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최애와 거리두기-78화 (78/119)

78화

“옛날에.”

“어?”

대현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예준은 여전히 앞을 보고 있었다. 그의 왼쪽 손이 핸들을 가볍게 두드리고 있는 걸 본 대현이 그처럼 앞을 응시했다. 깜빡이를 켠 차가 그들 앞으로 끼어들고 있었다. 예준은 그가 그러도록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형이랑 체스를 하는데 나만 계속 지는 거야.”

“……아.”

“그게 너무 싫어서 하루는 체스판이랑 말들을 다 숨겼어. 근데 형이 찾아와서 왜 그랬냐고 그러더라고.”

“…….”

“그래서 그랬지. 나만 지니까 하기 싫다고. 근데 형이 그때 그랬어. 내가 체스를 못 하는 건 너무 많은 걸 생각해서라고.”

“…….”

“당장 잡아야 할 말은 놓치고 뒤의 말을 어떻게 놓을지 생각해 봤자 뭐 하겠냐면서.”

대현을 돌아보며 씩 웃는 얼굴은 마치 처음 보는 얼굴 같다.

“살다보니 형 말이 맞았어. 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먼 미래를 걱정하는 것보다는, 당장 눈앞에 있는 것에 최선을 다하는 게 나아.”

대화를 나누는 동안 계속 움직이던 차가 멈췄다고 느낀 것도 그쯤이었다. 기어를 바꾼 예준이 시동을 껐다. 대현이 고개를 돌려 창밖을 살폈다. 어느새 차는 주차장에 서 있었다. 안전벨트를 푼 예준이 대현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츄러스 먹을래?”

방금까지 진지한 이야기를 늘어놓던 얼굴이라고 보기 어렵게끔, 창밖의 한곳을 가리키며 묻는 해맑은 얼굴은 어느덧 제가 알던 예준이었다. 결국엔 대현도 그처럼 웃을 수밖에 없었다.

“어. 이건 내가 사줄게. 가자.”

살다 보면 사람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위로를 받는다. 마치 방금 예준이 꺼낸 이야기가 파도처럼 다가와 그의 모래성을 감춘 것처럼.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몸을 드러내 명치를 까끌까끌하게 만들 모래들인 걸 알지만 상관없었다. 어쩌면 대현이 가장 필요한 건 그 모든 걸 잊을 아주 잠깐의 시간이었을지도 모르니까.

대현이 옆으로 돌아누웠다. 예준과의 드라이브를 마치고 돌아와 윤성과 우람이 한 저녁 식사를 먹었고, 자겠다며 침대에 누운 지는 두 시간이 넘었다. 몸이 안 좋다는 핑계로 들어와 누운 건 한참이 지났음에도 지친 몸과 달리 어지러운 머릿속은 대현을 놔주지 않고 있었다. 억지로나마 감고 있던 눈이 뻑뻑했다. 대현이 결국 눈을 비비며 누운 몸을 일으켰다.

‘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먼 미래를 걱정하는 것보다는, 당장 눈앞에 있는 것에 최선을 다하는 게 나아.’

아까부터 머릿속에서는 예준이 건넨 말만 되풀이되고 있었다. 불이 꺼진 방을 둘러보던 대현의 시선이 책상 위의 물건들에 닿았다. 우람이 방까지 밀고 들어와 먹으라고 강요했던 보약부터 시작해 윤성이 잔뜩 건넨 과자 더미까지도. 처음 같이 만화를 볼 때 먹었던 과자가 대현이 제일 좋아하는 과자라고 생각을 했던 모양인지, 마트에 있는 감자과자란 감자과자는 다 쓸어온 것 같았다. 결국 대현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그가 몸을 감싸던 이불을 제치고 바닥으로 내려섰다.

그의 시선이 책상 위 올려놓은 핸드폰에 닿았다. 아까 꺼진 걸 발견하고 충전시켜 놓은 뒤 만지지 않았던 것이기도 했다. 핸드폰을 쥔 대현이 홀드 버튼을 길게 눌렀다. 환하게 불이 들어오는 화면을 바라보던 그가 의자에 천천히 주저앉았다. 통신사 로고가 사라진 화면을 빤히 보던 그가 손을 멈췄다. 메시지 앱 위에 숫자가 떠 있었다. 별 생각 없이 엄지를 움직인 그는 다음 순간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왜 말 안 했어>

발신 시각 4시. 발신 번호는 익숙했다. 문자를 여러 번 읽던 대현은 지후가 자신이 오늘 생일인 것을 알아낸 모양이라고 추측했다. 선우와 영민 덕분에 알게 된 거겠지. 생일마다 집으로 찾아와 정신없게 구는 둘이 이번이라고 달랐을 리 없다. 영민에 비해 점잖은 선우도 그날만은 고깔모자까지 쓰고 유치하게 굴었으니 말 다했다. 미리 경고를 해줄 걸 그랬나. 경악했을 지후의 표정이 어렵지 않게 눈앞에서 그려졌다. 작은 웃음을 짓던 것도 잠시 대현의 얼굴이 가라앉았다.

<미안해, 정대현>

잇따른 지후의 문자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여섯 글자에 그의 마음이 모두 느껴졌다. 바보같이 또 제 탓이라고 생각할까 봐 걱정이 되기도 하고. 한숨을 쉰 대현이 얼른 답장을 보내고는 창을 껐다. 하루 종일 느낀 죄책감만으로도 이미 견디기 힘들었다.

생일이니까 봐주라, 이지후. 지후는 듣지 못할 말까지 중얼거린 그가 핸드폰을 내려놓으려다 말고 행동을 멈췄다.

손에 느껴진 진동 때문이었다. 방금 전까지 핸드폰을 들고 있어서인지 바로 창에 뜨는 문자를 본 대현이 눈을 깜빡거렸다.

<형 주무세요?>

발신자는 식이었다.

요 며칠 잊고 있던 이름이었다. 은호의 일부터 시작해 누구에도 털어놓을 수 없던 자신의 고민까지 돌아보느라 지친 대현이 주의를 기울이지 못한 사람이기도 했다. 멤버들과 조금의 거리를 둬야겠다고 생각한 후로 나름의 노력을 했지만, 그래도 맨날 숙소에서 마주치며 알게 모르게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던 우람과 윤성과 달리 스케줄로 바쁜 식은 그 서툰 정 떼기 작전이 적용되기 쉬웠다. 미안한 마음이 든 대현이 화면 위로 손가락을 올렸다. 멈칫하던 그가 이내 짧은 답문을 보냈다.

<아니. 넌? 촬영 중이야?>

식은 현재 광고 촬영으로 지방에 내려가 있었다. 신인상 이후 광고계를 비롯해 여러 곳에서 러브콜을 받는 그가 처음 찍는 광고이기도 했다. 무슨 광고랬지, 들었던 것 같은데. 진수가 했던 말을 떠올리려 애쓰던 대현이 포기하고는 핸드폰을 내려놓으려 할 때였다.

갑자기 시작된 진동에 깜짝 놀란 대현이 손에 든 핸드폰을 놓쳤다. 주춤했던 그가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그의 얼굴이 의아함으로 물들었다. 그 와중에도 끊길 줄 모르고 계속되는 진동에 결국 대현이 버튼을 누르고 귀에 핸드폰을 가져다 댔다.

“여보세요?”

[…….]

전화를 건 식은 말이 없었다. 혹시 잘못 걸었나. 생각해 보니 그럴듯했다. 제 기억으로는 식과 전화 통화를 한 적은 없었다. 여태껏 한 번도 해본 적 없던 전화를 갑자기 할 리가. 판단을 마친 대현이 입을 열려고 할 때였다.

[형.]

식이 대현을 불렀다. 중저음의 듣기 좋은 목소리는 식이 맞는 것 같으면서도 아닌 것 같았다. 기분이 이상했다.

“어?”

한 박자 늦은 멍청한 대답이 튀어나간 것도 그래서였다.

[……뭐 하고 계셨어요?]

“나 그냥…… 있었어.”

[아…….]

“넌?”

[저도.]

그리고 또 침묵이었다. 어색함 때문인지는 몰라도 입을 떼다가도 닫아버리는 일이 반복됐다. 식과 대화를 나눌 때 이렇게까지 어색했던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 갑자기 눈앞에 없는 그의 목소리를 듣는 일이 왜 이렇게 낯설고 또 어색하게 느껴지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건 식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숨소리만 가만히 전해오는 그를 느낀 대현이 콧잔등을 긁었다. 그러고 보니 식은 왜 전화를 한 걸까. 처음에는 잘못 건 줄 알았고, 그 다음에는 혹시 무슨 일이 생겨서인 걸까 걱정했는데. 방금 들었던 차분한 목소리는 그 두 가지 가정을 모두 부정하고 있었다.

[안 주무신다고 해서…… 전화해 보고 싶었어요.]

“아…….”

[괜찮으세요?]

마치 제 속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건너온 설명에 대현이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의외긴 했지만 아예 못할 일도 아니었다. 생각해 보면 영민도 심심할 때는 가끔 전화를 하곤 했었다. 식도 그런 경우이리라. 의문점이 하나 풀리니 마음이 좀 편해졌다. 의자에 앉은 대현이 한결 어색함이 가신 말투로 대답했다.

“나야 괜찮지. 근데 촬영장이야?”

[네.]

“촬영 되게 오래하네. 피곤하겠다, 너.”

식이 처음 촬영을 하러 간다 했던 날부터 오늘까지의 날짜를 세어보던 대현의 입에서 짧은 신음이 나왔다. 스태프들이 가득한 곳에서 몇 박 며칠 촬영을 이어나가는 건 생각만 해도 지치는 일일 것 같았다. 제가 아이돌이 아니어서 더 그렇게 느끼는 거겠지만. 식이 촬영장에서 어떤 모습으로 있을지는 모르지만, 제가 지켜본 식은 주위 환경에 꽤 예민한 편이었다. 그러고 보니 기분 탓일지는 몰라도 목소리도 좀 피곤해 보이기도 하고.

심각한 표정이 된 대현이 다음 순간 들려온 낮은 웃음소리에 움찔했다.

[그랬는데…… 이제 괜찮아요.]

웃음기가 섞인 목소리가 조근조근 귀를 울렸다. 대현이 눈을 깜빡거렸다. 식의 웃음소리를 들어본 건 처음 같았다. 평소였다면 여러 소음에 섞여 못 들었을지도 모르는 소리가, 불 꺼진 방 안에서는 지나치리만큼 잘 들렸다. 식의 웃음소리가 닿은 귀가 간지러웠다. 엉거주춤 올라간 대현의 손이 귀를 막았다. 뭐지, 방금. 스스로 이해 못 할 느낌에 귀 주위를 긁은 대현이 핸드폰을 든 손을 바꿨다.

[형. 제가 지금 있는 곳이요.]

“……어, 어. 촬영장 말하는 거지?”

[네. 촬영장].

“응.”

[여기…… 별이 잘 보이기로 유명한 곳이래요. 그래서 지금 하늘을 보고 있는데…….]

“…….”

[진짜 별이 많네요. 신기할 정도로.]

별? 다소 뜬금없는 이야기에 의아한 낯을 하던 대현은 그러면서도 발을 옮겨 창문 쪽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지후가 달아놓았던 암막커튼을 조심스레 젖히자 이 방에 들어와 몇 번 열어본 적 없던 작은 창문이 나타났다. 어둠이 가득한 방에 또 다른 색의 어둠이 스며들어 오고 있었다. 대현이 좀 더 창문에 가까이 다가갔다. 어둠 속 유일하게 빛을 내는 건 허리를 구부린 달뿐이었다. 별은 보이지 않았다.

달 외에는 반짝거리는 게 없는 하늘을 가만히 올려다보던 대현이 중얼거렸다.

“좋겠다. 여기는 별이 없어.”

[…….]

“정말 하나도 없네…….”

하나쯤은 있어도 좋을 것 같은데. 달이 좀 덜 외로워 보일 수 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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