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정글 프로그램은 아이돌 팬들의 지뢰나 다름없었다. 남자 아이돌들은 오지에 가서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다는 생각과 모험심에 제 입으로 먼저 가고 싶다는 이야기도 종종 꺼내는 듯했지만, 팬들의 입장에서는 그게 아니었다. 얼굴이 까맣게 타오는 건 기본인 데다가 다치는 경우도 종종 있었으니까.
거기다 아이돌들은 출연해서 얻을 수 있는 반응이 좋아봤자 평타를 기록하는 수준이었다. 고생한 보람만큼의 반응이 돌아오는 일이 아니란 말이다. 팬들의 속만 상하면 상했지. 당장 옆에 선 우람만 해도, 데뷔 초 인터뷰마다 그 이야기를 꺼내 팬들을 안절부절못하게 했던 대상이 아니었는가. 그때의 기억이 거짓말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듯, 부럽다는 눈빛으로 윤성을 보는 우람을 확인한 대현이 인상을 구겼다.
“진수가 추천했다고?”
“네. 거기서 또래 아이돌 중에 같이 가고 싶은 사람을 뽑으래서 절 골랐는데 자기도 이렇게 될지는 몰랐다고…….”
“김지웅도 이거 알아?”
“리더 형이요? 아마 아시지 않을까요……?”
“걔넨 언제 접종 맞으러 간대?”
“그건 저도 잘…….”
“진수 형은 어딨어?”
“저 데려다주고 다시 사무실로 가셨는데. 왜요 형?”
“아니, 형은…….”
불만스러운 투로 말하던 대현이 문장을 끝맺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무언가를 생각하는 표정을 하던 그가 곧 핸드폰을 꺼냈다. 상단에 뜬 문자 알림과 전화 기록을 깔끔하게 무시한 그가 지웅의 번호를 찾아 전화 버튼을 눌렀다. 몇 번 신호가 가고 전화가 연결됐다.
“김지웅?”
[…….]
“진수랑 윤성이랑 정글 간다며. 너 알고 있었어?”
[나 섭섭해.]
지웅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거기다 뜬금없는 소리였다. 핸드폰을 귀에서 뗀 대현이 다시 한 번 번호를 확인했다. 지웅의 번호가 맞았다. 뭐지.
[왜 나한텐 전화 안 해?]
목소리를 한 번 더 듣고서야 누군지 알 수 있었다.
“강예준?”
얜 왜 김지웅 폰을 갖고 있는 거야. 대현이 골치 아픈 표정으로 머리를 짚었다.
“네가 왜 김지웅 전화를…… 아니다. 김지웅은?”
캐물어봤자 제대로 된 대답을 얻기 힘들 것이다. 제가 아는 예준은 항상 어디로 튈 줄 모르는 사람이었으니까. 오히려 그의 페이스에 말려 전화를 한 이유는 잊고 딴소리만 한참 할 게 뻔했다. 더 묻길 포기한 대현이 곧바로 지웅을 찾았다. 곧바로 예준의 대답이 들렸으나 동시에 시끄러워진 반대편으로 인해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안 들려. 뭐라고?”
[……야, 강예준 뭐 하냐? 게임 다했으면 내놔…… 형. 코디 누나가……&^%$^#…… 야, 달라고. 아, 잠시만……*&%$&]
도대체 뭐라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말소리가 들리는 것 같긴 한데…… 인상을 찌푸리던 대현이 소음 사이에서 들려오는 말소리들을 더 잘 듣기 위해 집중할 때였다.
[여보세요?]
“김지웅?”
[어? 이지후?]
우당탕탕 무언가가 넘어지는 소리가 났다. 비명소리가 들린 것 같기도 했다. 깜짝 놀라 표정을 굳히던 대현의 얼굴이 곧 건너온 목소리에 풀렸다. 소음 사이를 뚫고 등장한 지웅의 목소리가 반가웠다. 손가락으로 이마를 쓸던 대현의 움직임이 멎었다.
옆에서 대화 내용을 듣고 있는 우람과 윤성을 확인한 대현이 눈짓을 하고는 베란다 쪽을 향해 걸어갔다. 베란다로 나와 뒷문을 조심히 닫자 유리창 너머 멈칫하면서도 따라오지 못하고 선 윤성과 우람이 보였다. 핸드폰을 쥐지 않은 손으로 전화만 하고 들어가겠다는 싸인을 보낸 대현이 밖을 향해 돌아섰다.
[웬일이야. 먼저 전화를 다 하고.]
“얘기하고 싶은 게 있어서. 근데 네 폰이 왜 강예준한테 있어?”
[아, 게임한대서 잠깐 줬지. 쟤 또 자기 폰 놓고 왔거든.]
핸드폰을 놓고 왔다고……? 폰을 안 들고 스케줄을 다닌다니 그게 가능하기나 한 일인가. 거기다 ‘또’라는 말은 그런 일이 한두 번 일어난 게 아니라는 건데…… 어리둥절한 낯을 하던 대현이 고개를 털어 생각을 몰아냈다. 이럴 때가 아니었다.
“그래. 밖이야 지금?”
[어. 라디오 방송. 대기실이야.]
“미안. 통화하기 좀 그렇겠네. 이따 다시 전화할게.”
[아니 괜찮아. 방송은 다 끝났어. 이제 숙소 가려고. 왜. 중요한 일이야?]
“그건 아닌데. 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아…… 근데 지금 사람들이 주변에 많긴 해. 통화하기 곤란한 거면 내가 숙소 가서 할게. 괜찮아?]
전화를 끊으려는 대현을 붙든 지웅은 목소리까지 죽여 말하고 있었다. 평소 전화를 먼저 하는 일이 잘 없던 대현이 전화까지 한 걸 보니 뭔가 큰 일이 있을 거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의 예상보다 일을 크게 받아들이는 듯한 지웅에 대현이 부은 눈 위를 문지르며 고민했다.
윤성이 정글에 간다는 소식을 듣고 걱정되어서 한 전화였을 뿐 별 다른 이유는 없었다. 지웅네 막내인 진수도 간다는 소식을 듣고 그가 이 소식을 아는지 궁금하기도 했고, 프로그램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모르는 저보다는 많은 걸 알 것 같기에 한 전화였는데.
곤란한 이야기까지는 아니지만 주위에 사람이 많다는 걸 보니 프로그램 욕을 하기에도 적절한 타이밍은 아닌 듯하다. 판단을 마친 대현이 지웅에게 대답했다.
“그러면 내가 좀 이따 전화할게.”
[그럴래?]
“응. 끊는다.”
[야, 잠시만!]
“어? 왜?”
[강예준이 너한테 할 말…… 미친놈아! 준다고!]
강예준이 나한테 할 말이 뭐가 있지. 또 고추 부심을 부리려고 그러나. 뜬금없는 생각이었지만 그라면 못할 것도 아니었다. 대현이 그런 터무니없는 생각을 하는 동안에도 그의 귀에는 아까 들었던 것과 비슷한 소음이 몰려들고 있었다.
우당탕탕 소리가 들리고, 지웅의 한숨 소리까지 들려왔다. 그리고 갑자기 누군가의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할 말이 있다는 예준인가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조용해도 너무 조용했다. 끊겼나? 핸드폰을 떼 화면을 확인했지만 통화시간은 이어지고 있다는 것만 확인한 대현이 고개를 갸웃할 때였다.
“여보세요? 강예준?”
[울었어?]
예준이 맞았다. 갑작스럽게 건네진 말에 놀라야 할지, 아니면 그가 침묵을 유지할 수도 있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에 놀라야 할지. 아니면…… 울었다는 걸 목소리로만 알아차린 거에 놀라야 할지.
목소리가 조금 가라앉긴 했지만 전화로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지웅에게 먼저 전화를 걸기도 했던 거고, 타인의 변화를 알아차리는 것이 습관처럼 자연스러운 지웅조차 별말이 없는 걸 보고 괜찮구나 싶었는데. 그걸 예준이 알아차렸을 줄이야. 예상치 못한 물음에 당황한 대현이 말을 잇지 못하는 동안에도 예준의 목소리는 계속해서 대현의 귓가에 내려앉고 있었다.
[누가 자꾸 울리는 거야.]
“어?”
[짜증나.]
낮게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평소 예준의 목소리 같으면서도 어딘가 그답지 않게 느껴졌다. 거기다 어딘가 낯간지럽게 들리는 내용들까지. 대현은 하려던 말도 잊고 선 자세 그대로 눈만 깜빡거릴 수밖에 없었다.
[갈까?]
예준의 당황스러운 물음이 건너오기 전까지는. 대현이 긴 잠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파드득 몸을 떨었다. 놓칠 뻔한 핸드폰을 꽉 쥔 그가 황급히 대답을 뱉어냈다.
“아니!”
[왜?]
“아니, 그게 아니라…… 어딜 온다는 거야? 왜?”
[초코우유 사줄게.]
대현의 얼굴이 황당함에 물들었다. 또 그놈의 초코우유다. 이쯤 되니 예준이 보았다는 기사가 어떤 건지 궁금할 정도다. 얼마나 잘 썼기에 애가 그 기사를 이렇게 맹신해.
그건 그렇고 말도 안 된다. 사실 저번 놀이터에서 그에게 위로를 받기는 했다만, 따로 교류도 없는 그가 제가 운다는 이유만으로 여기 오는 게 이상할 뿐만 아니라, 지금 같은 상태에서는 정신없게 굴 그를 감당할 자신도 없었다.
“초코우유는 내가 사 먹으면 돼! 그러니까…….”
[…….]
“안 와도 된다고. 너네 라디오 끝났다며. 숙소 가서 쉬어.”
[부정 안 하네.]
“어……?”
[운 거.]
“……야 그건.”
[찍었는데 맞았어.]
거기다 찍은 거였다니. 정말 할 말 없게 하네. 한숨을 쉰 대현이 고개를 저으며 창밖을 응시했다. 햇빛이 행인들 위로 내리쬐는 광경을 바라보던 그는 이제는 반쯤 포기한 상태였다. 예준과 엮이면 항상 그의 페이스에 말려들게 된다. 이건 자신이 정신을 차리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는 걸 슬슬 깨닫고 있었다.
[맞은 건 좋은 건데 나 왜 기분이 별로지.]
“……있잖아. 걱정해 주는 건 고마운데.”
[갈래.]
“왜?”
[가고 싶으니까.]
“…….”
[가면 안 돼?]
이쯤 되니 거절할 힘도 없다. 왜 이러는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말린다고 들을 사람이었으면 진작부터 이렇게 엮일 일도 없었겠지. 대현이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래라.”
[진짜?]
“오지 말래도 올 거잖아.”
[그건 그래.]
“……가끔 느끼지만 넌 진짜 막무가내로 굴어.”
[응. 알아.]
웃음기 섞인 예준의 말에 대현이 난간에 걸쳐 놓았던 몸을 조금 세웠다.
[그래야 원하는 걸 얻거든.]
“…….”
[갈게.]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도 전에 전화가 끊겼다. 황당한 표정으로 전화를 내려다보던 대현은 방금 전의 대화를 곱씹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렇다 해서 예준이 말한 원하는 것이 뭔지 알아낼 수는 없었지만. 어깨를 으쓱한 뒤 거실로 들어가던 대현의 머릿속에 짧은 생각이 스쳤다. 그러고 보니 마냥 다른 세상 사람 같이 느껴졌던 그는 상황에 따라 꽤 정상인 같은 목소리도 낼 줄도 아는 사람이었다. 놀이터에서도, 방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