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최애와 거리두기-64화 (64/119)

64화

“가게?”

“어.”

“내려가면 연장 좀 해주고 가. 나 더 자고 가려고.”

“어.”

대답할 필요가 없는 메시지들이 여러 개. 감흥 없는 눈으로 하나씩 지워나가던 은호가 침대에서 일어섰다. 몸을 구부려 침대 밑에 떨어진 옷가지들을 주워 입는 행동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등을 보이고 서서 단답만 내놓는 그는 당장이라도 이곳을 뛰쳐나갈 준비가 된 듯했다. 침대의 남자에게서 불만스러운 음성이 튀어나온 건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야, 유은호.”

“왜.”

음성에 묻어나는 삐딱함을 눈치채지 못했을 리도 없는데, 여전히 돌아오는 대답은 성의가 없었다. 이쯤 되면 그냥 관심이 없는 거다. 재형이 결국 헛웃음을 지으며 담배를 집어 들었다. 불러놓고 말이 없는 재형이 이상했는지 그제야 몸을 돌리는 정성을 보인 얼굴은 무표정했다.

“피차 가볍게 즐기는 사이에서 이런 말 하는 거 웃기긴 한데.”

“…….”

“나랑 있을 땐 다른 사람 생각 좀 작작 했으면 좋겠는데. 매너 아니냐, 솔직히.”

빙글빙글 웃으며 한 말이지만 눈빛은 그렇지 못했다. 날카로움이 묻어나는 재형의 눈을 마주하던 은호가 픽 웃으며 고개를 떨궜다. 벨트를 마저 채우는 손길은 방금 들은 이야기에 조금의 신경조차 쓰는 것 같지 않다. 재수 없는 새끼. 입에 넣은 필터 끝을 질겅질겅 씹으며 재형이 읊조렸다.

“웃긴 걸 알면서 굳이 하는 의도가 뭐야?”

한참을 지나서야 대답을 내놓는 얼굴은 제가 하고 있는 말이 무슨 말인지도 모르는 것처럼 건조했다. 정사의 흔적이 남은 침대를 무감각하게 훑은 그가 재형과 눈을 맞췄다.

“싫으면 관둬.”

“…….”

“싫다는 사람 붙잡고 하는 취미 없으니까.”

삐딱한 미소를 달고 내뱉은 말을 끝으로 그가 뒤돌았다. 쾅. 문이 닫힌 소리가 들리고서야 헛웃음을 내놓을 수 있게 된 재형이 재떨이에 담배를 눌러 껐다. 바로 다음 담배를 찾아 무는 얼굴에 비스듬한 미소가 걸렸다.

“싸가지 없는 새끼.”

뭐, 그게 매력이긴 하다만.

주차장으로 내려가며 마저 확인한 핸드폰에는 역시나 흥미로운 게 없었다. 주차장으로 통하는 마지막 문을 남겨두고 선 은호가 그제야 깨달은 것에 앞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겼다. 그러고 보니 차를 안 가져왔다. 습관처럼 발을 옮겨 멍청하게 여기까지 내려온 자신에게 혀를 찬 은호가 주머니에 손을 넣고 다시 계단을 올랐다.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한 것도 그쯤이었다.

웅웅거리는 진동 소리가 한참 전에 몰아냈던 술기운을 다시 소환하기라도 할 기세로 두통을 유발했다. 인상을 찌푸린 은호가 발신자를 확인했다. 화면에 뜬 이름을 확인하자마자 그의 얼굴 위로 귀찮은 기색이 비쳤다. 그 와중에도 전화는 일부러 받지 않는 은호를 아는 것처럼 울려대고 있었다. 지긋지긋한 새끼. 인상을 쓰며 중얼거린 은호가 전화를 받았다.

“네, 형. 아, 저 뭐 그냥 있었어요. 네. 뮤지컬은 어제 끝났죠. 아. oo클럽이요.”

자기가 프로듀서면 프로듀서지 클럽까지 따라가서 수발까지 해줘야 돼? 사람을 이리 오라 저리 오라 하는 데에 재미라도 붙인 것처럼 구는 그가 성가셨다. 그래도 아직은 놓을 수 없는 줄이었다. 판단을 끝낸 은호가 공손한 목소리를 꾸며냈다.

“네. 지금 출발할게요.”

시계를 확인한 그가 걸음을 옮겼다. 호텔을 나서자마자 맞이한 어둑어둑한 풍경이 그의 무표정한 얼굴 위로 이질감 없이 맞물렸다.

“담배는.”

“괜찮아요.”

“뭐야. 너 이번에는 꽤 버틴다?”

의외라는 듯 바라보는 시선에 대답 대신 웃어 보인 은호가 줄지어 들어오는 안주와 술을 따분하게 훑었다. 겉으로 드러내고 있지는 않았지만 그는 사실 이 자리가 지루했다. 매번 같은 패턴으로, 같은 시간까지 이뤄지는 자리는 즐거움보다는 피로감이 컸다. 오늘 같은 상황에는 특히나 그랬다. 지워지지 않는 이를 털어내기 위해 대낮부터 질펀하게 즐겼음에도 딱히 나아진 게 없었다. 그새를 못 참고 불쑥 떠오른 얼굴에 은호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럼 이제 솔로앨범 다시 작업하는 건가?”

“뭐. 일단 상황을 봐야죠.”

“흠. 상황을 본다라…….”

비록 신인 프로듀서들에 밀리고 있다고는 해도 유니버스 대표 프로듀서라는 직책을 달고 있는 그가 굳이 이런 질문을 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말을 흐린 은호가 그의 눈치를 살폈다. 그의 예상대로 인중을 모으고 무언가를 고민하던 얼굴이 이내 다시 은호에게로 돌아온다.

“그러고 보니 그거 안 보이더라?”

“네?”

뜬금없는 소리였다. 이번에는 그의 이야기가 궁금한 것처럼 표정을 꾸밀 필요도 없었다. 의아한 얼굴을 본 그가 껄껄 웃으며 은호의 앞으로 술잔을 밀어줬다.

“왜, 그 노트. 네가 애지중지하는 거.”

아…… 짧은 신음을 내놓은 은호는 다음 순간 인상을 찌푸리지 않게 얼굴에 안간힘을 쓸 수밖에 없었다. 아침부터 그놈의 노트가 사람을 돌아버리게 하고 있었다. 한참 전의 일을 굳이 끄집어내는 이 새끼부터 시작해서, 오늘 제가 느끼는 피로감을 모두 만들어낸 하얀 얼굴까지 떠올린 은호가 잔을 들어 마셨다.

“집에 가져다 뒀어요. 소중한 거라서요.”

그러니까 그만 물어보라고, 이 새끼야. 뒷말을 삼킨 은호가 트레이드마크인 눈웃음을 지으며 화제를 돌렸다.

“요새 바쁘시죠?”

“나야 뭐.”

“슈어 컴백도 한다고 들었는데. 바쁘시겠어요.”

그가 애초에 은호를 이 자리에 부른 이유이기도 한, 남자를 띄워주기 위한 목적으로 꺼낸 이야기였다. 다행히 먹혀든 듯 씩 웃음 짓는 남자가 거들먹거리는 표정으로 지껄였다.

“뭐. 삘 닿으면 쓰는 거고.”

굵직굵직한 그룹들의 히트곡을 써낸 남자가 이제 막 뜨기 시작한 아이돌의 수록곡들을 맡기 시작한 데에는 그의 한물간 프로듀싱의 역할이 컸으리라. 오래전부터 회사와 함께 일해온 그를 아는 회사의 배려인 것 같다만, 풋내기에 불과한 제 눈에도 보이는 걸 그라고 모를 리 없었다. 그렇지만 약해 보이기는 싫다 이거지. 평소보다 배는 더 힘준 것 같은 자리를 둘러보던 은호가 피식 웃으며 남자를 응시했다.

“슈어가 부럽네요, 벌써.”

언제나 그렇듯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말들 중 그의 진심은 없었다. 날카로운 눈빛을 감춘 그가 부러 더 순진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질리게 만든다, 진짜. 거울 속의 지친 자신을 들여다보던 은호가 몸을 숙였다. 시원하게 쏟아지는 물에 얼굴을 가져다대자 열이 그나마 조금 식혀지는 느낌이었다. 나름대로 페이스 조절을 한다고 했는데도 이 모양이다. 흐릿해지는 정신을 붙잡으려 제 뺨을 손바닥으로 툭툭 치던 그가 멈칫하고는 뒤를 돌았다.

“이게 누구야~! 어디 갔나 했더니 여기 있었구만~!”

비틀비틀 걸어 들어오는 얼굴을 지켜보던 은호의 얼굴 위로 잠깐 혐오스러운 빛이 스쳤다. 그도 잠깐 익숙하게 표정을 관리한 그가 넘어질 뻔한 남자를 부축했다. 얼씨구나 하고 몸을 기대오며 등을 토닥이는 손길이 역겹지만 그렇다고 떼어낼 수는 없었다.

“형. 이제 슬슬 들어가실까요.”

“들어가? 어딜~?”

“하하. 어디긴 어디예요. 집이죠. 취하셨어요.”

집이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바둥거리는 그를 놓아준 은호가 그의 뒷모습을 말없이 응시했다. 비틀거리는 걸음으로도 소변기로 어찌 저찌 걸어간 그가 벽에 기대어 신음을 흘리는 게 보인다. 쫄쫄쫄 들려오는 소리까지. 끔찍한 하루의 완벽한 마무리였다. 피곤한 표정으로 눈을 쓸던 은호가 이쯤하면 됐겠지 싶어 남자에게 다가가 부축하려던 순간이었다. 술에 취해 가누지 못하던 몸을 웬일로 똑바로 세운 남자가 은호를 돌아보았다.

혹시 제 표정이 들켰을까 싶어 표정을 굳힌 은호와 눈을 마주한 그가 내놓은 소리는 뜻밖의 것이었다.

“은호야. 작업실 함 와라.”

“네. 갈게요. 그러니까 오늘은 여기까지 하시고…….”

“그 노트도 가져오고.”

주정이라 생각하고 달래듯 답하던 은호가 멈칫했다. 그와 눈을 마주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표정을 관리하기가 어려웠다.

“봐둔 게 있었는데 쏠랑 그렇게 가져가 버리면 어떡하냐.”

“…….”

“치사하게 굴겠다는 거 아냐. 네 이름도 공동으로 올려줄게.”

“……형. 그건.”

“너 작곡 공부 누가 시켜줬냐, 인마.”

방금 전까지 비틀거리며 술 냄새를 잔뜩 풍긴 사람치고는 정확한 발음에, 명확한 지시였다. 협박처럼 들리는 마지막 말까지. 은호가 굳은 사이 손 씻기까지 마친 그는 더 이상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한물 간 프로듀서가 아니었다. 멍하니 선 그에게 다가와 볼을 툭 치는 얼굴에는 그가 수없이 해왔을 패악질에서 나온 연륜이 짙게 묻어 있었다.

“노란 노트. 잊지 말고. 곧 보자. 응?”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음에도 한참을 움직일 수 없었다. 결국 짧은 한숨을 뱉어낸 은호가 제 머리를 엉망으로 흐트러뜨렸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알 수 없었다. 아니, 사실은 알고 있었다. 이 모든 건 이지후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그의 손을, 그의 시선을, 나아가 그의 모든 것을 훔치고 싶어 시작한 일들 때문이다.

그의 손에 닿는 거라면 모두 다 제가 가져야 성이 풀릴 것 같았다. 하얀 얼굴도, 얇은 손도, 무심한 듯 떨어지는 시선까지도. 하지만 제 마음대로 되는 건 없었고, 병신같이 한참을 주위를 맴돌다 얻어낸 건 그의 손을 탄 노트뿐이었다. 그랬는데. 그랬는데…….

과거의 일을 떠올리던 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멤버들이 들어오지 않는 프로듀싱룸, 안심하며 한 번 꺼내놓았던 노트가 이렇게 족쇄가 될 줄은 몰랐다. 관심을 보이는 남자를 보았을 때만 해도 설마 했다. 불안한 마음에 집에 가져다 두었지만 이렇게 직접 언급까지 하며 가져오라고 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지후가 제 방에서 노트를 발견한 건 말할 것도 없고.

방으로 들어서자마자 발견한 뒤통수에 심장이 떨어져 내릴 것만 같았다. 오래전에 쓰던 노트긴 했지만 그래도 그가 쓰던 노트니 당장이라도 알아챌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과 다르게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듯한 말간 눈빛은 은호의 예상과 다른 일이긴 했다. 그래도 이건 이렇게까지 번져서는 안 될 일이었다.

누구도 제가 이지후의 작곡 노트를 가지고 있다는 건 몰라야 했다. 그 노트를 훔쳐온 이유에 대해서도.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