었다.
“나 진짜…….”
“정대현.”
“진짜 쓰레기 같다.”
이미 대현은 울고 있었으니까. 고개를 숙인 그 덕에 바닥에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본 지후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제야 지후는 알았다. 어쩌면 제가 가장 두려워했던 건 어쩌면 눈앞에 선 대현의 우는 얼굴이었을지도 모른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