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얼굴을 굳힌 은호는 어렵사리 되찾은 이성을 발휘하여 상황을 정리했다. 어찌되든 노트만은 안 된다. 방법을 찾아야 했다. 일단은 여길 나가 해결방안을 모색해 봐야 할 것 같았다.
앞머리를 쓸어 넘긴 은호가 문을 열었다. 문 앞에 선 이에 자연스레 몸을 피해 지나가려던 그가 걸음을 떼지 못하고 자리에 멈춰 섰다. 그의 눈이 흔들렸다. 시선이 멈춘 곳은 문 앞에 서 있던 남자였다. 방금 찾은 이성이 무색하리만큼 그를 흔드는 존재이기도 했다.
“너…….”
부들부들 떨면서도 한 글자씩 힘주어 내뱉는 이는 그가 이 모든 걸 가장 숨기고 싶었던 사람이었다. 그의 손에 들린 노트도 그가 가지고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정말…… 쓰레기구나.”
제 표정이 무너져 간다는 걸 느끼면서도, 은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의 세계가 조각나고 있었다. 세계의 주인은 눈앞의 지후였다.
* * *
“병신들.”
밀대 자루를 조심성 없이 바닥 위로 문지르던 은호가 중얼거렸다. 착실하게 바닥을 닦고 있는 몸과 다르게 벽에 붙은 얼굴들을 차례대로 훑는 어린 얼굴에는 명백한 비웃음이 떠 있었다. 제 또래들의 얼굴이 사방에 붙어 있는 넓은 연습실에는 그 혼자였다. 열두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이니 그럴 만도 했다. 그래도 연습을 포기하고 꾸준히 매달린 덕에 연습실의 한 바닥을 까맣게 물들인 콜라의 흔적은 점점 지워지고 있는 중이었다.
물론 옷에 묻은 얼룩은 그렇지 않을 것 같았지만. 잠시 제 윗옷을 내려다본 은호의 눈이 까맣게 물들었다. 구석에서 스트레칭하던 제게 다가와 실수인 척 콜라를 뿌려대고, 치워야 하는 거 알지? 라며 얄밉게 덧붙이던 얼굴들을 생각하니 이가 갈렸다.
텃세. 요약하자면 그랬다. 은호가 들어온 지 이제 겨우 2주였다. 첫날 인사하는 제게 돌아오는 시선들이 호의적이지 않았다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 노골적으로 사람을 괴롭힐 줄은 몰랐다. 하여간 다들 유치하기 짝이 없었다.
따돌림에 슬프다거나 외롭다거나 그런 감정을 느끼는 건 아니었다. 굳이 왜? 덜 큰 애들의 먹잇감이 되는 거에 슬퍼하는 것 말고도 세상에는 슬퍼할 일이 많다. 예를 들어, 눈을 낮춰 들어온 이 소속사에서마저 데뷔하지 못하게 된다거나 그런 게 정말 슬픈 거지. 이런 코흘리개들의 싸움이 아니라.
하지만 슬프지 않다고 해서 그게 불편하지 않다는 건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면 성가셨다. 하루도 빼놓지 않고 다양한 형태로 돌아오는 괴롭힘은 슬슬 은호를 한계로 몰고 있었다.
참자, 유은호. 너 이것보다 더한 것도 겪었어. 여기서 무너질 거야? 습관처럼 스스로를 채찍질한 그가 밀대를 내려놓고 기지개를 켰다. 시간이 시간인지라 자꾸 몸이 둔해지고 있었다. 안 될 일이었다.
당장 월말평가가 다음 주다. 회사에서 새로운 남자 그룹을 내놓을 거라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빠른 데뷔를 우선순위로 둔 은호가 이 소속사를 선택한 이유이기도 했다. 테이블에 앉아 설득하던 안경 쓴 여자를 떠올린 그가 거울로 보이는 제 얼굴을 쓸었다.
‘기대가 커요. 저희 다.’
그렇다면 그 기대에 보답해 드려야지. 밀대를 화장실에 돌려놓고 온 은호는 바닥을 한 번 더 체크했다. 이 정도면 된 것 같다. 물기가 좀 있긴 하지만 곧 마를 테니.
성의 없이 어깨를 으쓱한 그가 연습실 입구로 걸어갔다. 그래도 이 시간대에 혼자 남아 있는 것의 장점은 이렇게 누구의 방해도 없이 마음대로 연습할 수 있다는 거다. 스피커에 연결된 기기로 음악을 재생하려던 그가 문이 열리는 소리에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었다.
마찬가지로 은호를 발견한 얼굴이 조금 굳어졌다. 자신을 바라보는 얼굴을 확인한 은호가 기억을 더듬었다. 어딘가 익숙한데, 저 새끼. 아. 그래. 이지후랬나?
연습생 모두가 은호를 괴롭히는 건 아니었다. 연습생들은 직접 다가와 텃세를 부리는 이와 직접 괴롭힘에 관여하진 않아도 도와줄 생각은 없어 보이는 이로 나뉘었는데, 굳이 따지자면 저 얼굴은 두 번째에 속했다. 아까만 해도 콜라를 맞고 선 자신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던 그를 떠올린 은호가 흥미를 잃고 고개를 돌렸다.
바닥을 삼십분 동안 닦아낸 입장으로서 첫 번째에 속하는 자라면 주먹이라도 한 방 날려줄 마음이 있지만, 두 번째에 속한 사람한테까지 나눠줄 관심은 없었다. 그건 그쪽도 마찬가지인지, 잠깐 멈칫한 그는 어느덧 은호의 반대쪽으로 걸어가 짐을 풀고 있었다.
곧 은호가 재생한 음악이 연습실을 쿵쿵 울려댔다. 들고 있던 기기를 내려놓고 거울 앞으로 다가간 은호가 목을 스트레칭했다. 팔을 교차시켜 푸는 과정에서 콜라가 묻은 티셔츠가 만져졌지만 무시하려 애썼다. 이 정도 찐득거림은 참을 수 있다. 아니, 참아야 한다. 주문이라도 거는 것처럼 중얼거린 그가 아까 연습 중 막혔던 부분부터 시작하려 할 때였다.
휙.
“……뭐야?”
은호가 인상을 구기며 뒤돌았다. 무의식적으로 제게 던져진 것을 잡긴 했다만, 뜬금없이 물건을 던진 이를 향한 시선이 사나웠다. 눈빛을 받고 선 이는 태연했다.
“너 미쳤냐? 갑자기 물건은 왜 던지고 지랄이야.”
평가를 수정할 필요가 있겠다. 이지후는 두 번째가 아니라 첫 번째 쪽이었던 모양이다. 심지어 이미 실컷 당하고 혼자 남은 사람에게까지 굳이 찾아와 물건을 던져 대는 건 그들보다 더 나빴다.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헛웃음을 지은 은호가 얼떨결에 잡았던 것을 확인도 하지 않은 채 바닥에 내팽개쳤다.
“지긋지긋한 새끼들. 아주 돌아가면서 지랄을…….”
예상치 못한 상황에 자연스레 입이 거칠어졌다. 분노에 숨을 거칠게 내쉬던 은호가 무시하자는 말을 되뇌며 다시 연습을 이어가려 할 때였다.
“갈아입어.”
방금 전까지 무시하자고 염불을 외던 사람답지 않게 은호는 그 말을 듣자마자 뒤돌 수밖에 없었다. 제 할 말은 끝났다는 듯 연습실 입구로 걸어가고 있는 뒷모습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가 건넸던 말도 마찬가지였다.
그제야 은호의 시선이 방금 바닥 위로 내팽개쳤던 것에 닿았다. 무늬 없는 검은 티셔츠가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잔뜩 힘을 주어 던진 탓에 아무렇게나 구겨진 그것을 내려다보던 은호가 급히 고개를 들었지만 이미 그는 사라진 뒤였다. 은호의 입에서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이상한 새끼네, 저거.”
한 번 의식하게 되자 두 번은 쉬웠다. 여태까지 누군가를 이렇게 의식하고 싶은 걸 어떻게 참았나 싶을 정도로. 신기할 정도였다. 홀렸나 싶기도 했다. 그럴 만도 한 게 새로이 내보일 남자 그룹에 들어갈 멤버 선출과 관련된 평가 시간에도 은호가 한 시도 놓치지 않으려 바짝 긴장하고 좇는 건 제 경쟁자들이 아닌 멀찍이 선 자의 뒷모습이었다. 스스로도 알 수 있었다. 이건 저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그러는 사이 어느덧 평가는 얼추 끝난 모양이었다. 평가가 진행되는 내내 이야기를 나누며 지켜보고 있던 팀장들 중 하나가 걸어 나와 연습생들 앞에 섰다.
“재연, 하늘, 필, 성우는 따라오고. 다들 수고했어.”
5초도 안 되는 사이에 저렇게 쉽게 모든 게 결정되어 버린다. 이 바닥이 원래 그런 걸 아니까 새삼스럽지는 않았다. 순식간에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 호명된 연습생들이 팀장들을 따라 나갔다. 조그맣게 시작된 웅성거림이 이내 연습실을 덮기 시작했다. 기대하고 있었던 듯한 몇몇 연습생들은 눈물을 터뜨렸고, 그들을 달래주는 무리, 그리고 욕을 뱉기 시작한 무리들로 반응이 갈렸다.
평소였다면 은호도 그중 하나의 행동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아마 욕이란 욕은 다 했겠지. 계약을 할 때 마주앉았던 안경 쓴 여자를 따라 나가 감정에 호소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 대신 은호는 등 뒤로 팔을 짚은 채 어딘가를 지긋이 바라보고 있었다.
시선에 걸린 뒤통수는 어딘가 실망한 것 같기도 했고 동시에 아무렇지 않아 보이기도 했다. 조그맣게 움찔대던 등이 결국 일어나 자리를 뜨는 것을 눈으로 따라가던 은호가 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연습실 구석에 놓아두었던 가방을 열자 며칠째 가지고 다녔던 옷이 드러났다. 몇 번을 빨았으면서도 다시 코를 박아 냄새를 확인한 그가 티셔츠를 잡았다.
그를 발견하는 건 쉬웠다. 상대적으로 후진 시설 탓에 연습생들이 꺼리는 화장실을 그가 자주 찾는다는 건 며칠째 이어진 관찰로 파악하고 있었다. 들어가자마자 마주한 얼굴이 젖어있었다. 눈물 때문은 아니었고 세수를 한 듯했다. 그럼에도 눈이 마주치자마자 걸음을 살짝 뒤로 물리는 얼굴은 무언가를 들키기라도 한 표정이라, 은호는 부러 더 모른 척 눈을 접어 웃었다.
“이거.”
“…….”
“감사했습니다. 그때.”
은호가 내민 티셔츠로 시선을 내린 그의 속눈썹이 나풀거린다. 은호에게만 보일 정도로 살짝 고개를 끄덕인 그가 손을 뻗었다. 남자치고는 하얀 손이 시야에 들어왔다. 은호는 이상하게도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물기가 묻은 손이 그렇게 야해 보일 거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으니까.
이상하게 바라보는 시선을 눈치채고서야 정신을 차린 은호가 들고 있던 옷을 그에게 넘겼다. 옷을 받자마자 볼 일이 끝났다는 듯 나가는 뒷모습을 보면서도 은호는 입을 달싹거리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분명 이 상황에 대비해 할 말을 많이 생각해 놨던 것 같은데 이상하게 하나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방금 본 지후의 손만이 맴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