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최애와 거리두기-72화 (72/119)

72화

<이지후>

<야>

<어디냐고>

<설마 너 아직도 그 친구 집이냐?>

<솔직히 말해라 너 아직 출발 안 했지>

또 우람이다. 1분 간격으로 온 문자를 본 대현이 슬쩍 인상을 찌푸렸다. 문자 간격조차도 참을성이 없는 편인 그의 성격을 보여주는 것만 같다. 근데 왜 자꾸 어디냐고 묻는 걸까. 지후와 맥주를 먹던 새벽에도 쏟아졌던 문자를 기억한 대현이 귀 뒤를 긁었다. 어디냐는 조심스러운 문자를 보내고는 친구네 집에서 자고 가겠다는 대답에 바로 귀여운 이모티콘을 보내며 알겠다고 하던 윤성과는 비교될 정도로 집요한 그에 이제는 조금 의아할 정도였다.

어쨌든 이제 곧 숙소에 들어갈 테니 뭐 때문에 이러는 건지 알게 될 터였다. 엘리베이터 계기판을 확인한 대현이 다 와간다는 문자를 보낸 후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밤새 먹은 맥주 때문인지 거울 속의 팅팅 부은 얼굴을 본 그가 멋쩍게 얼굴을 쓸었다. 그래도 아이돌인데, 너무 얼굴을 막 쓰는 건가.

띵. 도착했음을 알리는 소리에 내리던 그의 시선이 한 군데에 멎었다. 저절로 걸음이 멈췄다.

“…….”

“…….”

엘리베이터 앞 계단에 걸터앉아 있던 남자의 시선이 위를 향한다. 앞에 선 대현을 확인하자 달달 떨던 다리의 움직임을 멈추고 몸을 일으키는 얼굴은 익숙했다. 벌여놓은 일이 있으니 어떻게든 마주칠 거라 생각했던 얼굴이지만 이렇게 빠를지는 몰랐다. 그것도 이런 모습으로 마주치게 될 줄은.

조금 거리를 두고 섰음에도 느껴지는 술 냄새는 그가 밤새 뭘 했을지를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게 한다. 더군다나 충혈된 눈도. 하루 사이에 얼굴이 핼쑥해진 그는 마치 시위라도 하는 것처럼 대현의 앞에 서 있었다.

한숨을 삼킨 대현이 앞에 선 은호를 응시했다. 어젯밤 클럽에서 들었던 이야기부터 밤새 지후에게 들은 이야기가 있어서인지 곱게 볼 수가 없었지만 최대한 감정을 자제하고 마주보려 애썼다. 불화설의 진화를 위해서든 뭐든 한 번쯤 은호와 이야기를 나눠야 하는 건 맞으니까.

“밤새 여기 있었어?”

결국 대화의 물꼬를 튼 건 대현이었다. 앞에 선 은호는 여태까지 그가 했던 행동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으므로. 대현의 물음에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이 보인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그의 뒤로 보이는 무수한 담배 꽁치를 봤을 때 답은 나와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어디 있다가 이제야…….”

떨리는 목소리로 나온 그의 첫 마디에 대현은 감정을 자제하기로 한 결심도 잊고 헛웃음을 칠 수밖에 없었다. 그제야 그를 보자마자 생겼던 궁금증이 풀렸다. 왜 잘 오지도 않던 숙소에 왔나 했다. 그래도 어제 클럽에서 뛰쳐나간 자신이 어디에 갔는지 걱정은 되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한숨도 자지 못한 얼굴로 엘리베이터 앞에 앉아 기다린 그의 행동은 그가 지후에게 여태껏 내보였었던 것처럼 어딘가 섬뜩한 데가 있었다.

“그게 궁금해서 이러고 있었어? 잠도 못 잔 얼굴로, 술 냄새 풍기면서?”

그래서일 것이다.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차가운 말투가 나간 건. 흠칫하는 은호를 보았음에도 지후를 생각하니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다.

“왜? 왜 그랬는데?”

“…….”

“내가 프로듀서님한테 가서 이 노트 사실은 내 거라고 말하기라도 할까 봐?”

마주한 충혈된 눈이 흔들린다. 동요하는 그를 알면서도 멈출 수 없었다. 처음으로 제 앞의 은호가 좋아했던 그룹의 최애 멤버가 아닌, 누군가의 인생을 비참하게 만든 한 사람으로 보였기 때문에.

“말해봐, 유은호.”

“…….”

“왜. 나도 그만할까?”

결국 고개를 숙인 은호를 본 대현이 입을 다물었다. 시선을 조금 내리자 꽉 쥐어진 주먹이 보인다. 무언가를 참고 있기라도 하듯 조금씩 떨리는 주먹을 본 대현의 눈이 가라앉았다. 더 이상은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든 것도 그쯤이었다. 자신도, 은호도 너무 격앙된 상태다. 대현이 은호에게서 몸을 돌렸다. 걸음을 떼려던 그가 멈칫하고는 한 마디를 덧붙였다.

“나중에 얘기하자. 너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지금 얘기해 봤자 서로 좋은 얘기 못 나올 것 같으니까.”

역시나 대답은 없었다. 표정을 굳히고 돌아서던 대현이 현관문을 세 걸음 앞뒀을 때였다.

“……좋아해요.”

잔뜩 가라앉은 은호의 음성이 그들 사이의 거리를 메웠다.

“좋아해서 그랬어요.”

대현이 천천히 뒤돌았다. 은호는 여전히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고개를 떨어뜨린 채, 두 주먹을 피도 안 통할 정도로 꽉 쥐고 서서, 덜덜 떨리는 목소리를 내놓는 그를 보는 대현은 가장 두려워하던 시나리오가 현실이 되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지후를 대신해 그의 고백을 듣게 되는 일이 지금 일어나고 있었다.

“애초부터 그 새끼한테…… 노트…… 넘길 생각은 없었어요.”

“…….”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서…… 어쨌든 그 노트는……. 그러니까…….”

그제야 대현은 어제오늘 이야기를 들었음에도 와 닿지 않았던 사실을 실감했다. 은호가 지후를 좋아한다는 사실 말이다. 지후의 몸에 들어온 후 만난 그는 언제나 제게 퉁명스러웠다. 짜증을 내고 비꼬는 말투로 이야기하는 것은 예사고, 익숙하게 저를 무시했다.

뮤지컬 시작과 함께 바빠진 그를 자주 만나진 못했어도, 늦은 밤 욕실 앞에서 가끔 마주치던 그의 비틀린 얼굴을 기억했다. 자연스럽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싫어하는구나. 그것도 엄청. 그 눈빛을 본 사람이면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했을 거다.

하지만 지금 제 몸을 주체 못하면서도 떠듬떠듬 변명을 늘어놓는 그는, 지후에게 미움받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게 보이는 그는, 처음으로 제 감정을 솔직하게 내어놓는 것 같은 그는. 지후의 몸에 들어온 자신을 향해 세웠던 날들이 연기일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좋아해서…… 좋아해서 그랬어요…….”

더듬더듬 힘들게 말을 이어나가던 은호는 이제 중얼거리고 있었다. 처음이 힘들지, 한 번 나온 고백은 그의 입에서 마치 다짐이라도 하는 것처럼 반복되고 있었다. 대현이 그의 주먹에 두던 시선을 들었다. 그렇지만 그가 지후를 좋아한다고 저지른 일들이 좋아한다는 고백으로 상쇄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특히나 이 상황에서마저 놓지 못하는 저 이상한 집착을 생각했을 때 더는 두고 볼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말을 더듬는 그를 한 번도 재촉하지 않았던 대현이 처음으로 그의 말을 끊었다.

“그래서?”

“…….”

“네가 날 좋아하면 난 네가 내 노트 훔쳐가는 것도 이해해 줘야 돼?”

“…….”

“네가 날 좋아하면 네가 우람이랑 나 이간질하고 그러는 것도 이해해 줘야 돼? 네가 날 좋아하니까?”

은호와 눈을 맞춘 대현이 차분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그게 네가 정말 좋아하는 사람한테 하고 싶은 일이야?”

충격받은 듯한 얼굴 위로 지후의 얼굴이 겹쳐졌다. 마른 등, 수척해진 얼굴, 은호의 이야기를 하며 흔들리던 눈빛까지도. 결국 대현의 입가가 평정심을 잃고 슬픈 곡선을 그리며 무너졌다.

“너 내 방에서 노트 훔치면서…… 약통은 못 봤어?”

“…….”

“매일 잠을 못 자는 건 알았어? 조금의 빛도 못 견디게 되어버려서 방에 암막커튼까지 단 건?”

“…….”

“네가 좋아한다는 명목으로 저지른 일들. 내가…… 바라던 일이었다고 생각해?”

은호는 대답하지 못했다. 대답할 수 없다는 말이 정확할 거다.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이 없을 테니까. 자기만의 세상에 빠져, 자신만 할 수 있는 사랑이라고 생각해 저지른 일들일 테니까.

“생각해 봐. 모르는 것 같아서 말하는데, 원래 누군가를 좋아할 땐 그게 먼저야.”

“…….”

“그러고 나서도 좋아한다고 얘기할 수 있을 때. 그때 다시 얘기해.”

더 이상은 무리였다. 더 할 말도 없었다. 멍하니 선 은호를 뒤로하고 대현이 돌아섰다. 이번에는 그도 잡지 못할 것임을 알기에 나온 행동이었다. 예상대로 그는 대현을 잡지 못했고, 대현은 그의 앞에서 문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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