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Ch 4_1. 지각)
아침의 눈물소동은 윤성의 발랄한 등장과 함께 일단락되었다. 아니, 그런 줄 알았다.
“……저기.”
“어? 왜? 물 더 먹을래? 가져다줄까?”
“형. 필요한 거 있으세요? 가져다 드릴까요?”
“아니, 그건 괜찮고. 둘 다 그만 좀 쳐다봐.”
결론은 아니었다는 이야기다. 대현이 결국 민망함을 견디지 못하고 후드 모자를 깊게 눌러썼다. 그럼에도 바짝 옆에 붙어 앉아 얼굴을 살피는 윤성과 왔다 갔다 하며 정신없게 구는 우람의 시선은 도무지 떨어질 기미가 없었다. 대현이 어색하게 시선을 피했다. 옆에서 윤성의 한숨이 작게 들려왔다. 그러고 보니 답답할 만도 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본 게 다 큰 멤버 형 둘이서 부둥켜안고 있는 모습이었을 테니. 거기다 한 명은 누가 들어온 것도 모르고 눈물이나 줄줄 흘려대고 있었다.
윤성의 존재를 눈치챈 대현이 그제야 얼굴을 가리며 자리에서 일어섰지만, 윤성이 들어오든 말든 그의 얼굴을 꽉 붙잡고 호들갑을 떠는 우람 때문에 성공적이지는 못했다. 결국 방에 들어가려다 저지당하고 둘에게 끌려와 앉은 게 지금 이 소파였다. 그리고 윤성은 여전히 대현이 왜 그러고 있었는지에 대한 설명도 듣지 못한 상태였으니 꽤 답답할 터였다. 전날 맥주까지 먹은 데다 아까 짧은 시간 동안 눈물을 얼마나 흘려댔는지 벌써 부어오르는 게 느껴지는 눈은 윤성이 일의 경위를 묻기를 더 망설이게끔 했을 거고.
“형이 그랬죠?”
그 사이에 불똥은 엉뚱한 데로 튀고 있었다. 상념에 빠져 있던 대현이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윤성의 시선은 앞의 우람을 향하고 있었다.
“뭐? 아냐. 야, 난…… 그러니까…… 아, 나 진짜 뭐 안 했어!”
“아무것도 안 했는데 지후 형 얼굴이 왜 이래요. 그리고 아까 미안하다고 말하고 계셨잖아요. 제가 들어올 때.”
“아니, 그거야! 쟤가 갑자기 울기 시작하니까!”
“그러니까 왜 울렸냐구요, 애초에!”
얼굴이 왜 이러냐니…… 많이 심각한가. 거울을 찾으려던 대현이 이내 눈앞에서 벌어진 일에 입을 떡 벌렸다. 이건 또 뭐야. 어느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윤성이 우람을 쏘아보고 있었다. 평소라면 윤성에게 밀리지 않았을 우람도 이미 1차적으로 대현의 눈물에 당황했던 데다가 처음 보는 윤성의 모습까지 접하게 되자 밀리는 기색이 역력했다.
“아니! 난 진짜 그러니까! 친구 새끼가 요리학원을! 그러니까 난 미역국이랑 계란찜밖에 안 했다고! 간도 봤는데!”
거기다 흥분하면 말을 잇지 못하는 그의 성격상 이 상황을 설명할 제대로 된 단어도 튀어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뾰족한 눈을 하고 노려보는 윤성 때문에 더 심해지는 것만 같았다.
“계란찜……? 형 요리했어요?”
“그래, 씨발! 했다, 왜!”
“……왜요? 누구 좋으라고?”
“뭐 이 새끼야?”
예상하지 못한 답이었는지 답지 않게 성을 내던 윤성이 주춤했다. 동시에 그의 얼굴에 뜬 미심쩍은 표정에 넋을 놓고 관망하던 대현의 입에서 상황에 맞지 않는 웃음이 터져 나오고 말았다. 작은 웃음소리였음에도 바로 뒤를 돌아보는 둘의 시선을 느낀 대현이 입매를 어색하게 굳혔다. 그래도 그를 대신해 정신없게 굴어준 그들 덕분인지 멍하던 정신이 좀 돌아온 것 같다. 무거운 눈 위로 손을 잠시 올렸다 뗀 대현이 몸을 일으켰다.
“윤성아. 우람이가 뭐 잘못한 거 아니야.”
“……진짜요?”
“응.”
“그럼 형 왜…….”
“아…….”
대현이 잠시 고민했다. 어떻게든 피하고 싶었던 질문이지만 더는 피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특히나 우람을 두려워하던 윤성이 자신을 지키는 치와와라도 된 양 앞에서 나서는 걸 본 이상. 병아리가 그려진 갑옷을 입은 우람에게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는 치와와를 상상한 대현이 또 웃음이 날 뻔한 걸 꾹 참고는 둘을 번갈아 응시했다.
“너무 오랜만이라서.”
“…….”
“…….”
“누가 밥 차려준 게 되게 오랜만이었거든. 나도 모르게 좀 북받쳤나 봐. 놀랐지 둘 다. 미안.”
물론 그 이유만은 아니었지만, 나름 솔직하게 털어놓은 거였다. 우람이 식탁 위로 올려놓은 국그릇에 담긴 미역국을 보았을 때의 감정을 다시 떠올린 대현이 고개를 들었다. 두 쌍의 눈을 마주한 대현이 애써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특히 우람 쪽으로 고개를 돌린 그가 늦은 감사인사를 건넸다.
“고마워. 맛있더라…… 미역국.”
“…….”
“…….”
“진짜…… 너무 맛있었어.”
생일 때마다 먹던 미역국이 그에게 더 이상 당연한 게 아니게 된 건 할머니가 돌아가시고부터였을 것이다. 할머니와 살 때만 해도 몰랐다. 누군가가 그의 생일을 기억하고 미역국을 끓여준다는 게 얼마나 큰일인지를. 그래서 병실에 누운 할머니가 제 손을 잡고 미역국에 대해 이야기했을 때만 해도, 미역국 평생 못 먹어도 되니 얼른 낫기나 하시라는 농담까지 건넸다.
그런 대현을 본 할머니는 아픈 눈을 했다. 대현아. 사람이 늙으면 마음에 하나씩 걸리는 게 있다고 하대. 난 그게 그거인 갑다. 울 손자 미역국도 못 먹을 생각하면 눈도 안 감기지 싶은데. 부러 눈을 마주치지 않은 대현은 얼른 대꾸했다. 그럼 눈 안 감으면 되잖아, 할머니.
평생 대현의 말을 놓친 적 없던 할머니는 그때만큼은 그렇다고, 그러겠노라고 대답해 주지 않았다. 한참을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결국 대현은 보온병을 씻어오겠다는 핑계를 대고 병실을 나서야 했다. 화장실로 들어가 수도꼭지를 튼 그는 보온병을 씻는 대신 참았던 눈물을 쏟았다. 행여 눈물의 흔적이 남을세라 흐르는 물에 눈을 가져다 대던 그는 다짐했다. 미역국 따위 앞으로도 평생 먹지 않겠다고 말이다. 죄 없는 미역국에 괜한 화풀이를 한 셈이었다.
다짐이 무색하게도 첫 생일날 대현은 제 손으로 미역국을 끓였다. 그냥, 그렇게 해야 될 것만 같았다. 그래야만 할머니가 정말 편하게 자신을 지켜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날 병실 속에서의 기억은 그의 가슴 속 한구석에 그렇게 지워질 수 없는 무게로 남았다. 주인이 치울 생각이 없는 추억의 무게는 늘 그의 가슴 속에 묵직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게 어언 삼 년이었다.
영민과 선우에게도 이 이야기를 꺼내본 적이 없었다. 이 이야기까지 보태지 않아도 그들은 제 삶을 어떻게든 채워주려 노력하는 이들이었다. 당장 생일 때만 해도 할머니의 빈자리를 채우려는 건지 두 배는 정신 사납게 굴었다. 대현이 결국 브레이크를 걸어야 했을 정도로 말이다. 그렇게 대현은 그 의식이라고도 할 수 없는 행위를 혼자 지속해 왔다.
오늘 우람이 제 앞으로 예상치 못한 미역국을 대령하기까지는.
“…….”
“…….”
“…….”
우람은 말이 없었다. 덩달아 입을 꾹 다문 윤성은 어느덧 대현보다 더 속상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 만들려고 한 이야기는 아니었는데. 괜히 말했나. 가라앉은 분위기를 느낀 대현이 황급히 말을 돌렸다.
“근데 윤성아. 어디 다녀온 거야? 약속 있었어?”
화제를 바꾸기 위해 꺼낸 이야기이긴 했지만 그러고 보니 정말 궁금하긴 했다. 10시에 가까운 시간에 메이크업에 머리 손질까지 한 윤성은 반짝반짝 빛이 났다. 그제야 대현에게서 시선을 돌려 윤성을 아래위로 훑어본 우람도 한 마디를 보탰다. 너 머리도 했냐?
“아…… 저 프로그램 미팅 건 때문에…….”
“프로그램? 무슨 프로그램? 어디 나가는 거야?”
대현이 윤성에게 다가서며 질문했다. 제가 알기로 윤성이 현재 고정으로 들어가는 프로그램은 없었다. 미팅이라면 프로그램에 투입 전 사전 조율 과정을 이야기하는 것이겠지. 어떤 프로그램일지는 모르지만 윤성의 방송 활동이 느는 거라면 좋은 일이다. 순식간에 제게 집중된 관심에 윤성이 눈을 빠르게 깜빡거렸다.
“아, 별건 아니고…… 그…… 진수 새끼가…….”
“응?”
“아니. 진수가. 그 예스 진수요. 걔가 정글 가는 거에 저 추천했대요.”
“정글?”
생각해 본 적도 없던 이야기에 대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저절로 미간을 모은 그가 다소 거친 말투로 반박했다.
“이 겨울에 무슨…….”
“제가 가는 데는 따뜻하다고 하긴 하던데…….”
“언제 가는데?”
“빠르면 다음 주에 갈 수도 있대요. 일정이 좀 빡빡하다고…….”
“아니, 그럼 예방접종은 언제 해? 그런 것도 말해줬어?”
“네? 아니, 그건 저도 잘…….”
몰아치듯 질문하는 대현에 윤성이 그의 눈치를 봤다. 옆에 선 우람도 덩달아 힐끔거렸지만 대현은 말을 멈출 수 없었다. 아니, 왜 많고 많은 프로그램 중 정글이야? 굳이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