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최애와 거리두기-67화 (67/119)

67화

‘그만하라고?’

‘이제 와서?’

그런 이상한 말을 듣지 않았다면 대현도 그의 예상대로 움직였을지도 모른다. 그의 눈빛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지후가 그에게 무엇을 했길래 저런 원망하는 눈빛을 하는 걸까.

찜찜함을 안고 숙소로 돌아와 방에 들어서던 대현이 멈칫했다. 그의 시선이 책상 한 구석에 놓인 지후의 노트들로 향했다. 번호가 매겨진 노란 노트들을 훑던 대현은 순간 멈칫했다. 대현은 황급히 노트 한 권을 뽑아 들었다. 커버 밑의 표지를 확인한 그의 표정이 구겨졌다.

고기를 먹으러 나가자고 할 때 유은호의 두 손은 비어 있었다. 즉, 그가 대현에게서 뺏어가듯 가져간 노트는 아직 그의 방에 있을 거란 이야기였다. 아마 대현이 같은 행동을 반복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에서 기인한 행동이었을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그가 아는 이지후는 그렇게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겠지.

저절로 걸음은 은호의 방으로 향했다. 방문을 거칠게 열어젖힌 대현이 곧장 침대 쪽으로 걸어가 침대와 벽 틈 사이로 손을 뻗었다. 그러나 아까와 달리 손에 잡히는 건 없었다. 방 안을 눈으로 훑던 대현의 시선이 옷장으로 향했다.

옷장의 마지막 서랍에서 대현은 노트를 발견할 수 있었다. 넓은 수납공간에도 불구하고 검은색 티셔츠 쪼가리 하나만 나뒹구는 곳 옆에 노트가 놓여 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주워 든 대현은 그만 눈을 질끈 감을 수밖에 없었다. 익숙한 디자인의 노트. 그리고…… 속지를 펼쳐 안에 적힌 이니셜을 확인한 그가 입술을 깨물었다. 혹시나 해서 지후의 방에서 챙겨온 노트를 펼쳐 비교를 마친 그의 표정이 가라앉았다.

그 길로 달려온 곳이었다. 매니저 형에게 전화해 유은호의 행방을 물어, 여기까지 왔다.

진수를 재촉해 클럽으로 달려온 보람이 없게 내내 머릿속을 가득 채우던 물음에 대한 답은 그를 마주하기도 전에 알 수 있었다. 방음이 잘 되지 않는 화장실 문 앞에 선 대현은 허탈한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 내가 다시 훔쳐왔어.”

쉬운 길을 어렵게 간다. 은호가 해체 보류를 알리는 제게 했던 말이었다. 지후의 행세를 한 지 이틀도 되지 않았을 때라 은호가 말하는 쉬운 길, 어려운 길이 뭔지 알 수가 없었다. 단지 부정적인 뉘앙스를 봤을 때 제가 해체를 막기 위해 했던 행위가 그가 갈 예정이었던 쉬운 길을 막았으리라고 예측할 수 있었을 뿐.

그가 꽁꽁 감추고 있었던 지후의 노트. 방금 들은 프로듀서와의 대화. 이제는 그 쉬운 길이 뭔지 조금 알 것도 같았다.

“아, 엄밀히 말하면 훔치는 건 아니겠구나.”

“…….”

“내 거니까.”

창백한 얼굴의 은호에게서는 답이 없었다. 제가 해놓은 기상천외한 짓은 잊기라도 한 듯 충격받은 표정을 짓고 선 그가 이보다 더 모순적으로 보일 수 없었다. 날선 말을 더 뱉으려 입가에 힘을 주던 대현이 멈칫했다. 힘없이 팔을 늘어뜨린 은호의 손목에 걸린 팔찌가 눈에 들어왔다.

‘예쁘다.’

‘…….’

‘팔찌요.’

의식하기도 전에 어느 여름의 기억이 그의 머릿속으로 끼어들기 시작했다. 팬서비스의 일종이라고 생각했으면서도 다음 팬싸 때 같은 팔찌를 선물했던 바보 같던 자신의 모습마저 함께 떠올랐다. 기억 속의 자신은 웃고 있었다. 기대하고 있었다. 이 팔찌도 그가 예쁘다고 생각해 주길 바랐다.

끔찍했다. 하필 그 기억을 지금 떠올려서 뭘 하겠다고. 이를 악문 대현이 고개를 돌렸다.

플러그의 덕질을 하며 느낀 건 새롭게 유입되는 팬들만큼이나 빠져나가는 팬들도 많다는 것이었다. 특히나 플러그의 경우에는 전자의 속도보다 후자의 속도가 배로 빨랐고 그 이동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그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이 덕질을 그만한다는 것을 드러냈다. 이른바 ‘탈덕’의 과정이었다. 팬카페 탈퇴, SNS 계정 폭파, 굿즈 되팔기 등 사람의 특성에 따라 방법은 달랐다.

대현이 콘서트에서 만나 친해졌던 윤지도 그랬다. 플러그 관련 떡밥이 생길 때마다 대현에게 알려주곤 했던 그녀는 어느 날부터 점점 연락이 뜸해지더니, 이내 대현의 눈치를 보며 제가 더는 플러그를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 선언했다. 음료를 한 잔씩 두고 앉은 카페, 공통의 관심사를 잃은 둘은 어색하게 서로를 응시했다. 운을 뗀 그녀의 입에서 탈덕의 이유가 술술 튀어나왔다. 당황한 낯으로도 고개를 끄덕이며 듣던 대현은 한 가지 질문을 했다.

‘언제 알았어?’

‘네?’

‘더는 안 좋아하는 것 같다는 거. 느낌이 와?’

당시 그가 가장 궁금했던 것이기도 했다. 그들의 앨범을 구매하고, 스트리밍을 돌리고, 사진을 찾아보는 자신을 보고 있자면 한 번씩 들던 생각이기도 했다. 언제까지 이 그룹을 좋아할 수 있을까. ‘덕질’이라는 행위가 처음이던 그이기에 가질 수 있는 의문이기도 했다.

예상치 못했던 질문이었는지 미간을 모으고 곰곰이 생각하던 윤지는 이내 어깨를 으쓱했다.

‘그냥. 그냥 알게 돼요.’

참으로 싱거운 대답이었다. 사랑에 빠진 순간을 묻는 말에 그냥 알게 돼요, 라고 대답하는 것과 뭐가 다르단 말인가. 대현이 어색하게 웃었다. 음료를 휘젓던 그녀가 무심하게 덧붙였다.

‘모를 수가 없죠. 오빠도 겪어 보면 제 말이 뭔지 금방 알걸요.’

공감하지는 못했지만 대현은 고개를 끄덕였고, 둘은 곧 자리를 떴다.

까맣게 잊고 있던 그날의 말들이 갑자기 떠오른 건 우연이 아니었다. 그 말이 맞았다. 그 순간에는 그냥 알게 된다. 하지만 그녀는 이렇게 갑자기 눈물이 날 수도 있다는 것까지는 말해주지 않았었는데.

눈으로 급작스럽게 몰려오는 열기에는 방법이 없었다. 대현이 결국 한 걸음 물러섰다. 노트로 모자 밑 얼굴을 가린 그가 잠긴 목을 티내지 않기 위해 목소리를 쥐어짜냈다.

“어디 한 번 잘해봐.”

다 네가 자초한 거니까. 노트로 얼굴을 가렸기에 앞에 선 그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몸을 돌린 대현이 황급히 자리를 떴다. 그는 어느새 복도를 뛰고 있었다. 복도를 여러 개 지나자 들어왔던 입구가 나왔다. 사람들이 몰린 입구로 다가간 그가 황급히 고개부터 숙였다.

“어…….”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고개를 너무 숙인 탓에 지나가는 사람을 보지 못해 여러 번 부딪쳤다. 턱 밑으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낸 대현은 중얼거리듯 그들에게 사과했다. 간신히 클럽을 빠져 나온 대현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는 다시 뛰기 시작했다.

어디로 가고 있는지는 뛰고 있는 대현도 몰랐다. 하지만 뛰어야 했다. 그건 확실히 알았다. 잠시라도 멈춘다면 또 꼴사납게 울어댈 것만 같았다. 그 탓에 그의 발은 갈 곳을 모르면서도 뜀박질을 이어가고 있었다. 어디든 가야 했다. 유은호를 생각나게 하지 않는 곳이라면 어디든 좋을 것 같았다.

“이지우.”

멍멍했던 귀가 뚫린 게 그쯤이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뚫고 들어온 누군가의 목소리가 이상하게 익숙했다. 대현이 멈칫한 사이 어깨를 잡은 손은 그를 돌려세우기까지 했다. 대현은 방금 제가 처해 있던 상황을 잊고 눈을 동그랗게 뜰 수밖에 없었다.

“왜…… 하아…… 도망을 가고 그래.”

“너…….”

“잡고 싶게.”

경악한 시선을 윙크로 받아치는 얼굴이 천연덕스러웠다.

사람이 너무 놀라면 말이 안 나온다니. 정말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몇 시간은 더 흘려댈 것 같았던 눈물도 뚝 멈춘다. 축축한 속눈썹을 깜빡인 대현은 앞에 선 해맑은 얼굴을 보며 멍하니 입을 벌렸다.

“오랜만에 뛰었더니 심장이…… 만져 볼래?”

거짓말은 아닌 듯 가슴팍이 다소 빠른 속도로 오르락내리락하는 게 보인다. 내렸던 시선을 다시 얼굴 부근으로 올린 대현은 여전히 제가 아는 얼굴이 맞나 생각하며 기억 속의 그와 앞에 선 얼굴을 대조해 보고 있는 중이었다. 제 손을 잡아 가슴에 올려놓는 그를 가만히 둘 정도로 정신이 없었던 그가 이내 느껴진 이상한 감촉에 제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이게 뭐 하는……?!”

“엄청 빨리 뛰지.”

손을 빼며 뒤로 물러선 대현을 보고도 아랑곳 않고 제 할 말만 하는 얼굴은 생글생글 웃기까지 하고 있다. 얼떨떨한 상태로도 대현은 인정해야만 했다.

“강예준?”

제 앞에 있는 사람이 불과 일주일 전 자신을 경악하게 했던 또라이가 맞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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