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최애와 거리두기-82화 (82/119)

82화

“…….”

윤성까지 밥을 먹여 보내고 나니 숙소에는 대현만 남아 있었다. 조용한 숙소는 확실히 어색하게 느껴졌다. 편집에 집중이라도 하고 있으면 모르겠지만 여태까지 찍어놓은 촬영분의 편집은 다 끝내 업로드 예약까지 걸어놓은 상태라 그마저도 어려웠다. 거실을 괜히 둘러본 대현이 소파에 앉았다. 숙소에 들어온 이후 몇 번 켜본 일 없던 텔레비전을 켠 대현이 무료한 얼굴로 리모컨을 조작했다.

이른 오후라 그런지 딱히 재미있는 프로그램이 방영되고 있지는 않았다. 한참을 채널을 돌리던 대현이 멈칫했다. 연예 채널이었다. 화면 전체에 뜬 이미지보다 그의 시선을 사로잡은 건 왼쪽 상단에 뜬 인터뷰 타이틀이었다.

‘김 식&서이현의 입맞춤’

입맞춤……? 다소 자극적인 타이틀이 머릿속에 박혔다. 대현이 얼떨떨한 얼굴로 화면을 응시했다. 어딘가 익숙하게 느껴지는 얼굴의 리포터가 화면에 등장해 설명을 하고 있었다. 집중해 듣던 대현은 이게 식이 찍는 광고 촬영장에 찾아가 담은 인터뷰 영상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듣다 보니 위의 타이틀은 같이 일을 했다는 걸 다소 자극적인 ‘입맞춤’으로 표현한 거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처음 보았을 때의 충격이 아직 남아 있어서 뒷목을 어색하게 긁던 그가 다시 화면에 집중했다. 그녀가 오프닝에서 한참을 신나게 얘기했던 것처럼 얼마 지나지 않아 식이 화면에 등장했다. 깔끔한 검정색 니트를 입은 그는 그와 대조될 정도로 하얀 니트를 입은 또래 여자와 거리를 두고 앉아 있었다. 인사를 해달라는 리포터에 말에 옅은 미소를 짓고 고개를 숙이는 그가 보였다. 대현이 멍하게 눈을 깜빡거렸다.

원래도 잘생긴 건 알고 있었지만 광고 촬영을 하는 곳에서 반사판에 반사된 하얀 피부는 유난히 더 반짝이는 듯했다. 그걸 느낀 건 대현뿐만이 아닌 듯 리포터가 식에게 멋있어 보인다며 칭찬을 건넸다. 약간 어색하게 눈을 깜빡이던 그가 곧 익숙하게 눈을 접어 웃으며 감사 인사를 건넸다. 인터뷰는 물 흐르듯 흘러가고 있었다.

지켜보던 대현은 새삼 식이 프로임을 실감했다. 팬일 때도 알고 있긴 했지만 은호면 몰라도 식의 인터뷰까지 이렇게 집중해서 본 적은 없었다. 그래서인지 대화가 막힐 때마다 어색함 없이 대화의 주도권을 잡고 이끌어가는 그가 신기하고도 대단해 보였다. 어느새 대현은 소파에 앉은 몸을 최대한 텔레비전 쪽으로 쭉 빼고 있었다.

[두 분이 지금 촬영하시는 이곳이 사실 커플들의 유명한 데이트 장소라고 들었어요. 밤에 별이 많이 뜨는 곳이라던데. 두 분은 어떻게 느끼셨어요? 이현 씨부터. 네. 말씀해주세요.]

[아. 네. 사실 저희가 이번에 촬영하는 콘셉트도 별을 바라보는 연인이거든요. 그래서 밤에 촬영을 많이 했는데, 누워서 보고 있으면 너무 예뻐서 놀랐어요. 연인이랑 오기에 되게 좋은 장소일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

[아, 그렇게 예쁜가요? 그렇다면 자! 저희 깜짝 질문 하나 합시다. 혹시 함께 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 사람은? 두 분 다 있으실 것 같은데.]

[네?]

[에이. 이현 씨 있으시잖아요. 이현 씨부터 시원하게 말씀해 주시면, 다음에 이제 식 씨가 또 말씀해 주시는 걸로.]

[어…… 저 하면 식 씨도 하는 거예요?]

[당연하죠. 전 한 번 질문을 시작하면, 대답을 들을 때까지 물러나지 않는 리포터로 유명합니다. 아시잖아요~]

[아, 그러면…… 사실 전 가족이랑 오고 싶다는 생각을 했거든요.]

[어? 이현 씨……?]

[가족이면 안 된다는 말씀은 안 하셨잖아요~]

[아, 이거…… 제가 졌네요. 그래도 이번에 얻은 교훈을 바탕으로, 식 씨에게는 좀 더 유용한 정보를 얻으려 노력해 보겠습니다. 자. 식 씨. 시~원하게 한번 말씀해 주시죠.]

[아…….]

리포터의 얼굴이 익숙한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한두 번 해본 것이 아닌 양, 곤란해하는 둘을 두고서도 민감한 질문을 이어나가는 얼굴이 능청스러웠다. 대현은 어느새 초조한 마음이 되어 화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실수하면 안 될 텐데. 의도치는 않은 것 같았지만 이미 두 번의 연애사가 밝혀졌던 식이기에 괜히 더 걱정이 됐다. 지금 생각하니 리포터가 일부러 식을 마지막까지 남겨둔 것 같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리포터가 짓궂은 미소를 짓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제가 식이라도 된 것처럼 긴장하던 대현이 멈칫했다.

[……멤버랑.]

[……네?]

[저희 그룹, 플러그요. 멤버들이랑 오고 싶네요.]

[아, 두 분의 방패가 정말…… 대단하십니다. 제가 도저히 뚫을 수가 없네요.]

인터뷰를 언제 찍었는지 알 수 없지만 그게 이틀 전이 아니라는 건 충분히 예상 가능했다. 그렇다면 식은 전화로 그 이야기를 하기 전부터 하늘을 보며 플러그를, 그리고 제 생각을 했다는 거였다.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손에 든 큐카드를 부채처럼 들고 얼굴에 부치는 리포터를 마지막으로 질문이 넘어갔다. 대현이 잠시 딴 생각을 하는 사이 어느새 화면 속의 두 남녀는 시청자들에게 전할 마지막 소감을 뱉고 있었다. 전해달라는 말에 먼저 마이크를 잡은 식이 화면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까만 눈이 깜빡거렸다. 입을 벌린 그가 뭐라고 말하는지가 들리지 않았다. 아직도 대현의 머릿속에는 이미 지나간 식의 대답이 반복 재생되고 있었다.

‘……멤버랑.’

겨우 끝났다 싶으면 이틀 전의 대화가 자연스럽게 바통을 넘겨받아 재생됐다. 무슨 감정인지 정의할 수도, 그렇다고 해서 아무것도 아니라고 자신 있게 치부할 수도 없던 감정도 함께 차올랐다. 마치 방금 일어난 일처럼 생생했다.

식의 목소리가.

‘형. 제가 지금 있는 곳이요.’

‘여기…… 별이 잘 보이기로 유명한 곳이래요. 그래서 지금 하늘을 보고 있는데…….’

‘형. 나중에…….’

‘같이 오실래요? 여기.’

‘보여드리고 싶어요. 지금 제 눈앞에 있는 하늘.’

‘좋아하실 것 같아서…….’

그리고 그의 말에 쿵쿵 뛰던 제 심장의 떨림이.

대현은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았다. 아무리 이상한 기분을 겪어도 그걸 두 번이나 들춰보는 건 자주 일어나는 일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 이유가 한 사람 때문인 이유는 더더욱 흔치 않았다. 대현이 황급히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 내렸다. 당황스러움이 배어나는 눈이 식이 진작 사라진 화면에 고정됐다.

바보가 아닌 이상 모를 수 없었다. 같은 사람을 보고 두 번이나 심장이 빨리 뛰는 일은 그의 인생에서도 몇 번 없었던 일이니까.

* * *

“뭐냐.”

“뭐.”

“안 온다며, 미친놈아.”

“……선생님 언제 오시냐?”

기억력도 안 좋은 놈이 이런 건 꼭 안 잊는다. 도움이 안 되는 친구를 애써 무시하며 우람이 말을 돌렸다. 외투를 벗으며 둘러본 실습실 안에는 저번 주에 본 것 같은 얼굴들도, 처음 보는 것 같은 얼굴들도 있었다. 몇 주 과정이랬지, 이거. 첫 주만 해도 정말 일회성이라 생각했기에 주의 깊게 듣지 않았던 OT 내용을 떠올리며 머리를 긁던 우람이 제 옆구리를 쿡쿡 찌르는 손길에 옆을 돌아봤다.

“뒤질래?”

“왜 왔냐고, 너.”

“와줘도 지랄이야. 저번 주에는 혼자는 절대 못 한다면서 지랄을 떨더니.”

“어. 근데도 님이 안 오신다고 하셨잖아요.”

“……닥치고 책 펴, 병신아. 이걸로 먹고 살 거라며.”

산만 한 덩치를 하고서는 눈을 빛내며 엉겨드는 석호를 떼어낸 우람이 그의 앞에 놓인 책을 들어 거칠게 펼쳤다. 타이밍 좋게 책을 거의 던지듯이 내려놓자마자 선생님이 들어왔다. 덩치도 큰 남자 둘이 아웅다웅 싸우는 일이 흔하게 볼 수 있는 모양은 아니어서인지, 들어오자마자 석호와 제 쪽을 쳐다보는 선생님을 느낀 우람이 모자를 푹 한 번 더 눌러쓰며 테이블 밑의 석호의 허벅지를 찼다. 아! ……조용히 해라.

쌍시옷 발음을 내뱉으려 시동을 걸던 석호도 주위 시선을 눈치챘는지 입을 다물었다. 묘하게 우람과 석호에게 몰려 있던 시선들은 선생님이 말을 시작하자 제자리를 찾아갔다. 저번주처럼 오늘 만들 요리를 TV 화면에 띄우고 주의사항을 말하는 선생님에게 집중하던 우람이 제 앞의 요리 재료들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오늘 만들 요리는 잡채. 요리할 재료들은 이미 손질되어 그의 앞에 놓여 있었다. 당면, 간장, 시금치, 당근 등. 다양한 재료들을 보자마자 떠오르는 얼굴은 오늘 이 자리에 오게 한 자와 동일 인물이었다. 눈앞의 재료들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하나도 모르는 저와 달리, 숙소 부엌에 서 재료를 자연스레 다듬던 뒷모습을 생각하자 마음이 가라앉았다. 자연스레 생각은 얼마 전 보았던 그의 눈물에 멎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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