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최애와 거리두기-81화 (81/119)

81화

“야. 나 간다.”

“…….”

“이지후?”

“어? 아. 나가게?”

“어. 운동. 넌 집에 있을 거지?”

나가려다 몸을 돌려 묻는 우람을 본 대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맨투맨 위로 몇 겹을 껴입고도 롱패딩까지 입은 우람을 확인한 대현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떴다. 얼어 죽을까 봐 걱정은 안 해도 되겠네. 우람은 덩치와 다르게 추위를 많이 탔다. 저럴 거면서 윤성이 축구하는 거 보러 갔을 때는 봄이나 다름없다고 허세까지 부렸단 말이지.

대현이 우람의 뒤를 쫓아 현관 쪽으로 다가섰다. 신발을 신다 말고 올려다보는 눈매는 여전히 매서운 데가 있었지만 그래도 그 안의 눈은 대현을 올곧게 바라보고 있다. 그가 할 말이 있다면 언제라도 들어줄 것 같은 눈빛이었다. 그걸 확신할 수 있는 건 우람이 최근 제게 보여준 태도 때문일 것이다. 당장 오늘 아침만 해도 한약을 먹으라며 문을 두드려 댔던 그를 떠올린 대현이 살짝 미소 지었다.

“한우람.”

“왜.”

“고마워.”

“뭐가.”

“그냥. 다.”

“……너 요새 진짜 이상한 거 알지?”

인상을 확 찌푸리는 얼굴은 그러면서도 제 어깨에 얹은 손을 가만히 내버려 둔다. 툴툴대며 다 신은 운동화를 괜히 한 번 더 매만지고 있는 뒤통수를 잠시 내려다보던 대현의 눈이 잠깐 가라앉았다. 그도 잠깐 부러 입꼬리를 끌어 올린 그가 우람이 맨 크로스백의 지퍼로 손을 뻗었다. 우람이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경계심이 묻은 눈빛으로 지퍼 위를 손으로 덮은 우람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뭐 하냐 너?!”

“앞치마는 운동하는 데 왜 가져가?”

“씨발. 이거 앞치마 아니거든?”

그러기에는 지퍼 사이로 노란색 병아리가 너무 잘 보인다. 그걸 깨달은 건 대현뿐만이 아닌 듯 욕을 중얼거린 우람이 살짝 나온 앞치마를 쑤셔 넣고는 다시 지퍼를 올렸다. 어느덧 귀까지 빨개져서는 휙 뒤도는 뒷모습을 본 대현이 웃었다.

“잘 다녀와.”

“…….”

“맛있는 거 많이 배워오고.”

“아, 미친. 아니랬지!”

“알았어. 알았어.”

“너 지금 안 믿지, 이지후. 어? 아니라 했다?”

“알았다니까. 요리학원 가는 게 아니고 헬스장 가는 거라고. 알겠어.”

문을 열어놓고도 나가다 말고 돌아서 성질내는 우람을 보면서도 자꾸 웃음이 났다. 장난은 이쯤 해야겠지. 대현이 그의 어깨를 부드럽게 밀었다.

“추운데 길 조심해서 다녀와.”

“……야.”

“응.”

“너 그…… 제일 좋아하는 게 뭐냐.”

뜬금없는 소리에 대현이 멈칫했다. 한참 전에 열어놓은 문을 잡고 선 우람이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아 있잖아. 음식 중에서. ……이왕이면 한식이면 좋고.”

불퉁한 표정을 하고서도 흘끔 쳐다보는 우람과 눈을 마주한 대현이 눈을 휘었다.

“나 음식 안 가려. 특히 네가 해주는 거면 다 먹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내가 해줄 줄은 어떻게 알고.”

“그냥 느낌으로?”

“…….”

“장난이야. 얼른 가. 늦겠다, 수업.”

“수업 아니라고!”

하여간 고집은 세가지고. 끝까지 아니라고 부정하던 빨간 얼굴이 엘리베이터 앞까지 걸어가는 것까지 지켜본 대현이 손을 흔들었다. 미간을 찌푸린 얼굴은 그러면서도 손을 들어 마주 흔든다. 물론 금방 내리긴 했지만.

엘리베이터가 내려가는 것까지 보고서야 나름의 배웅을 마친 대현이 문을 닫았다. 현관문에 등을 기대고 선 그가 고개를 숙인 채 눈을 깜빡거렸다.

어제 방에 박혀 하루 종일 생각했다. 지후에게 나무에 대해 알아봐 주겠냐고 물어봤던 자신은 정말 이들을 보낼 준비가 되었는지를. 결론은 아니었다. 자신이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하지 않을 수도, 미룰 수도 없는 일이었다. 조금씩 멀리 하게 되면 그들의 존재도 조금씩 흐려지리라 기대했건만, 우람의 미역국은 그 모든 것이 건방진 생각이었다는 걸 일깨웠다.

이 방법으로는 될 일이 아니라는 깨달음은 급작스럽게 찾아왔다. 그랬기에 대현은 생각해야 했다. 정 떼는 방식이 먹히지 않는다면, 다른 방식으로 이들을 보낼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게 이거였다. 힌트는 예준과의 드라이브에서 얻었다.

‘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먼 미래를 걱정하는 것보다는, 당장 눈앞에 있는 거에 최선을 다하는 게 나아.’

그래서 대현은 준비하기로 했다. 그들과의 마지막을. 그동안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하고, 해주고 싶었던 것들을 해주며 나중에라도 못 해준 것에 대한 아쉬움이 없게끔 하고 싶었다. 몸이 다시 바뀐다면 지후가 곤란할 수도 있을 일이라는 건 알았다. 그렇지만…….

언젠가 지후가 말한 적이 있다. 아마 우람에게 뺨을 맞고 그를 찾아갔을 때였을 거다.

‘내가 너한테 내 역할 해달라고 부탁했을 때부터 너한테 뭘 하지 말아달라고 요구할 권리는 없는 거나 마찬가지야.’

사실 대현은 지후의 몸에 들어오고 나서 겪은 수많은 어려운 일에도 그 말을 떠올려 본 적이 없었다. 부탁 받았기에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리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지후가 부탁한 것만 아니라, 제가 동해서 수락한 측면도 있다고 생각했기에. 특히 대표와의 대담으로 얻어낸 해체 보류 같은 경우에는 지후가 말렸지만 대현이 마음대로 진행한 일이니까.

그렇게 잊고 있었던 이야기를 꺼내든 건 지후에게 부탁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구차할지도 모르지만 이번 한 번은 제 이기심을 봐달라고 빌고 싶었다.

“……한 번만 봐줘, 이지후.”

중얼거린 대현이 이내 걸음을 옮겼다. 윤성의 방 앞에 선 그가 문을 조심스럽게 두드렸다. 대답은 고사하고 인기척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시계를 확인한 대현이 다시 문을 두드렸다. 윤성은 결국 정글에 가게 됐고, 오늘은 그 예방접종을 하는 날이었다. 진수가 데리러 오기로 한 시간이 다가오고 있는데도 윤성은 아직도 일어날 기미가 안 보였다. 고개를 갸웃한 대현이 결국 문고리에 손을 올렸다.

“윤성아.”

문 사이로 빼꼼 고개를 내민 대현이 방 안을 살폈다. 방과 마주보는 침대 위에 윤성이 누워 있었다. 제 키만 한 베개를 안고 정신없이 자는 얼굴을 바라보던 대현의 입에서 결국 웃음이 터져 나왔다. 따지고 보면 두 살밖에 차이 안 나는데, 윤성은 왜 이렇게 어린 동생같이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늘 챙겨야 할 것 같고 어디에 가도 잘할까, 밥은 잘 챙겨 먹을까 걱정이 된다.

정글을 떠올리자마자 잠시 굳었던 얼굴은 이윽고 짧게 고개를 젓고 조심스럽게 방 안으로 발을 들여놓는 행위와 함께 어느덧 다시 차분해져 있었다.

윤성은 그 와중에 또 대현이 사준 후드티를 입고 있었다. 진짜 마음에 들었나 보네. 신기한 표정으로 정말 하나 더 사줘야겠다는 생각을 하던 대현이 윤성의 팔을 잡고 약하게 흔들었다.

“윤성아, 11시야. 일어나야지.”

“……형?”

예상외로 윤성은 금방 눈을 떴다. 저번처럼 목소리로 대현인 걸 알아챈 모양이었다. 동시에 몸을 벌떡 일으킨 윤성이 대현을 응시하다가 이내 고개를 돌려 방을 멍하니 둘러보는 게 보였다. 머리에 쓰고 있던 후드를 벗는 그의 얼굴 위로 잠기운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형, ……저……. 아니…… 11시요?”

“응. 형이 12시에 데리러 오신다고 하셨던 것 같아서. 씻고 준비해야지. 너 밥도 안 먹었잖아.”

“아…… 밥…….”

끝말을 따라 중얼거리는 얼굴이 멍했다. 대현이 사방으로 뻗친 윤성의 뒷머리로 손을 뻗어 대충 정리했다.

“일부러 아침에 안 깨웠어. 너 어제 늦게까지 게임한 거 같다고 우람이가 그러길래.”

“아…… 진수 새끼…… 아니…… 진수가…….”

“그래. 안 그래도 진수랑 했을 것 같더라. 태영이는 요새 질렸다고 안 한다며?”

“그건 그 새…… 걔가 못해서 그렇게 말하는 거예요.”

“넌 잘하고?”

“……이태영보단 잘해요.”

그 와중에 진수 얘기를 안 하는 걸 보니 진수보다 잘하는 건 아닌가 보다. 픽 웃은 대현이 윤성의 볼을 툭툭 쳤다. 게임 이야기를 해서인지 아까보다는 훨씬 잠이 깬 얼굴을 한 윤성을 본 그가 침대에서 일어섰다. 아침이라 그런지 부은 눈을 한 윤성의 시선이 자연스레 위로 올라왔다.

“씻고 와. 밥 먹자.”

“형도 같이 드세요?”

“나? 난 아침 먹었는데.”

“아…….”

“왜. 같이 먹을까?”

“아니요. 형 드셨는데요 뭐…… 제가 아침에 못 일어나서…… 죄송해요.”

“뭘 또 죄송해. 혼자 먹기 좀 그런 거면 같이 먹자. 일단 씻고 나와.”

“……그래도 돼요?”

“왜 안 되겠어.”

대현의 대답에 시무룩해졌던 얼굴이 그새 눈을 빛내고 있다. 하여간 귀엽다니까. 침대에서 내려온 윤성이 갈아입을 옷을 챙기는 걸 본 대현이 그를 불렀다. 윤성아.

“네?”

“수건 가져가야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뒤돈 윤성이 그가 던진 수건을 가볍게 잡아냈다. 수건에 시선을 두고 눈을 깜빡거리던 그가 이내 대현과 눈을 맞추고는 씩 웃었다.

“형, 저 금방 씻을게요!”

그냥 한 말이 아닌 듯 급하게 문을 빠져나가는 뒷모습을 본 대현에 희미한 미소가 떴다. 그리고 곧 걸음을 옮겼다. 윤성에게 사줬던 후드티가 어디 브랜드의 것이었는지를 떠올리려고 노력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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