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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애와 거리두기-86화 (86/119)

86화

오랜만에 밖에 나선 날이었다. 그것도 온전한 제 의지로 말이다. 그의 한 손에는 종이봉투를, 다른 한 손에는 재단에서 받은 쪽지가 들려 있었다. 답지 않게 마음이 가벼웠다. 마치 한참 전부터 이랬어야 했던 것처럼. 좋아할 얼굴들을 생각하니 기분이 좋은 것도 사실이었다. 웃지 않으려 했지만 입가를 허물고 결국 작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래서였을까. 항상 주위의 환경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그답지 않게 긴장을 놓아버린 건.

“어어! 비켜요!”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을 때는 이미 몸이 붕 떴을 때였다.

“꺄악!”

어디선가 비명 소리가 들렸다. 지후의 입에서 나온 소리는 아니었다. 지후의 시선이 옆에 선 여자에게 닿았다. 멈춰 서서 지후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에는 공포가 어려 있었다. 지후가 멍하니 눈을 깜빡거렸다. 이 모든 순간들이 마치 슬로우 뮤비처럼 진행되고 있는 것 같았다. 영화나 드라마 같은 데서 장면의 긴장감을 살리기 위해 일부러 늘려 편집한 장면처럼. 어디선가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 여태까지 살았던 날들이 빠르게 앞을 스쳐 지나간다고.

사실이었다. 잡을 수도 없는 빠른 속도로 기억들이 그의 앞을 스쳤다. 어린 시절의 기억부터 비교적 최근의 일까지 재생되는 장면들은 대부분 그 혼자 있는 풍경을 담아냈으며, 아주 가끔 다른 사람들이 등장했다. 끝과 가까워진다고 느낀 건 멤버들의 모습이 등장했을 때였다. 등을 돌리는 그들을 눈에 채 담기도 전에 화면은 넘어갔다. 영민, 그리고 선우의 모습.

지후의 입에서 짧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마지막으로 나타나 장면을 차지한 사람은 지후를 향해 말했다.

‘너 좋아하는 사람 많아. 나도 그중 하나고.’

하나부터 끝까지 지후와 다른 사람이었다. 그래서 신기했다. 부럽기도 했다. 넌 어떻게 그렇게 항상 빛이 날까. 마치 세상의 빛이 모두 네게 모여든 것 같다. 이전에도 빛을 내는 사람들은 많이 봤다. 타인을 밟거나 혹은 타인의 지지에 힘입어 그런 사람들이 태반이었다.

근데 넌 아니었다. 네 빛은 사람들을 밟지도, 혹은 누군가에 기인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넌 그 자체로 빛이었다. 네 옆에 있는 사람들도 그랬다. 너처럼 빛이 나는 사람들이었다. 우연한 기회였지만 덕분에 그 빛을 쬈다.

차가운지도 몰랐던 몸이 녹고 나서야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내가 네게 올 빛을 너무 과식한 건 아닐까. 네가 내 몸에 들어간다 해서 빛을 잃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건 원래 모두 너의 것이었으니까. 상냥한 네가 나눠준 것들은 날 살렸지만 그렇다 해서 네가 계속 나눠줄 필요는 없는 거라고. 의지와 다르게 감기는 눈이 느껴졌다. 의식을 잃기 전 지후는 왼손 안의 작은 종이를 다시 한 번 한 번 꼭 쥐었다.

대현아. 난 왜 제대로 하는 게 없을까. 한 번쯤은…… 이번 한 번만은 네게 도움이 되어보고 싶었는데.

* * *

언제 영화관에서 빠져 나왔는지, 어떻게 식의 차에 탔고, 어떤 정신으로 병원까지 왔는지, 어떤 표정으로 병원 로비에 들어섰는지, 데스크에 뭐라고 말했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마치 몸을 둘러싼 모든 감각이 까맣게 죽어버린 것 같았다. 감각이 돌아온 건 하얀 침대 위에 누운 지후의 얼굴을 확인하고 나서였다.

“이지후!”

하얀 얼굴이 숨을 쉬고 있다는 걸 확인하자 잊고 있었던 모든 감각들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대현은 그제야 병실 안을 울린 게 제 고함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게 감각이 돌아오고서야 알 수 있던 것이 하나 더 있었다. 병실에는 지후 혼자만 있던 게 아니었다. 대현의 시선이 침대 옆 의자에 앉은 이에게로 돌아갔다. 단정한 얼굴, 그러나 흔들리는 시선을 제 얼굴에 둔 사람이 익숙했다.

“……김 ……선우.”

지나가듯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

“…….”

다시 몸이 바뀌고, 둘에게 이 이야기를 할 날이 오지 않을까라고. 술을 잔뜩 먹고 취해서 꿈 얘기를 하는 것처럼. 생생했던 꿈 이야기를 털어놓는 것처럼 이야기하면 영민과 선우는 어떻게 반응할까. 아마 영민은 재미없다며 안주를 던져 대고, 선우는 웃으며 못 말리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겠지.

유난히 잠이 안 오는 날 밤에는 그런 생각들을 하곤 했다. 그들에 대한 그리움들을 그런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며 달래곤 했다. 그 정도로 달래질 그리움이라 다행이었다. 그들을 그 정도로만 그리워할 수 있었던 건, 이 모든 게 언젠가는 끝이 날 것에 대해 의심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죄송한데…… 누구시죠?”

“…….”

“제 이름은 어떻게 아시는 거고, 또 방금…… 제 친구를 뭐라고 부르신 겁니까.”

하지만 그 모든 상상들은 이들이 제가 몸이 바뀐 모습을 모를 때에나 적용되는 거였다.

“이지후라고…… 하셨던 것 같은데.”

그렇기에 대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서 있어야 했다. 자신을 처음 보는 사람처럼 경계하고 선 선우의 앞에 서서. 마치 벌이라도 받는 것처럼.

“김선우! 씨발. 너 왜 전화를 안 받아! 대현이는? 어? 생명에는 지장 없단 거 확실해?”

문이 세게 부딪치는 소리에 고개를 돌린 곳에는 영민이 있었다. 머리에 쓴 비니가 엉망으로 내려와 있는, 누가 봐도 급히 달려온 게 분명해 보이는 슬리퍼 차림의 그를 보던 대현이 한 걸음 물러섰다. 선우에게 소리를 질러대던 그가 병실 내 이상한 분위기를 느끼고 멈칫하는 게 보였다. 그가 쓴 알 큰 안경이 코끝으로 내려왔다. 선우에게 설명을 바라는 눈빛을 보내던 그도 결국 고개를 돌려 대현을 응시했다.

저 둘의 표정만 봐도 기분이 어떤지를 눈치챌 수 있을 만큼 오래된 사이지만, 눈앞의 둘은 대현을 처음 본 이방인을 대하듯 쳐다보고 있었다.

“야…… 뭔데. 너 아는 사람이야?”

선우에게 어색한 표정으로 묻는 영민을 본 대현은 이 모든 게 더 이상은 숨길 수 없는 일임을 직감했다. 그러기에는 너무 많이 왔고, 무엇보다 지후가 다쳤다. 간신히 되찾은 이성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하지만 그러기 전에 알아둬야 할 게 있었다. 잠시 생각하던 대현이 앞의 선우를 차분하게 응시했다.

“다 설명할게. 근데…… 그 전에 하나만 알려줘.”

대현이 손을 뻗어 지후를 가리켰다.

“괜찮은 거지? 오토바이에 치였다는 것만 듣고 달려온 거라 어디를 다친 건지, 지금은 괜찮은 건지 아는 게 없어. 알려줘.”

일단 지후의 상태부터 알아야 했다. 얼굴의 잔 상처를 제외하고는 겉으로 보기에 크게 다친 건 붕대가 감긴 다리 외에는 없어 보였다. 그렇지만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 상태가 어떤지 알아둬야 했다. 넘어졌을 때 머리를 부딪치거나 했다면 비록 육안으로 확인하기는 어려워도 심각한 상태인 걸 수도 있었으니까.

대현의 손을 따라 시선을 옮기는 선우의 표정은 읽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대현은 무의식적으로 그가 말해주리라고 믿고 있었다. 확신에 가까운 믿음이었다. 제가 알던 선우라면 그럴 것이었다.

“근데 누구신데 아까부터 자꾸 반말하세요? 저희 아세요? 아니, 정대현은 아세요?”

“……안영민.”

“아니, 이상하잖아. 딱 보니까 너 아는 사람도 아닌 것 같은데.”

영민이 인상을 구기는 게 보였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그는 아직도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말을 이어가는 중간 중간 고개를 돌려 침대 위의 지후를 확인하는 얼굴은 초조하고 불안해 보였다. 그럴 만도 했다. 사고 소식만 듣고 온 병원에서, 갑자기 이상한 사람이 나타나 그들의 앞을 막고 있었으니까. 경계하는 게 역력한 눈으로 대현에게 다가가려는 영민을 저지한 선우는 여전히 대현과 눈을 맞추고 있었다.

“……다리에 금 간 거 외에는 얼굴의 잔 상처 말고는 없어요.”

“김선우, 너 지금 저 사람 뭘 믿고…….”

“혹시 몰라서 내상 관련 검사도 했는데 이상 없다고 나왔고.”

그제야 안도의 한숨이 튀어나왔다. 긴장해 있던 어깨가 풀렸다. 응급대원과 통화했을 때만 해도 응급실에 가야 할 줄 알았다. 병원 입구 데스크에서 지후가 병실로 옮겨졌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그게 좋은 신호인 건지 아니면 나쁜 신호인 건지 알 수가 없어서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긴장이 풀린 탓인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대현이 고개를 돌려 눈을 감은 지후의 얼굴을 응시했다. 볼에 난 상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가 무의식중에 걸음을 옮길 뻔했지만 곧 가로막혔다. 어느새 그의 앞을 막고 선 선우의 얼굴이 무섭게 굳어 있었다.

“이제 말해.”

“…….”

“너…… 누구야 대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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