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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애와 거리두기-85화 (85/119)

85화

식의 반응은 좀 달랐다. 한참을 곰인형을 바라보던 그는 베란다로 나가 곰인형 이곳저곳을 들춰보더니, 이내 고개를 돌려 대현에게 인형을 좋아하냐고 물었다. 어깨를 으쓱하던 대현을 본 그의 눈이 다시 곰인형을 향했다. 어딘가 집요한 눈길이었다.

‘갖고 싶어?’

‘네?’

‘인형. 계속 쳐다보길래.’

‘……무식하게 크기만 해서 봤어요.’

‘하하. 크긴 하지? 그래도 다행이다. 선물 받은 거라 마음에 들어도 줄 수는 없거든.’

‘……형은요?’

‘어?’

‘좋아해요, 이거?’

‘글쎄. 크기가 좀 크긴 하지만…… 마음이 고맙잖아 그래도. 왜?’

‘아니에요.’

어딘가 핀트가 엇나간 것처럼 느껴졌던 대화를 떠올린 대현이 뒷목을 긁었다. 그의 시선이 눈싸움이라도 할 기세로 인형 뽑기 가게를 뚫어져라 보고 있는 식의 얼굴을 훑었다.

그래도 아까 인형 살피는 거 보니까 싫어하는 것 같진 않던데, 작은 인형이라도 뽑아줄까? 생각은 엉뚱한 데로 튀었다. 대현의 머릿속에는 어느새 식의 손에 작은 인형이 들려 있는 풍경이 상상되고 있었다. 뭐 어차피 시간도 남고. 시간 때우기에 게임만 한 게 없기도 하다. 현금만 써야 되는 기계니 이건 먼저 돈을 넣어도 뭐라 못 하겠지. 설마 이것까지 자기가 내겠다고 우기겠어. 생각을 끝낸 대현이 식의 팔을 끌었다.

“가자. 내가 뽑아줄게.”

“……형이요?”

“응. 나 저거 잘하거든.”

자랑하는 것 같아서 민망하긴 했지만 사실이었다. 어렸을 적, 한창 오락실에 빠져 있던 영민에게 끌려 몇 번 따라간 대현이 관심을 가진 건 피 튀기는 게임이 아닌 오락실 구석 찌그러져 있는 인형 뽑기 기계였다. ‘한 판만 더’를 외치는 영민을 기다리며 시작했던 그만의 작은 취미는 이내 종류별로 인형을 다 뽑아댄 후 더 이상 인형을 나눠줄 곳이 없게 되자 자연스레 끝이 났다. 어렸을 때의 기억을 떠올린 덕분인지 자연스러운 미소가 입가에 떠올랐다. 이번에는 식이 내겠다고 우길 시간도 없게끔 빠르게 지갑에서 현금을 빼낸 그가 식을 앞서 걸어갔다.

인형 뽑기 가게는 다소 좁은 편이었다. 두세 개 정도의 기계들을 둘러보던 대현이 이내 가장 구석에 위치한 기계 앞에 자리 잡았다. 지폐를 넣고 조이스틱을 잡는 얼굴이 어느덧 진지해져 있었다. 마치 옆에 어색하게 선 식은 잊어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처음에야 오랜만이라 삐끗했다지만, 금방 감을 익혀 임한 그의 손짓에 2000원만에 그럴싸한 인형 하나가 잡혀 나왔다. 만족스러운 얼굴로 인형을 잡은 대현이 몸을 돌렸다. 줄곧 옆에서 대현을 관찰하고 있었던 식이 인형에 시선을 두고 눈을 깜빡였다.

“여기. 받아.”

“……저요?”

“여기 너 말고 누구 있냐, 그럼.”

대현을 한 번, 인형을 한 번 쳐다보는 그는 여전히 받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지켜보던 대현이 결국 그의 오른손을 가로챘다. 그러고는 그 손에 인형을 억지로 안겼다. 얼떨결에 인형을 건네받은 식이 그를 멍청한 표정으로 응시했다.

“버리면 안 돼. 알았지?”

“…….”

“그나저나 오랜만이다. 옛날엔 인형 엄청 많이 뽑았었는데. 친구들도 나눠주고.”

“옛날이요?”

“응. 어렸을 때 많이 했거든. 그땐 지금보다 더 잘했어.”

뿌듯한 얼굴로 씩 웃어 보이던 대현이 손목의 시계를 확인했다. 뽑기에 너무 몰두했던 탓인지 어느새 시간은 영화 시작 시간을 십분 정도 남기고 있었다.

“십분 남았네. 나 화장실 좀 갔다가 갈게. 손 찝찝해서.”

“……네.”

“그래. 상영관이 6관이었나? 그 앞에서 보자.”

화장실이 어디였지. 아까 봐두었던 화장실의 위치를 기억하며 걸음을 옮기려던 대현은 저를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식이었다.

“형.”

“응?”

“옛날에만 주셨다고 했죠.”

“무슨 말이야?”

“인형이요.”

이해하지 못한 대현을 본 듯 식이 설명을 덧붙였다.

“친구들한테 나눠주셨다고…….”

어딘가 자신 없는 말투였다. 잠시 미간을 모으던 대현이 알아들은 표정을 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커서는 잘 안 했으니까. 왜?”

“……아니에요.”

“싱겁긴. 너도 화장실 갈래?”

“괜찮아요. 다녀오세요.”

방금 나눈 대화의 어디가 좋았는지는 모르지만, 약간의 미소까지 띤 식의 얼굴을 보던 대현이 곧 어깨를 으쓱하고는 걸음을 옮겼다. 받을 때야 망설이는 것 같긴 했지만 그래도 인형을 꽉 쥐고 있는 걸 보니 뽑아주길 잘한 것 같았다.

손을 씻다 눈에 물이 튀었다. 한쪽 눈을 찡그리며 거울을 확인하던 대현이 거울에 비친 얼굴을 보고 천천히 손을 내렸다. 물이 들어갔던 눈을 두어 번 깜빡거리자 얇은 물줄기가 눈 옆으로 흘러내렸다. 잠시였지만 따가웠던 고통이 사라지자, 거울 안에는 제 얼굴을 타인의 얼굴을 보는 것처럼 관찰하는 자신만 있을 뿐이었다.

“……뭐 하냐, 정대현.”

자조적으로 중얼거린 그가 한 손을 들어 얼굴을 벅벅 쓸어 내렸다. 영화를 보고 싶다는 식의 말을 듣자마자 멤버들에게 못 해준 걸로 아쉬움을 남기고 싶지 않다는 결심을 했던 게 떠올랐다. 그래서 따라나선 거였다. 그렇지만 이렇게 차분하게 자신을 마주할 시간을 가지게 되자 가장 먼저 찾아온 건 씁쓸함이었다. 어쩌면 당연한 거일 터다. 오늘 하루 종일 그가 아쉬움을 남기고 싶지 않다는 명목 아래 한 일들은 결국 지후의 몸을 빌려 한 거였으니까.

한숨을 쉬며 고개를 들던 그가 멈칫했다. 거울 너머로 누군가 들어오는 게 보였다. 거울에 가깝게 붙어 선 자신을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힐긋거리는 얼굴을 본 대현이 옆에 잠시 벗어두었던 모자를 들어 썼다. 페이퍼 타월을 한 장 빼낸 그가 아직 물에 젖은 손을 닦고는 뒤돌아 나가려 할 때였다.

“재밌게 사는구만, 청년.”

“……네?”

나가려던 그를 막고 선 사람이 있었다. 방금 화장실로 들어온 사람이기도 했다. 마흔 살쯤 되었을까. 평범한 인상의 중년 남성이었다. 대현이 가려는 길을 막지만 않았다면 마주쳤다고 기억도 하지 못할 만큼.

의아한 낯으로 한 걸음 물러서던 대현이 그와 시선을 마주하고는 멈칫했다. 평범한 인상에 굳이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그의 눈을 자세히 보았기 때문이었다. 회색빛을 띤 눈이 대현을 흥미롭게 관찰하고 있었다. 나이대답지 않은 맑은 눈이 대현의 시선을 부담스럽게 옭아맸다. 대현은 문득 목이 말랐다. 그가 침을 꿀꺽 삼키고는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무슨…….”

“그놈이랑 얘기는 끝난겨?”

“네?”

“왜. 몸 바뀐 놈.”

대현이 멍하게 입을 벌렸다. 남자는 그런 대현을 보고 있음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답답하다는 표정을 짓고 대현에게 대답을 재촉했다.

“갸도 좋대?”

“……지금 무슨 얘기를.”

“말하는 거 보니께 아닌갑네.”

“…….”

“어쩐댜. 얼른 얘기를 해야 될 텐디.”

어느새 남자는 혀를 쯧쯧 차고 있었다. 대현을 지나쳐 세면대로 걸어간 그가 수도꼭지를 틀어 손을 씻었다. 대현은 여전히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그가 화장실에서 나가지 못하게 막던 남자는 이미 한참 전에 비켜섰음에도 불구하고.

“하긴. 이미 다쳤을 수도 있겄어.”

그때였다. 남자의 중얼거림이 그의 귓속에 파고든 건. 줄곧 얼어 있던 대현의 몸이 움찔거렸다. 남자는 어느새 대현에게서 뒤돌아 화장실에서 나가고 있었다.

“그게 무슨…… 잠시만! 잠시만요!”

어딘가 막힌 것 같았던 목이 뚫린 것도 그쯤이었다. 대현이 남자의 뒤를 쫓아 달렸다. 화장실에서 나온 대현이 좌우를 살폈다. 방금 나간 걸 분명히 보았는데도 남자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이를 악문 대현이 주위의 가게들을 하나씩 들어가 보았음에도 비슷한 체형을 가진 남자조차 찾을 수 없었다.

결국 대현의 발걸음은 영화관 내부로 향했다. 스낵바에도, 매표소에도 남자는 없었다. 갈 곳을 잃은 대현의 눈이 허공을 멍하니 떠돌았다. 대현이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아닐 거라고 부정하는 이성적인 목소리는 결국 그의 불안감에 참혹하게 패한 뒤 형체를 감췄다. 익숙한 번호를 누르고 핸드폰을 귀에 가져다 댄 대현은 어느새 중얼거리고 있었다.

제발…… 제발…… 이지후. 받아. 받아줘.

통화 연결음 소리가 이렇게 길게 느껴진 건 처음이었다. 핸드폰을 쥔 대현의 손은 이제 스스로 느껴질 정도로 떨리고 있었다. 대현이 눈을 질끈 감았다.

“형……?”

제 옆에 식이 다가온 걸 알면서도 대현은 고개조차 돌리지 못했다. 여전히 귀에서는 통화 연결음이 이어지고 있었다. 곧 상대방이 전화를 받지 않아 통화가 불가능하다는 기계음이 들려왔다. 입술을 한 번 더 깨문 그가 재다이얼 버튼을 눌렀다. 꽉 다문 입술에서 피 향이 올라왔다. 하지만 그조차도 신경 쓸 수가 없었다. 그의 온 신경은 건너편에서 들려와야 할 목소리를 향해 쏠려 있었으니까.

“형. 괜찮으세요? 형. 저 보세요.”

달칵. 그리고 기적같이 전화가 연결되었다는 소리가 들렸다. 온몸의 긴장이 풀린 대현이 잠시 비틀거렸다. 마치 누군가 막아놓았던 것 같던 주위의 소음이 둑에서 풀린 물처럼 한꺼번에 그의 귀로 몰려들었다. 대현은 그제야 눈을 깜빡이며 참고 있던 숨을 내쉴 수 있었다. 그가 가장 먼저 한 건 통화 상대편의 이름을 크게 부르는 일이었다.

“이지후! 너…… 너 어디야? 밖이야? 내가 지금 갈 테니까…….”

말을 쏟아내던 대현이 멈칫했다.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건너온 목소리는 낯설었다. 전화를 받았어야 할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러니까, 지후가 지금 가지고 있어야 할 제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래서 지금…… 여보세요? 여보세요?]

손아귀의 힘이 풀렸다. 핸드폰이 떨어지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대현은 잡을 수 없었다.

‘하긴. 이미 다쳤을 수도 있겄어.’

예고 없는 모든 것들은 잔인하다. 그렇지만 예고가 있다고 해서 그것이 덜 잔인하게 느껴지는 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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