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갑자기 너무 많은 정보가 흘러들어 왔다. 선우가 누구랑 사귀는지도 몰랐는데 거기다 헤어지기까지 했다니. 근데 보통 친구의 전 여친을 그 새끼라 부르나? 생소한 호칭에 지후가 한 쪽 눈썹을 들어올렸다. 여전히 그의 시선은 베란다에 있는 선우의 뒷모습에 꽂힌 채였다. 때마침 몸을 움직인 선우 덕에 그의 옆모습이 드러났다. 귀에 대고 있는 물체를 확인한 지후가 눈을 한 번 깜빡였다. 그도 통화를 하는 중인 듯했다.
말소리가 들리지 않아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잔뜩 굳은 것처럼 보이는 옆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지후가 다시 영민의 음성에 집중했다.
[드디어 헤어졌나 봐. 어제 잠깐 만났을 때 뭔가 이상해서 캐보니까 그런 것 같더라고.]
“아.”
[제주도 가기 전부터 안 좋았던 것 같던데. 어쩐지 끊었다던 새끼가 담배를 두 갑씩 사더라.]
투덜거리는 영민의 음성을 반쯤 흘리며 지후가 선우의 뒷모습에 다시 시선을 맞췄다. 통화가 끝났는지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은 그가 다른 주머니 속으로 손을 넣고 있었다. 곧 그의 손에 네모난 담뱃갑이 들려 나왔다. 한 개비를 빼어 무는 얼굴은 방금 들은 이야기 덕인지 쓸쓸해 보였다. 어딘가 화난 것 같기도, 슬퍼 보이기도 했다.
그래서였을까. 그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건. 그리고 그때, 지후와 선우의 눈이 마주쳤다. 유리창 너머로 멈칫하는 그가 보였다.
[난 솔직히 헤어졌다니까 속이 다 시원한데 어제 표정 보니까 김선우는 아닌가 봐. 근데 정대. 네가 봐도 진짜 걔는 아니지 않았냐. 너도 별로 안 좋아했잖아. 아냐?]
“…….”
[정대? 듣고 있어?]
“어.”
[어쨌든 그렇다고. 아, 그래서 오늘 너 생일도 그렇지만, 그 새끼랑 술이나 같이 먹어주려고 했는데…… 씨발. 나 왜 이거 한다고 했냐. 짜증나. 너네랑 놀지도 못하고.]
고개를 돌린 지후가 자조적으로 중얼거리는 영민의 말에 대충 장단을 맞춰줬다. 영민은 누군가의 부름과 함께 다시 전화하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끊겨진 전화를 내려다보던 지후가 어색하게 화장실에서 나왔다. 곧 베란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선우가 거실로 들어왔다. 소파에 앉는 그의 손에는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았다.
흘깃 지후를 본 그가 리모컨을 집어 들었다. 베란다에서 지었던 표정은 기억이 안 날 정도로 평소 같은 얼굴을 한 그는 영민에게 들은 이야기가 아니었다면 실연을 한 사람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니트 차림으로 베란다에 있었기 때문인지 그에게서 찬바람의 냄새가 났다. 아까 꺼내는 걸로 보였던 담배는 결국 피우지 않은 모양이다. 가만히 선 지후를 향해 고개를 돌린 그가 여상한 말투로 물었다.
“누구야?”
“어?”
“통화하는 것 같던데.”
“아…… 안영민.”
“왜. 더 늦는대?”
“아니…… 그…… 교수가 갈아엎으래서 오늘 못 올 것 같다던데.”
선우가 슬쩍 미간을 모으는 걸 본 지후가 황급히 덧붙였다. 어쩐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자꾸 온다고 그러는데 내가 말렸어. 선배들도 약속 취소했다고…… 나올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닌 것 같아서.”
“…….”
“만회하겠다던데…… 물론 그럴 필요는 없지만.”
자신이 왜 영민을 변호하고 있는지도 모르면서도 말을 이어나가던 지후가 선우의 눈치를 봤다. 다행히 먹혀든 건지 선우는 별 말 없이 고개를 작게 끄덕이고 말 뿐이었다.
“…….”
“…….”
그나저나 이제 뭘 어떻게 해야 하지. 막막했다. 생각해보니 제주도에서도 선우와 둘이 남아있던 적은 별로 없었다. 있었다 해도 굉장히 짧은 시간이었고, 곧 영민이 들어와 분위기를 시끌벅적하게 만들었기에 이런 어색함을 느낄 틈도 없었다.
불편해하는 지후와 달리 리모컨을 든 얼굴은 조금의 어색함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소파에 앉지도, 그렇다고 방에 들어가지도 못한 지후가 망설임 끝에 결국 소파의 끝에 엉덩이를 붙였다. 그 나름의 최선이었다. 그를 흘끔 본 선우는 별 다른 말이 없었다. 한참을 리모컨을 만지던 그가 생각났다는 듯이 꺼낸 건 뜬금없는 식사 이야기였다.
“아. 그리고 음식은 시켰어. 어머니가 추천해 주신 한정식 집이 있는데, 일정 금액 이상이면 배달도 해준다더라고. 너 한식 좋아하잖아.”
“어. 뭐…….”
애초부터 한식이 제 취향이 맞는지 아닌지가 뭐가 중요하겠는가. 대현의 생일인데. 대수롭잖게 고개를 끄덕이던 지후가 갑자기 성큼 다가온 선우에 멈칫했다. 둘 사이의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졌다.
“음식 올 때까지 영화나 볼래?”
지후는 대답할 수가 없었다. 다른 곳에 신경을 쏟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선우의 머리가 닿은 허벅지였다. 바짝 얼은 지후를 아는지 모르는지, 하품을 하며 텔레비전 쪽으로 몸을 돌리는 선우는 지후에게 리모컨까지 건네고 있었다. 결 좋은 머리카락이 지후의 허벅지를 간질였다.
“……정대현?”
“어, 어. 줘.”
지후가 리모컨을 받지 않자 선우가 다시 몸을 돌리려는 듯 움찔거렸다. 이를 악문 지후가 황급히 손을 뻗어 리모컨을 건네받았다. 얘네들이 좀 신기할 정도로 친한 건 알았지만, 이런 스킨십까지 자연스럽게 할지는 몰랐다. 아는 지식을 총동원 해봐도 남자애들끼리 이렇게 친숙한 자세를 취하는 건 들은 적도, 본 적도 없었다. 거기다 친구라 할 만한 관계란 게 별로 없는 지후라 혼란스러움이 더했다. 이게 평범한 건가…… 뒤통수를 내려다볼 뻔한 걸 꾹 참은 지후가 리모컨 버튼을 아무렇게나 꾹꾹 눌렀다.
“대현아.”
“……어?”
“저거. 네가 옛날에 보고 싶다 했었던 거 같은데.”
지후가 멈칫했다. 선우가 손을 뻗어 가리키는 영화로 커서를 올린 그가 망설였다. 영화 제목은 ‘연애의 끝’. 포스터부터가 슬픈 눈빛을 한 남녀였다.
‘걔 헤어졌대.’
‘제주도 가기 전부터 안 좋았던 것 같던데. 어쩐지 끊었다던 새끼가 담배를 두 갑씩 사더라.’
하필 이때 또 아까 영민이 한 말이 떠오를 건 뭐란 말인가. 잠시 생각하던 지후가 리모컨 버튼을 꾹 눌렀다. 화면이 넘어갔다. 올려다보는 의아한 눈빛을 느낀 그가 헛기침을 했다.
“됐어. 이젠 별로 안 보고 싶어.”
사람을 대하는 것에 서툰 편인 지후였지만, 베란다에서의 선우의 눈빛을 보았을 때 그가 지금 저런 영화를 볼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건 알 수 있었다.
“…….”
“…….”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사랑이 나오는 영화를 제하니 옵션은 상당히 줄어들었다. 결국 지후가 선택한 건 노란 괴물들이 뛰어다니는 애니메이션이었다. 발랄한 음악이 흘러나오는 오프닝 화면을 멍하니 지켜보던 지후가 선우의 머리를 어떻게 치울 수 있을까 고민할 때였다.
“안영민이 말했지.”
웃음기 섞인 선우의 말이 들려온 건. 어색하게 허벅지를 움찔대던 지후가 멈칫했다. 당장이라도 고개를 들어 얼굴을 확인할 줄 알았던 선우는 텔레비전을 향해 돌아누운 자세 그대로였다. 허벅지에 댄 머리도 그대로였다. 그나저나 저 물음은 헤어진 걸 영민이 말해줬냐고 묻는 거겠지. 뭐라 대답해야 할지 고민하는 동안 텔레비전에서는 노란 괴물들이 무리 지어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지나가고 있었다.
“……어.”
부정하면 더 어색할 것 같아 솔직히 말했지만 바로 돌아오는 대답이 없으니 뻘쭘한 것도 사실이었다.
“대현아.”
선우가 입을 연 건 한참이 지나서였다. 노래하던 노란 괴물들이 자기들끼리 무리를 지어 다른 곳으로 떠나고, 역경을 겪고, 또 다른 노래가 울려 퍼졌을 때가 되서야 나온 목소리에 지후가 깜짝 놀라 밑을 내려다봤다. 선우의 속눈썹이 보였다. 텔레비전을 향한 눈과는 다르게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소리는 닿을 수 없는 곳을 헤매고 있는 것만 같아서 기분이 이상했다.
“나 연애하지 말까 봐.”
“……무슨 소리야, 갑자기.”
“그냥. 그런 생각 들더라, 이번에.”
그리고 그가 똑바로 돌아누웠다. 아까처럼 허벅지를 간질이는 머리카락을 느끼면서도 지후는 밑을 내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선우는 눈을 감고 있었기에 이번에는 어색함을 느끼지 않고도 그의 얼굴을 관찰할 수 있었다. 영민의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만 해도 평소와 똑같이 보였던 얼굴은 자세히 보니 꼭 그런 것도 아니었다. 조금 튼 입술을 보던 지후가 살짝 눈을 찡그렸다. 눈을 감은 채로 선우는 말을 이었다.
“연애란 게 안 외롭기 위해 하는 건데. 어떻게 할수록 더 외로워지는 건지 모르겠다.”
“…….”
“이쯤 되니 그냥 내가 문제인 거 같기도 하고.”
씁쓸한 목소리를 내놓는 얼굴은 그 와중에도 차분했다. 그러나 지후는 영민이 말한 괜찮지 않아 보이는 얼굴이 어떤 건지 알 것도 같았다. 그래서였을까. 어색하게나마 그의 말을 부정한 건.
“……그게 네 잘못인지 어떻게 알아.”
“…….”
“그냥…… 맞는 사람을 못 찾은 걸 수도 있잖아.”
천천히 눈을 뜨는 선우를 본 지후가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자기도 모르게 나온 말이라지만 눈을 마주하고 간지러운 위로를 뱉을 자신은 없었다. 그가 소파 너머로 삐쭉 나온 선우의 발에 시선을 둔 채 중얼거렸다. 하지 않던 짓을 하려니 민망한 마음에 욕이 섞였다.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띵동.
타이밍 좋게 벨이 울렸다. 선우의 시선이 떨어져나갔다. 그의 시선이 닿았던 볼 언저리가 따끔거리는 듯했다.
“그래도 내가 친구 하나는 잘 뒀네.”
허벅지 위로 느껴지던 무게감이 사라졌다. 어느새 몸을 일으킨 선우가 지후를 보고 웃고 있었다. 동시에 머리로 뻗어온 손이 지후의 뒷머리를 툭툭 다정하게 두드렸다.
“밥 먹자. 배고프다.”
소파에 걸쳐 놓은 코트를 들어 지갑을 찾아 나가는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지후가 그가 남기고 간 말을 곱씹었다. 친구……. 어딘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아픈 것 같기도, 간지러운 것 같기도 했다. 어느 쪽이든 낯선 감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