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최애와 거리두기-77화 (77/119)

77화

지웅은 자신의 했던 말대로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대현에게 연락했다. 대현이 전화를 걸기도 전에 먼저 걸려온 전화는 지극히 그답기도 했다. 대현의 걱정을 한참 듣던 그가 대현을 익숙하게 달랬다. 자신도 가보아서 알지만 생각만큼 위험한 곳은 아니라고 말이다. 과거 여러 사례들이 있었기에 예방접종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으로 알고 있고 특히 이번에는 이전에 비해 위험한 곳도 아니라 일부러 어린 아이돌들을 데리고 가는 것 같다는 이야기였다.

위급상황을 대비하는 스태프들이 있으니 걱정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자상하게 말해오는 목소리에는 불안을 잠재우는 힘이 있었다. 무엇보다 자신이 직접 경험한 이야기를 하나둘 꺼내놓으며 걱정되면 그때 작가진들과 아직도 연락을 하니 막내들 잘 봐달라며 부탁도 해보겠다는 상냥한 말까지 건네는 그에는 더 할 말이 없었다. 민망한 목소리로 고맙다는 말을 내놓는 대현에 듣기 좋은 웃음소리를 내던 지웅은 농담까지 했다.

[윤성이는 걱정해 주는 형 있어서 좋겠네. 진수는 내가 소식 듣자마자 환호성 질렀다고 삐졌는데.]

제가 뭘 잘못한 거냐며 묻는 능청스러운 목소리에 내내 심각한 얼굴이던 대현도 결국 웃고 말았다. 고맙다는 인사를 마지막으로 전화를 끊으려던 대현이 멈칫하고는 지웅을 불렀다.

“야, 근데.”

[응?]

“강예준 있잖아.”

[왜. 걔 또 뭐 잘못했냐? 아까 헛소리하는 거 같긴 하던데.]

“……아냐. 별 이야기 안 했어. 어쨌든 고맙다. 또 연락할게.”

전화를 끊은 대현이 벽에 붙은 시계를 응시했다. 어느덧 두 시간이 넘었는데 무작정 오겠다던 예준에게서는 아직 연락이 없었다. 언제 오겠다는 건지, 어떻게 오겠다는 건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서로 폰 번호도 모르는데. 모르겠다. 뭐 그렇게 얘기했으면 알아서 오겠지. 복잡해지는 머리를 털며 생각한 게 무색하게도 곧바로 예준이 언제 어떻게 온 건지 알 수 있었다.

<사진>

<사진>

모르는 번호로 연달아 사진이 전송됐다. 의아한 낯으로 문자를 열어본 대현은 멍하니 입을 벌렸다. 첫 번째 사진은 확대하기 전에도 초코우유가 보였다. 차 안에서 찍은 사진인 듯 좌석 옆 홀더에 사이좋게 꽂혀 있는 초코우유 두 개를 확인한 대현의 입에서 힘 빠진 웃음이 튀어나왔다. 두 번째 사진은…….

“이 또라이가…….”

환하게 웃고 있는 사람보다 그의 손에 들린 커다란 곰인형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뒤의 익숙한 풍경까지 눈에 담은 대현이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옆에 걸쳐 놓은 모자를 눌러쓴 그가 현관으로 달려갔다.

“야, 너…….”

“형! 어디 가세요?”

“나 잠시만! 금방 다녀올게!”

아까부터 뭘 하는 건지 부엌에서 속닥거리던 윤성과 우람이 화들짝 놀라 돌아보는 게 느껴졌음에도 얼굴을 보고 제대로 답해줄 여유도 없었다. 신발장에 놓인 스니커즈를 아무렇게나 주워 신은 대현이 숙소를 나와 엘리베이터를 타고 밑에 내려오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예상대로 예준은 숙소 앞에 있었다. 추워진 날씨 덕에 사생들의 발걸음이 줄어들었다는 걸 감사해야 할지. 주위를 살펴 팬이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본인의 덩치만 한 곰인형을 한 팔에 낀 그는 대현이 온 것도 모르고 보도블록을 발로 툭툭 차고 있었다. 잔소리 할 준비를 마치고 그에게 다가서려던 대현이 멈칫했다.

“…….”

그의 손에서 빨갛게 타 들어가고 있는 하얀 막대를 발견해서였다. 거기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연기까지. 담배였다. 그때 예준이 고개를 돌렸다. 대현을 본 그의 입매가 시원하게 벌어졌다.

“어? 나왔다.”

다가오려던 그가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손에 든 담배를 바닥에 버리고는 발로 밟아서 지져 껐다. 떨떠름한 표정으로 지켜보던 대현이 예준에게서 나는 희미한 담배 냄새에 주춤했다. 의식하기도 전에 질문부터 튀어나갔다.

“너 담배 펴?”

“왜. 싫어?”

“……아무 생각 없는데.”

“응. 그럼 피워.”

곰인형을 옆구리에 끼고 담배를 피우는 모습도 어울리지는 않았지만, 해맑게 웃는 저 얼굴도 담배와는 매치가 안 된다. 그…… 렇구나.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인 대현이 제 앞에 내밀어진 곰인형을 멀뚱히 응시했다.

“이거…… 설마 나 주려고 산 건 아니지.”

“맞아. 왜?”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은 대현은 오늘 그와 대화해 기필코 그 기사에서 본 내용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게 아니며 특히 예준이 지금 하는 행동은 성별을 고려치 않은, 그렇기에 굉장히 이상해 보일 수 있는 행동이라는 걸 알려주기로 결심했다. 일단은 이 눈에 띄는 사람을 어딘가로 좀 데리고 갈 필요가 있다. 어거지로 곰인형을 받아 든 대현이 예준의 팔을 끌었다.

“일단 어디 좀 가서 이야기하자.”

“응. 드라이브도 하고.”

“아니. 드라이브는 무슨…… 차도 없는데.”

“나 차 있는데.”

“……저거 설마 네 차야?”

그러고 보니 아까 본 사진도 차 안에서 찍은 것 같긴 했다. 경악한 얼굴을 한 대현이 예준 뒤로 보이는 차를 멍하니 응시했다. 관리 잘 된 검은 벤츠 한 대가 그들 앞에 있었다.

“아니, 형 차. 내 차는 수리 보냈대서 형 차 훔쳐왔어.”

훔쳐왔다는 말을 보니 허락을 받지도 않은 것 같았다. 절로 나오는 한숨을 숨기지 않은 대현이 예준과 눈을 맞췄다.

“넌 정말…….”

“응?”

“아냐. 드라이브를 하든 뭘 하든…… 여길 벗어나서…… 일단 가자.”

그 와중에 에스코트까지 해주려는 건지 문을 열어주는 예준에 항의하는 것 대신 반쯤 포기한 채로 차에 타던 대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여러모로 정말 끝내주는 생일이었다.

생각보다 예준은 운전을 잘했다. 보고 있으면서도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특히 어디로 튈지 모르는 그의 성격을 고려해 봤을 때 더더욱. 그 덕분인지 차가 출발하자마자 위에 달린 지지대부터 꽉 잡았던 대현은 차에 탄 시간이 길어질수록 조금씩 긴장을 풀고 주위를 둘러볼 여유를 갖게 됐다.

그러다 시선이 멎은 건 아까 사진에서 보았던 초코우유였다. 예준의 옆모습을 슬쩍 살핀 대현이 손을 뻗어 가까운 쪽의 우유를 들었다. 오늘도 깜찍하게 꽂혀 있는 빨대는 예준의 작품임이 분명했다. 빨대를 빼낸 대현이 입안으로 내용물을 털어 넣었다. 어차피 목도 탔는데 잘됐지, 뭐. 생각해 보면 몸이 바뀌기 전에는 직접 사 먹어본 적은 없는 것 같은데 계속 먹다 보니 나름 먹을 만한 것도 같았다.

둘이 탄 차는 한강대교를 건너고 있었다. 어디를 갈 거냐는 말에 별 생각 없이 댄 선택지였지만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숙소랑 가깝기도 가깝고, 지금 시간이면 사람도 별로 없을 테니까.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한강 물을 바라보던 대현이 슬쩍 창문을 내렸다. 거센 바람이 그의 얼굴을 때렸다. 깜짝 놀라 얼굴을 피한 대현이 예준 쪽을 봤지만 흘깃 그를 보는 것 같던 예준은 별말이 없었다. 버튼을 다시 눌러 창문의 높이를 조금 올린 대현이 아까보다는 견딜 만하게 불어오는 바람 쪽으로 얼굴을 댔다.

시원했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마주친 은호부터 시작해 예상치 못한 생일상을 건넨 우람까지. 그의 머리를 끊임없이 달구던 것들이 조금이나마 식혀지는 것 같기도 했다. 조금 풀린 표정을 한 대현이 예준을 돌아봤다. 느릿한, 그러나 한숨이 묻은 질문이 나갔다.

“너 근데 이거 형 차 훔친 거랬지.”

“응.”

“혼나면 어떡하려고.”

“혼나지 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답하는 얼굴은 언제나 그렇듯 고민 따위라고는 없어 보인다. 하도 봐서 그런지 이제는 저런 모습이 아닌 그를 상상할 수조차 없다.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저으면서도 픽 웃고 만 대현이 창에 팔을 기대고 얼굴을 괬다.

“강예준.”

“응.”

“너도 고민을 해?”

한 번쯤은 묻고 싶었다. 특히 오늘 같은 날에는 더더욱. 그의 문자를 보자마자 깜짝 놀라 내려온 제가 무색하게끔, 어딘가 있을 사생 걱정도, 지나가는 사람들이 제 손에 든 곰인형을 보든 말든 태평하기만 하던 예준은 고민이라고는 없어 보였다. 여태껏 봐온 그는 늘 그랬지만 오늘처럼 그가 부러운 건 처음이었다.

“고민 때문에 울었어?”

대답 대신 돌아온 엉뚱한 물음은 예준다웠다. 친하다고 보기에는 애매한 이의 눈물에 이토록 집착할 수 있는 건 그가 이렇게 엉뚱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깨를 으쓱한 대현이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랬나.”

타인의 일을 이야기하듯 말할 수밖에 없는 건 제 마음이 어떤지 자신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고민이라고 할 것도 아니었다. 우람이 해준 미역국을 본 순간 그의 머릿속에 지나갔던 것들은 입 밖으로 내지도 못할 정도로 터무니없는 것들이었으니까.

문제는 그 터무니없는 것들이 그의 마음을 쥐어짜고 있다는 데에 있었다. 예준과 함께 있는 지금도 명치끝을 콕콕 쑤셔오는 것들이 성가셨다. 무시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

그건 자신에 관한 것만이 아니었으니까. 그를 뒤흔들고 있는 것들은 따지고 보면 제 몸에 들어간 지후와도 다 관련이 있는 것들이었기에. 그래서 대현은 말을 삼켰다. 대신 눈물이 튀어나갔다. 당황한 우람을 느끼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 통제를 잃은 눈물은 가질 수 없는 것을 가지려 하는 자신에 대한 질책과도 같았다.

네가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정대현. 네가 어떻게…… 이지후의 자리를 욕심 낼 수가 있어.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