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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애와 거리두기-83화 (83/119)

83화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제가 앞에 있는 것조차 잊은 것 같은 얼굴은 저러다 탈진하겠다 싶을 정도로 울어댔다. 망설이다 뻗은 손끝에 묻어 나온 물기에 심장이 쿵 떨어졌다.

숙소에서 누군가를 다독거리는 역할은 늘 그가 했다. 특히 저와의 관계에서는 더했다. 욱하는 성질 덕에 자꾸 나오는 제 충동적인 행동을 지적하고 달래는 게 그의 일상이었다. 차분한 얼굴로 왜 그래서 안 되는지를 설명하고, 민망해진 제 앞에서 괜찮다는 듯 어깨를 두드리며 옅은 미소를 짓는 얼굴은 그 어떤 꾸지람보다 큰 효과가 있었다. 지후를 실망시키기 싫어졌다.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머리가 큰 후부터 우람은 늘 가장이 되어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렸다.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으나 일을 마치고 돌아온 아버지의 야윈 어깨를 보았을 때도, 피자를 사달라는 여동생의 말에 미안하다고 슬픈 얼굴을 하는 엄마를 보았을 때도, 친구의 패딩이 부러워 죽겠는 얼굴을 하고서도 차마 사달라는 말을 하지 못하는 동생을 보는 것은 강요보다 더한 힘이 있었다.

성공해야 한다. 아버지 어깨의 짐을 덜어드려야 하고, 가족에게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뭐든 열심히 했다. 운동부에 속했을 때는 운동을 열심히 했고, 춤을 배우고 나서는 춤을 열심히 췄다. 손이 까지고, 무릎에 멍이 들었다. 연습생 시절엔 무식하게 이어진 연습의 결과물로 파스를 달고 살기도 했다. 앞만 보고 달리기도 바쁜 우람이 주위를 돌아볼 여유가 있었을 리 없다. 그랬기에 가족을 부양해야 한다는 의무로 똘똘 뭉친 십대 소년에게 의지할 사람은 자신뿐이었다.

평생 바뀌지 않을 줄 알았다. 데뷔를 했고, 비록 성공했다고 말하지는 못할 정도지만 그래도 또래들이 버는 수입보다는 훨씬 많이 벌 수 있게 되었다. 가족들을 새 집으로 이사시키고, 아버지가 남긴 빚도 처리할 때가 되어서야 주위를 돌아볼 수 있었다. 앞만 보고 달려오는 동안 삼 년이란 시간이 지났음에도 멤버들은 여전히 남 같았고, 회사는 해체 이야기를 꺼냈다.

지후에게 무책임하다며 화를 냈지만 우람이라고 지후가 회사의 결정을 뒤엎을 정도의 큰 결정권이 없다는 걸 모르진 않았다. 어쩌면 화를 낼 상대가 필요했던 건지도 모른다. 방향 잃은 분노가 쏟아질 대상은 한 번 화를 내본 적 있는 사람이 되는 게 편했다. 비겁한 행위였음을 인정한다.

그런데도 지후는 우람을 용서했다.

“…….”

그뿐만 아니라, 다시 다가왔다.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네가 필요하다고 말했고, 알게 모르게 지쳐 있던 우람에게 괜찮다고 말해주었다. 그 행동이 평생 바뀌지 않을 줄 알았던 것을 바꿨다.

그에게 의지하기 시작했다. 잘한 일이 있으면 가장 먼저 자랑하고 싶고, 나쁜 일이 있으면 가장 먼저 털어놓고 위로를 받고 싶은 상대가 되어버렸다. 그 모든 것은 믿음으로부터 비롯됐다. 이지후는 답을 알 것이라는 믿음. 그리고 팀을 위해서, 자신을 위해서라면 최선을 다해 도울 것이란 믿음.

가족 외에 처음으로 가져본 든든한 존재는 우람의 마음을 한없이 말랑말랑하게 만들었다. 육두문자는 기본이고, 장난도 꼭 엎치락뒤치락 거칠게 하고야 마는 제 친구들과 달리 다정하게 말하고 웃는 얼굴을 보면 기분이 이상할 때도 있었다.

그래서 잊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지후도 의지할 대상이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타인을 챙기는 게 너무나도 익숙해 보이는 그도, 누군가에게 챙김 받고 울컥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말이다.

‘누가 밥 차려준 게 되게 오랜만이었거든. 나도 모르게 좀 북받쳤나 봐. 놀랐지 둘 다. 미안.’

밥을 차려준 사람이 없었다는 말이 유독 가슴을 후벼팠다.

‘넌. 안 가냐?’

‘어?’

‘집. 안 가냐고.’

‘아…… 어차피 가도 사람이 없어서.’

‘……어?’

‘어머님 기다리시겠다. 얼른 가.’

언젠가 나눴던 대화가 자연스레 떠올랐다. 연말을 맞아 윤성과 우람에게 집에 다녀오는 게 어떻냐고 제안한 사람답지 않게 지후는 숙소에 혼자 남아 있을 것처럼 보였다. 의아함에 툭 던진 말에 한 박자 늦은 대답을 돌려주던 그는 평소와 같은 옅은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어딘가 다르게 느껴졌다. 그 때문인지 우람은 더 묻지 못하고 얼떨떨하게 그의 손에 떠밀려 숙소를 나와야 했다. 그때 묻어뒀던 찝찝함이 되살아났다.

그때처럼 입꼬리를 애써 끌어당겨 웃는 얼굴을 보자 할 말을 잃었다. 연습생 때 입방아에 오를 정도로 휘감고 다니던 명품들이나 고생 한 번 안 한 것 같은 얼굴을 보며 물질적 지원이 빵빵한 집에서 넘치게 사랑 받고 자랐을 것이라 생각했다. 상상도 못했던 깊은 쓸쓸함이 묻어나는 얼굴에 순간 울컥했다.

그날 밤, 천장을 바라보며 누운 우람은 다짐했다. 지후에게 의지할 만한 사람이 되어주겠다고 말이다. 그가 자신에게 해주었던 것과 같은 위로를 건네고, 힘들 때 옆에서 함께해 줄 사람이 되어주고 싶었다. 새해에 그가 돌아갈 만한 곳이 되어주지 않았고, 그에게 밥을 차려주지 않았던 가족 대신 자신이 그에게 그런 존재가 되어주고 싶었다.

“야.”

“왜.”

“우리 갈비찜은 언제 배운대?”

“몰라, 병신아.”

“넌 진짜 아는 게 뭐냐 대체?”

지후는 이미 그에게 가족이었으니까, 이제는 우람이 그의 가족이 되어줄 차례였다.

* * *

“…….”

대현이 눈을 떴다. 아니, 잠깐만. 눈을 떴다고? 이상함을 느낀 그가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몸에 덮여 있던 담요가 흘러내려 발치에 걸렸다. 이것 또한 이상한 일이었다. 그의 기억 속에는 담요를 가져와 덮은 기억이 없었기 때문에. 대현이 주위를 둘러봤다.

다행히 대현이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거실 풍경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단, 불이 꺼져 있다는 것을 제외하면. 어둠에 적응하기 위해 눈을 깜빡이던 대현은 그제야 자신이 깜빡 잠들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식의 인터뷰 영상을 보고 한참을 멍해 있었던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이후로의 장면이 기억에 없었다. 몸을 일으키기 전 자신의 자세를 생각해 보면 텔레비전을 보던 그 자세 그대로 잠에 든 모양이었다.

근데 이 담요는 대체 뭐지. 담요를 내려다보던 대현이 무언가를 찾기라도 하는 것처럼 고개를 돌렸다. 그가 소파에서 발을 내려 조심스레 걸음을 뗐다. 깜깜한 숙소 안 유일하게 빛이 새어 나오는 곳이 있었다. 조금 열린 문 앞에 선 대현이 멈칫했다.

식의 방이었다. 잠에서 깬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무뎌진 감각상태였음에도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식에게 설레었던 자신을 깨달은 후라 더 그랬다. 처음 겪어보는 상황에 머릿속이 백지가 되어버린 것 같았다.

연애를 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고등학생 때 한 번, 대학생 때 한 번. 누군가로 인해 설렘을 느끼는 것 자체가 어색하게 느껴지지는 않을 만큼은 경험해 봤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 대상이 남자인, 그것도 제가 좋아하던 그룹의 멤버가 될 줄은 몰랐다.

설렘의 대상이 남자라는 것 때문에 충격에 빠진 건 아니었다. 사실 거기에는 선우의 영향력도 조금 있었다. 대현은 아직도 선우가 영민과 저를 불러놓고 커밍아웃을 했던 날이 마치 어제의 일처럼 생생했다.

답지 않게 잔뜩 긴장한 얼굴을 보며 대현은 그가 말하는 내용보다, 저렇게 말하기까지 그가 거쳐 온 고민들의 무게를 먼저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평생 여유라고는 잃어본 적 없는 친구가 삶의 모든 부분을 거의 함께했다고 볼 수 있는 친구들이 자신을 등질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꺼낸 고백이 얼마나 대단하고도 또 가슴이 아린 일인지가 절절히 느껴졌다.

영민도 별다르지는 않았는지 네가 게이인 건 상관없는데 그렇게 쪼다 같이 말하지는 말라며 고개 숙인 선우의 어깨를 퍽퍽 쳐 댔고, 대현은 아무 말도 없이 선우의 고개를 들어 눈을 맞췄다. 조금 두려워하는 게 보이는 눈을 보며 고개를 끄덕여 주고는 어깨를 토닥였다. 때로는 말보다 눈빛으로 더 많은 것이 전해질 때가 있으니까. 대현의 마음이 전해졌는지는 몰라도 그날 선우는 결국 눈물을 보였다. 김선우가 우는 건 유치원 때 이후로 처음 봤다.

그렇게 고등학생의 티를 벗지 못한 세 명은 결국 별로 입에 대지도 못한 치킨을 눈앞에 두고 얼싸안았다. 그 이후로 선우는 여러 번의 연애를 했다. 그 대상을 대현과 영민에게 소개해 줄 때도, 그러지 않을 때도 있었다. 성별이 같은 사람과의 연애라 해서 대현과 영민이 하는 연애와 딱히 다른 건 없었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건 역시 다 똑같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치만 이건 여러모로 너무 갑작스러웠다. 특히나 그 대상이 식이라는 걸 고려해 봤을 때. 여태껏 여자친구만 사귀어오기도 했고, 한 번도 같은 남성에게 설렘 비슷한 감정을 느껴본 적이 없던 자신이 뜬금없이 식에게 떨림을 느끼는 상황을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은호를 좋아했을 때도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은 없었다. 애초부터 연애 감정으로 플러그를 좋아하는 게 아니었고, 은호의 열애설 비슷한 기사에도 그룹 활동에만 지장이 없으면 된다고 생각하곤 했다. 식의 열애설도 비슷한 온도로 대해왔다. 어느 쪽이든 그들이 행복할 수 있다면, 그리고 팬들을 기만하는 열애설이 아니라면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아니다. 대현이 머릿속 가득한 생각을 몰아내며 입술을 깨물었다. 설렘이 모두 연애 감정으로 이어지는 건 아니었다. 그냥 지나가는 감정일 수도 있다. 거기다 식에게 전화를 받았을 때는 여러 생각들로 마음이 혼란스러웠을 때였다. 감정적으로 취약한 상태였으니 누군가의 따뜻한 말이 마음의 빈 공간을 비집고 들어오기가 더 쉬웠을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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