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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애와 거리두기-84화 (84/119)

84화

생각해 보니 정말 그런 것도 같았다. 그제서야 불안하게 날뛰던 마음이 가라앉는 듯했다. 대현이 결심한 듯 조금 열린 문으로 손을 가져갔다. 힘을 조금 주어 밀자 이전에 한 번 들어와 본 적 있던 식의 방이 눈에 들어왔다. 대현의 시선이 바로 침대 위에 앉아 있는 인영을 향했다.

“김 식?”

“……형. 일어나셨어요?”

눈이 마주쳤다고 생각한 순간 식이 몸을 일으켰다. 무릎에 올려두었던 노트북을 치워두고 제 쪽으로 돌아서는 얼굴을 확인한 대현이 눈을 깜빡거렸다. 코로 들어오는 머스크향에 멈칫했다. 조금 무거운 것 같기도, 포근한 것 같기도 한 향은 식에게서 나고 있었다.

밴에서 잠들었을 때 맡은 적이 있던 그의 냄새를 떠올린 대현이 콧잔등을 어색하게 긁었다. 식은 하얀 수건을 까만 머리 위에 비스듬히 걸쳐 얼굴의 반을 가리고 있었다. 젖은 머리를 보니 씻은 지 얼마 안 된 것 같았다. 급히 몸을 일으킨 그 덕에 머리카락 끝에 맺힌 물 한 방울이 쇄골을 거쳐 군살 없는 배로 떨어져 내리는 걸 멍하니 보던 대현이 정신을 차리고는 고개를 돌렸다.

“어. 언제 왔어?”

“얼마 안 됐어요. 왔을 때 형 주무시길래 일부러 안 깨웠는데. 저 때문에 깨신 거예요?”

“아냐. 어…… 샤워했어?”

“네. 아. 죄송해요.”

대현이 고개를 돌린 이유를 눈치챈 듯 식의 조금 당황한 목소리가 들렸다. 뒤돈 그가 옷장으로 걸어가는 게 보였다. 곧 그의 하얀 손 위에 하얀 반팔 티셔츠가 들려 나왔다. 머리에 걸렸던 수건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보기 좋게 붙은 등 근육이 하얀 티셔츠 아래로 감춰지는 걸 멍하니 관찰하던 대현이 집중할 대상을 찾아 눈을 굴렸다.

그의 시선이 방금 식이 내려놓았던 노트북에 멎었다. 방에 들어올 때 식이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던 것이기도 했다. 대현이 자신도 모르게 발을 떼 노트북 쪽으로 다가섰다. 상단에 뜬 동영상 스트리밍 사이트 로고가 익숙했다.

“이거…… 보고 있었어?”

의식하기도 전에 질문이 흘러나갔다. 대답을 기대하며 고개를 돌린 대현이 멈칫했다.

“네. 아까도 올라왔던데. 예약해 놓으셨던 거예요?”

“어? 어…….”

어느새 식은 그에게 성큼 가까워져 있었다. 옆에 선 그 덕분인지 방을 둘러싼 향이 한층 짙어진 느낌이 들었다.

“반응이 어떤지 보고 있었어요.”

“…….”

“조회수도 그렇고, 댓글 수도 갈수록 느는 것 같긴 하던데.”

“……계속 보고 있었던 거야?”

“네?”

“이거.”

대현이 손을 뻗어 화면을 가리켰다. 대현의 손을 따라 시선을 옮긴 식이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옆얼굴을 보던 대현이 다시 화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식이 보고 있었던 건 대현이 플러그 관련 일상 영상을 올리는 채널이었다. 특히 방금까지 그가 보고 있던 듯한 영상은 대현이 예약을 걸어놓았던 영상이기도 했다.

다시 보겠냐는 안내 문구가 뜬 창 밑으로 팬들이 단 코멘트들이 보였다. 대현이 터치패드로 손을 올렸다. 관련 영상에 뜬 것들 중에는 대현이 요 몇 주 간 올린 영상들이 있었다. 그리고 모두 이미 본 영상이라는 표시가 되어 있었다. 가슴 속 어딘가에서 뭔가가 울컥 올라와 대현은 입술을 깨물었다.

“자주는 못 봐도 생각 날 때마다 찾아보긴 했어요.”

“…….”

“도움이 될 수 있는 게 조금이라도 있을까 싶어서.”

대현이 뭘 보는지를 눈치챘는지, 옆에서 덧대는 식의 설명들은 그의 감정을 진정시키는 데에 별 도움이 안 됐다. 대현은 그렇게 한참을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입을 열 수 있게 된 건 한참이 지나서였다.

“보고 있는지 몰랐어.”

“…….”

“바빴잖아. 숙소에도 잘 못 들어오고.”

자꾸 잠기는 목소리 때문에 중간중간 헛기침을 해야만 했다. 그의 머릿속은 어느덧 아까 느꼈던 어색한 감정이 아닌, 눈앞의 식에 대한 고마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진수를 통해서 식의 스케줄은 전해 듣고 있었다. 곧 방영되는 사전제작 드라마 관련 일부터 신인상 수상 이후로 쏟아지는 광고, 인터뷰까지. 거기다 들어오는 대본들 리딩도 직접 하고 있다고 들었다.

“……싶었으니까요.”

“……어?”

감상에 너무 빠져 있었는지 식이 한 말을 놓쳤다. 되물었지만 식은 작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씻었기 때문인지 늘 올리고 있던 앞머리가 이마로 내려와 있었다. 앞머리를 쓸어 올리는 얼굴이 어딘가 피곤해 보였다. 그를 잠시 바라보던 대현이 곧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 보니 피곤할 만도 했다. 촬영장에서 잔다고 해도 푹 자지도 못했을 거고. 아까 인터뷰를 보니 쉬는 시간에도 저런 식의 홍보 활동을 하느라 쉬어도 쉬는 것 같지도 않았을 테다.

“저…… 내가 너무 방해한 것 같아. 촬영하느라 피곤했을 텐데. 쉬어.”

빠르게 말을 내뱉고 돌아서던 대현은 몇 걸음 옮기지도 못하고 붙잡혔다.

“형.”

그의 손목을 붙잡은 손 때문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의 바로 뒤에서 들려온 나직한 음성 때문이었다. 대현이 몸을 돌렸다. 돌자마자 마주한 식의 눈에 대현이 어색하게 눈을 깜빡거렸다. 붙잡힌 손목이 불편해 손에 슬쩍 힘을 줬지만 식은 눈치채지 못한 것처럼 대현을 빤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저 안 피곤해요.”

“어?”

“그러니까…….”

예상치 못한 식의 말에 대현의 눈이 조금 커졌다. 아까와 다르게, 이번에는 식이 시선을 피했다. 입을 달싹거리던 그의 시선이 자신이 붙잡은 대현의 손목, 그리고 바닥 어딘가를 헤매더니 끝내는 원래 있어야 했던 곳으로 돌아왔다.

“같이 있으면 안 될까요. 형이랑.”

대현의 입술에 시선을 멈춘 눈이 느리게 깜빡였다. 이어질 대답을 기다리겠다는 것처럼.

“형. 제일 무난해 보이는 게 액션 같아서 끊었는데 괜찮으세요?”

“응. 나 액션 잘 봐. 넌 괜찮아?”

“네. 저도 딱히 가리는 거 없어요.”

“다행이다. 팝콘 먹을래?”

“……형 드시고 싶으세요? 그럼 제가 사올게요.”

“아냐. 이건 내가 살게. 음료는? 뭐 먹을래.”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낸 대현이 스낵바로 다가가며 물었다. 잠시 망설이던 식이 이내 그의 뒤를 쫓아왔다.

“형 드시고 싶은 걸로 시키시면.”

“진짜 내 마음대로 시켜?”

“네.”

아무리 본인이 오자고 해서 온 거래도 너무 맞춰주는 거 아닌가. 슬쩍 식을 보던 대현이 이내 밝게 인사하는 직원을 마주하고는 고개를 숙여 보였다. 메뉴판을 보고 잠시 고민하던 그가 곧 익숙하게 주문을 이어나갔다. 숙소에서 지켜본 식은 과자는 물론이고 탄산음료도 즐기는 것 같지 않았다. 아마 체중 관리 때문일 터다. 예전에 잡지에서 본 적 있던 배우들의 식단을 떠올린 대현은 아메리카노 두 잔을 주문했다. 지갑에서 카드를 빼던 그가 멈칫했다.

“이걸로 계산해 주세요.”

“……야.”

인상을 써보았지만 모자를 꾹 눌러쓴 옆얼굴은 대현보다 앞서 내민 카드를 꿋꿋이 직원에게 내밀고 있었다. 대현의 눈치를 보던 직원이 이내 식의 카드를 받아 드는 게 보였다. 바로 드리겠다며 사라지는 그녀를 본 대현이 식 쪽으로 몸을 돌렸다.

“너…….”

“오자고 한 건 저니까 제가 사는 게 맞아요, 형.”

말을 잇기도 전에 선수를 치는 얼굴은 뻔뻔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하. 작은 헛웃음을 친 대현이 바로 나온 커피를 받아 들고 뒤도는 식을 천천히 뒤따랐다. 예준도 그렇고, 식도 그렇고. 돈 내는 상황마다 어떻게든 못 내게 하려고 구는 게 이해가 안 갔다. 아무리 본인들이 돈을 잘 벌어도 그렇지. 츄러스를 파는 곳 앞에 서서 예준과 했던 실랑이를 떠올린 대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형.”

“어?”

“저희 영화 시작까지 시간이 좀 남았는데…… 추우세요? 어디 들어가 있을까요?”

진작 앞서 간 줄 알았던 식이 어느새 그의 옆에 와 있었다. 한 손에 커피가 담긴 캐리어를 들고, 다른 손으로 표를 확인하는 그의 얼굴이 모자 챙 때문에 생긴 그늘에 가려져 있었다.

식이 들고 있는 영화표에 적힌 시간을 확인한 대현이 주위를 둘러봤다. 평일 늦은 저녁, 규모가 큰 영화관에는 그 넓은 공간이 텅텅 비어 보일 정도로 사람이 없었다. 식이 왜 차까지 몰고 와야 하는 이곳을 고집했는지 알 것 같기도 했다. 카페에 들어가기에는 이미 커피를 샀고…… 입구부터 샅샅이 훑던 대현의 시선이 한 곳에 멎은 곳도 그쯤이었다.

“인형 뽑기 잘해?”

입구에 위치한 인형 뽑기 가게가 바로 그거였다. 교복을 입은 학생 몇 명을 제외하고는 텅텅 빈 곳을 지켜보던 대현이 식에게 고갯짓을 했다. 대현을 따라 시선을 옮긴 식이 당황한 표정을 하는 게 보였다.

문득 아까 숙소에서 예준이 사준 곰인형에 관심을 보이던 식이 생각났다. 그 곰인형은 부피가 너무 커서 베란다에 내놓아야 했다. 방에 놓으려고도 해봤지만 너무 공간을 많이 차지하는 데다가, 방에 들어오는 윤성이 매번 놀라곤 했기 때문에 나온 나름의 해결책이었다.

원래 숙소의 베란다에는 팬들이 준 이런저런 선물들이 꽉 들어차 있었지만 하루 날 잡고 베란다를 청소한 덕에 지금은 나름의 각을 맞춰 정리된 상태였다. 이러려고 베란다를 청소했었나 생각을 하던 대현은 인형을 베란다로 옮겨두었었고, 가끔 예준에게 실없는 문자가 올 때가 아니면 잊고 있기도 했다.

우람과 윤성도 처음 대현이 제 몸만 한 곰인형을 끌고 왔을 때 놀랐지만, 예준이 줬다는 말에 금방 관심을 끄는 모양새였다. 또라이 새끼, 라고 중얼거린 우람은 기용에게 들은 그의 기상천외한 일화들을 저녁을 먹는 내내 늘어놓았고, 윤성은 이미 여러 번 들었는지 놀라는 기색도 없이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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