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쓸쓸하게까지 느껴지는 중얼거림을 끝으로 대현이 입을 닫았다. 창문을 보기 위해 암막커튼을 잡고 있던 손에 힘이 풀렸다. 식에게서는 말이 없었다. 그다운 조용한 숨소리만 가끔 들려올 뿐이었다. 몇 번째인지 모를 침묵을 견디는 둘은 같은 하늘 아래 서 있지만 보고 있는 풍경은 달랐다. 마치 그의 눈앞에 가득 펼쳐져 있을 별들이 대현의 눈에는 하나도 들어오지 않는 것처럼.
대현이 창문을 등지고 섰다. 창문에 기댄 어깨가 조금 시렸다.
[형. 나중에…….]
침묵을 깬 건 식의 음성이었다. 평소답지 않게 빠르게 말을 시작한 그가 뜸을 들였다. 망설이는 기색을 느낀 대현이 창문에 기댔던 몸을 조금 앞으로 내밀었다.
[같이 오실래요? 여기.]
대현은 자신도 모르게 핸드폰을 쥔 손에 조금 힘을 줄 수밖에 없었다.
[보여드리고 싶어요. 지금 제 눈앞에 있는 하늘.]
“…….”
[좋아하실 것 같아서…….]
방금 늘어놓은 간지러운 말들은 다 거짓이기라도 한 것처럼 쑥스러움이 느껴지는 마지막 말을 듣던 대현의 표정이 멍하게 변했다. 귀를 간질이던 것들이 다른 곳으로 옮겨간 것만 같았다. 생경한 느낌에 그가 멈칫했다.
[형.]
“…….”
[형?]
“……어.”
그 때문인지 식의 세 번째 부름에 겨우 내놓은 목소리는 대현 자신조차 낯설 정도로 가라앉아 있었다. 정신을 차린 대현이 떠듬떠듬 변명했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방금 전 느낀 이상한 감정이 갈피를 못 잡고 헤매고 있었다.
“미안. 어제 잠을 못 자서…… 좀 정신이 없네.”
[아…… 주무셔야겠어요.]
“그래야지. 너도 얼른 자. 내일도 촬영 있지?”
[네.]
아쉬움이 묻어나는 식의 목소리가 느껴졌지만 지금으로선 아무렇지 않은 척 통화를 이어나갈 자신이 없었다. 그래도 어색하게나마 대화를 끝맺으려 한 대현 덕에 통화는 얼추 끝나가고 있는 듯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대현이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그럼 촬영 잘 하고…… 숙소에서 보자.”
[형.]
“어?”
[모레에 올라가요, 저.]
“아…….”
[숙소로 바로 가려구요.]
“…….”
[그때 봬요.]
꼭. 식이 작게 덧붙인 말은 지나치리만큼 크게 들렸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심장이 쿵 떨어진 것 같은 느낌이 든 건. 대현은 어느새 입술을 꽉 깨물고 있었다.
[얼른 주무세요, 형. 끊을게요.]
그 사이 식은 마지막 인사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전화가 끊겼다.
대현이 멍하니 화면을 내려다봤다. 8:32. 통화 시간을 확인한 그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그가 천천히 귀에 손을 가져다 댔다. 쿵쿵쿵. 귀로 전해져 오는 심장 소리가 평소보다 크게 들렸다.
이 모든 게 8분 32초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대현은 그렇게 한참을 서 있었다. 외로운 달이 온 힘을 다해 뿜어낸 빛이 희미하게 새어 들어오는 방에 서서.
이상하게 눈물이 날 것 같았다.
* * *
“…….”
대현에게서는 답이 오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지후는 평소에 별로 확인도 하지 않았던 핸드폰을 자꾸 확인하고 있었다.
‘밥이랑 국 좀 했어.’
‘…….’
‘따뜻할 때 먹어. 알았냐.’
정대현은 어쩌자고 그랬을까. 도대체 어떤 생각으로 자신의 생일날 미역국을 끓여 제게 먹일 생각을 한 걸까. 끓여줬어도 저가 끓여줬어야 했고, 따뜻할 때 먹으란 말도 저가 했어야 했다. 미역국을 좋아하는 모양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했던 자신이 멍청하게 느껴졌다. 마음이 시큰거렸다.
“넌 진짜…….”
거울에 비친 대현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순한 얼굴 너머로 숨은 자신을 질책하던 지후가 수도꼭지를 틀어 차가운 물을 얼굴에 끼얹었다. 볼이 얼얼해질 때까지 계속된 행위는 대현에 대한 미안함만은 쉽게 씻어내지 못했다. 한숨을 쉰 지후가 수건을 들어 얼굴을 대충 문질렀다.
세면대 위에 올려놓은 핸드폰이 진동을 하기 시작한 것도 그쯤이었다. 지후가 수건을 내팽개치고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대현인 줄 알고 나온 행동이었으나 아쉽게도 화면에 뜬 이름은 그의 기대를 배반했다. 한숨을 쉰 그가 전화를 받았다.
“어.”
[대현아, 나 어떡하냐.]
“……무슨 말이야 갑자기.”
영민의 음성이 건너왔다. 그런데 어딘가 이상했다. 늘 통통 튀던 그의 목소리가 답지 않게 어두웠다. 어딘가 절망스러움까지 배어나는 목소리에 지후가 인상을 찌푸렸다.
[아씨. 교수가 방금 왔었는데 작품 보고 하는 말이 여태까지 한 거 다 갈아엎으라잖아. 지금 다들 멘붕와서…… 미친 거 아니냐, 진짜.]
듣다 보니 짚이는 게 있었다. 영민은 친한 선배의 졸업 작품을 돕고 있는 중이었다. 알고 싶지 않아도 틈만 나면 찡찡거리듯 전화해 오는 그 덕에 모를 수가 없는 일이기도 했다. 지후가 차분하게 대답했다.
“……뭐가 문젠데 그래서. 시간이 촉박해?”
[뭐가 문제냐니. 다 문제지, 씨발! 당장 오늘 너 생일인데! 내가 오늘을 얼마나 준비했는지 알아?]
이성적으로 생각해 건넨 질문에 돌아온 건 감성적인 대답이었다. 지후의 입에서 멍청한 신음이 터져 나왔다. 그러고 보니…… 지후가 걸음을 옮겨 화장실 문을 살짝 열었다. 슬쩍 보이는 거실에서는 선우가 소파에 앉아 있었다. 멀끔한 얼굴이 리모컨 버튼을 꾹꾹 눌러대고 있었다. 진지한 표정과 달리 머리 밑으로 내려온 고깔모자는 그를 둘러싼 풍경 자체를 이질적으로 만들었다.
생각해 보니 아까 집에 들이닥친 그가 영민은 늦게 온다는 식으로 말했던 것 같기도 하다. 생일 축하한다는 말에 대현의 생각부터 하느라 까맣게 잊고 있었다. 구석으로 밀어놓은 생각들을 하나둘 꺼내던 지후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럼 너…… 못 오는 거야? 아예?”
[그러니까…… 아씨. 몰라. 진짜 이러기 싫은데…… 이거 다음 주 월요일까지 내래서 일단은 오늘은 매달려야 될 것 같은 분위기야. 선배들도 다 약속 취소하고…… 야. 어떡하냐, 진짜. 나 그냥 쨀까? 어?]
“……말이 되는 소릴 해.”
대학생활을 해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선배의 일을 돕기로 했던 후배가 선배들까지 약속을 취소한 분위기에서 혼자 나오겠다고 하는 게 말이 안 되는 일이란 건 안다. 한숨을 쉰 지후가 머리를 짚었다. 그가 다시 힐끔 거실을 확인했다. 리모컨을 내려놓은 선우는 이제 핸드폰을 만지고 있었다. 마음에 안 드는 일이 있는지 반듯한 이마가 살짝 찌푸려진 게 보였다.
안영민이 안 오면…… 나랑 쟤랑 둘이 있어야 한다는 거지?
대현의 생일을 축하해 주러 온 그의 친구들이니 제가 어떻게 할 수가 없는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돌려보낼 수도 없고. 케이크 정도만 같이 자르고 나면 가지 않을까라고 단순하게 생각했던 부분이기도 했다. 그러나 만약 그 축하를 하는 게 선우고 축하를 받는 게 자신뿐이라면 문제는 달라진다. 제주도에서 있었던 마지막 날 밤 이후 선우를 대하기가 껄끄러웠던 그기에 더했다. 돌겠네, 진짜. 지후가 입술을 깨물었다.
[정대. 대현아. 정대?]
“……어. 듣고 있어.”
[화난 거 아니지? 어? 나 진짜 쨀까? 어? 나 나간다?]
“내가 왜 화가 나. 오버하지 마.”
[힝. 그럼 어떻게 하라고.]
“뭘 어떻게 해. 갈아엎으라고 했다며. 갈아엎어야지.”
[너 생일은 그럼…….]
“……됐어. 김선우…… 있잖아. 걱정하지 말고. 할 일 잘 하고 와.”
정말 미안한 모양인지 영민의 사과이자 찡찡거림은 한참을 이어졌다. 결국 참다못한 지후가 성질을 내고 나서야 사과를 멈춘 그는 새벽에라도 가겠다는 끔찍한 소리까지 하고 있었다.
“집 가서 그냥 처자지 무슨. 문 안 열어줄 거니까 좋은 말 할 때…….”
[안 열어줘도 돼. 나 너네 집 번호 알잖아.]
말을 말자. 고개를 저은 지후가 곧이어 건너온 영민의 음성에 멈칫했다. 방금 전의 오바스러운 톤을 떨쳐낸 조심스러운 음성이 건너왔다.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하듯 숨을 죽인 목소리에 지후가 인상을 찌푸렸다.
[야, 근데 김선우 괜찮아 보이냐?]
“무슨 말이야.”
[아니. 지금 너네 집에 있잖아, 걔.]
“어.”
[괜찮아 보이냐고.]
“……멀쩡한데. 왜?”
뜬금없는 물음이었다. 의아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거실의 선우를 확인하려 고개를 돌린 지후가 멈칫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소파에 앉아 있던 그가 보이지 않았다. 소파 앞 탁자에 덩그러니 놓인 고깔모자를 본 그가 시선을 돌렸다. 결국 화장실에서 몸을 빼 두리번거리고서야 그의 모습을 찾아냈다. 베란다 너머로 선우의 뒷모습이 보였다.
[걔 헤어졌대.]
“……뭐?”
[왜. 그 새끼 있잖아. 내가 싫어하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