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저기.”
“응.”
“그거 다 먹으려고 산 거야?”
“응. 왜? 싫어?”
한 움큼 집어온 빨대를 앞에 놓인 초코우유마다 뜯어 구겨 넣던 뒤통수가 그제야 돌아본다. 몸은 그대로 앞을 향한 채 목만 돌린 예준이 대현을 빤히 응시했다. 동시에 그의 입에서 나온 말에 그네에 앉아 있던 대현이 움찔했다.
볼 때마다 느끼지만 저 해맑은 마이웨이는 적응하기가 어렵다. 어색한 웃음을 지은 대현이 예준의 시선을 피해 그의 뒤에 줄을 지어 놓인 초코우유를 멍하니 응시했다. 슬쩍 세어봐도 열 개가 훌쩍 넘는다. 저걸 어떻게 다 먹으려고…… 처음에야 누구를 주려고 그러나 싶었지만 한 개도 빼놓지 않고 입구를 뜯어 빨대를 넣어대는 걸 보니 그것도 아닌 것 같았다.
“아니. 싫다기 보단 너무 많길래.”
“많아?”
“……둘이 먹을 거면 많지.”
“둘이 안 먹을 건데?”
그럼? 제 손으로 저렇게 다 까놓은 걸 둘이 아니면 누가 먹는다는 거지. 혹시 빨대까지 넣은 저걸 다시 봉지에 넣어서 가져간다는 건 아니겠지?
다른 의미로 경악한 대현의 시선을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예준은 씩 웃어 보일 뿐이었다.
“난 안 먹어.”
‘뭐라는 거야. 그럼 저걸 나 혼자 다 먹으라고?’
머리를 짚은 대현은 결국 더 참견하기를 포기했다. 이쯤 되니 지웅이 정말 대단해 보인다. 태영이랑 진수 케어만 해도 힘들 텐데 예준까지…… 거기다 그는 그룹의 맏형이었다. 감탄을 삼키며 그네의 줄에 기대 발을 한 번 구르던 대현이 갑작스럽게 깨달은 것에 멈칫하고는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예준이 아무렇지 않게 자꾸 반말을 하는 게 거슬렸다. 지웅에게 기껏 물어봤다던 이름도 틀리고. 아까도 이지우라 불렀었지. 제 이름이 아니니 기분이 나쁘기보다는 조금 웃기기까지 한 일이었지만 반말까지 겹쳐서 생각해 보니 이게 뭐 하자는 건가 싶기도 하고. 이어진 생각의 끝에 결국 약간은 부루퉁한 질문이 튀어나갔다.
“근데 너 왜 자꾸 반말해?”
“존댓말 하는 거 좋아해?”
“아니, 그건 아닌데…….”
그렇게 물어보니 할 말이 없다. 왜냐면 대현도 딱히 존댓말을 좋아하거나 반말을 싫어하거나 하는 취향이 있는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그럼에도 방금 질문을 했던 이유는 단지 볼 때마다 해맑게 반말을 일삼는 이유가 궁금해서였다. 그러고 보니 한 살밖에 차이 안 나긴 하던데. 첫 만남에 충격을 받고 집에 돌아가며 검색해 알아냈었던 예준의 나이를 떠올린 대현이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형 대접 받고 싶어 하는 꼰대로 보였을까 봐 걱정이 되기도 했다.
대현이 그런 고민을 하는 사이에 제가 하던 작업을 마친 듯한 예준은 뒤돌아 그를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예준이 무릎에 팔을 얹은 채 반쯤 주저앉아 있는 터라 엉겁결에 그를 내려다보는 자세가 된 대현이 눈을 굴릴 때였다. 라이더 재킷 안에 있던 그의 손이 위로 올라왔다. 대현이 피하기도 전에 볼을 크게 한 번 쓸어내리는 손은 대현의 생각보다 훨씬 컸고, 또 따뜻했다. 볼에 스친 온기에 표정이 흐트러졌다.
대현이 눈을 깜빡거렸다.
“여기.”
어리둥절한 시선이 예준의 얼굴에 닿았다가 그가 제 무릎 쪽으로 내민 초코우유로 향했다. 결국 어색하게 받아 든 대현이 손등으로 방금 예준이 닦아냈던 볼을 쓸었다. 약간의 축축함이 느껴진다. 아까 흘린 눈물이 묻어 있었던 모양이다. 민망함에 괜히 헛기침을 한 대현이 빨대를 어색하게 물었다. 대현의 옆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던 예준이 불쑥 입을 열었다.
“존댓말 하는 거 싫은데 난.”
“아…….”
“거리감 느껴지잖아.”
처음이었다. 그가 저런 진지한 얼굴을 한 건. 제대로 본 게 맞나 확인하기도 전에 다시 뒤돈 예준은 쭉 놓인 초코우유들 사이에서 하나를 집어 들고 있었다. 초코우유를 양손으로 꼭 모아 쥐고는 대현이 잘 먹는지 관찰하는 얼굴에는 어느덧 그 특유의 해맑음만이 묻어 있었다.
표현은 못 하겠지만 뭔가 어색한 기분이었다. 평소였으면 헛소리를 해댔을 예준도 답지 않게 입을 꾹 다물고 있었기에 더했다. 올려다보는 시선을 피하려 애쓰며 대현이 화제를 돌렸다.
“근데 왜 초코우유야? 다른 우유도 많잖아.”
다행히 노력은 성공적으로 먹혀든 모양이었다. 예준이 허공에 시선을 던졌다. 곰곰이 생각하는 듯한 표정을 짓던 얼굴이 뱉어낸 말은 평소의 그만큼이나 엉뚱했다.
“그게 제일 효과가 좋대.”
“……누가?”
“어떤 기자가.”
불친절한 설명이었지만 대충 조합해 보면 어디에 초코우유를 먹는 게 좋다는 기사라도 뜬 모양이다. 나름의 결론을 낸 대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지 뭐. 사라졌다가 나타난 그가 초코우유가 잔뜩 든 빵빵한 봉지를 들고 올 때만 해도 당황스러웠지만, 이렇게 먹다 보니 그렇게 나쁜 것 같지도 않고. 달긴 엄청 달지만. 다 먹었다는 걸 알려주는 빨대 소리에 바로 제 앞으로 불쑥 건네진 초코우유를 받아 든 대현이 예준을 흘끔거렸다.
“저기…… 고마워.”
조금은 어색하고 쑥스러운 인사가 튀어나갔다. 초코우유를 향해 또 돌려지던 등이 멈칫하고는 대현을 돌아본다.
대현은 바보가 아니었다. 비록 예상치 못한 곳에서 이렇게 만나게 된 건 놀라웠지만, 뒤에서 일행들이 불러대는 것도 무시하고 제 손을 이끌어 공원에 데려다놓은 건 딱 봐도 좋아 보이지 않는 제 상태 때문이었을 것이다. 얼굴을 빤히 보다가 놀이터 앞 슈퍼의 음료 코너를 탈탈 터는 이해 안 되는 행동을 하긴 했지만, 그는 엉망인 얼굴을 보고도 무언가를 묻거나 하지 않았다.
속이야 알 수 없지만 그래도 그가 저를 위해 원래 하려던 일도 포기하고 함께 있어주고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눈치챘겠지만…… 우울했거든. 덕분에 좀 나아진 것 같아.”
“…….”
“그러니까 이제는 그만 가봐도 돼. 사람들 기다리겠다.”
아까 뒤에서 성난 음성으로 그를 불러대던 사람들까지 고려해 건넨 말이건만 말없이 마주보는 얼굴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괜히 오버했나 하는 생각에 뻘쭘하게 그네에서 일어난 대현이 그의 어깨에 어색하게 손을 얹으려 할 때였다.
“또 해줘.”
“……어?”
“한 번만 더.”
갑자기 훅 커진 예준이 말했다. 몸을 일으킨 덕에 둘 사이의 거리가 좁혀졌다. 손바닥 한 뼘 사이의 거리를 남기고 다가온 얼굴에 대현이 눈을 빠르게 깜빡거렸다. 몰랐는데 나란히 서니 키가 꽤 컸다. 방금 전까지 제가 내려다보았던 얼굴이 슬쩍 턱을 내리고는 제 얼굴을 살피고 있었다.
뭘 또 하라는 걸까. 방금 제가 했던 행동을 돌이켜 봐도 특별한 건 없었다. 대현이 한쪽 눈썹을 찡그렸다. 자리에서 일어났고, 그 다음에는 어깨에 손을 얹으려다 갑자기 일어난 그 때문에 실패했고. 또 뭘 했더라. 기억해 낼 때까지 쳐다보겠다는 듯 바라보는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머리를 긁적거린 대현이 기억나는 문장을 하나씩 던졌다.
“가봐도 돼……?”
“그거 말고.”
“사람들 기다리겠다……?”
“…….”
“고마워?”
물론 두 번 틀렸지만 세 번째에는 맞춘 모양이다. 말을 뱉자마자 만족스럽다는 표정이 된 얼굴을 보며 대현은 고맙다는 말이 두 번이나 듣고 싶은 말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했다. 물론 고민은 길지 못했다. 제 목을 끌어안은 손 때문이었다. 예고 없는 격한 포옹에 대현의 코가 예준의 어깨에 부딪쳤다. 아. 얼빠진 신음을 내어놓던 대현이 멈칫했다.
“그 사람 나보다 고추 커?”
……이건 또 무슨 또라이 같은 소리지.
그의 품을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도 잊을 만큼 경악한 대현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의 머리 위로 턱을 올려놓은 예준은 조금의 미동도 없었다. 머리를 굴리고서야 대현은 그제야 예준이 칭하는 그 사람이 절 우울하게 만들고 결국 눈물까지 뽑아낸 사람을 뜻하는 거라는 걸 유추해 낼 수 있었다.
“아니면 속상해하지 마.”
대현의 표정이 멍해졌다. 삼 초 후, 뒤늦게 이해한 그의 입을 가르고 나온 건 그게 무슨 개소리냐는 말이 아닌, 웃음소리였다. 하, 하…… 하하……. 하하하하. 갑자기 너무 많이 웃은 탓인지 생리적으로 눈에 고이는 눈물을 닦아내던 대현이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대꾸했다.
“너 고추부심 개쩐다.”
한결 나아진 목소리를 듣고서야 목을 놓아주는 장난기 어린 얼굴을 보며 대현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눈앞의 이상한 남자 덕분에 그래도 조금은 덜 우울한 밤이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