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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애와 거리두기-63화 (63/119)

63화

불판 위에 버섯까지 야무지게 올려준 알바생이 휙 돌아가는 걸 짧게 지켜본 둘의 시선이 다시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아까의 무표정한 표정은 오간 데 없이 어느덧 은호의 얼굴에는 예의 그 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얕게 속쌍꺼풀이 진 눈이 둥글게 휘어지고, 애교살이 살짝 차오른 채로 입꼬리가 쑥 올라간 웃음.

“짠 할까요?”

그의 팬으로서 참 좋아했던 웃음이기도 했다. 씁쓸한 기분을 억누르며 시선을 내린 대현이 미간을 슬쩍 모았다. 이건 또 언제 채웠대. 끝을 조금 남겨두고 찰랑찰랑 차오른 소주잔을 든 은호가 받으라는 듯 팔을 더 내밀었다. 잔을 받아 들자마자 챙 부딪쳐 오는 소주잔. 가장자리를 검지로 두어 번 매만지던 대현이 고개를 들었다. 관찰하기라도 하듯 그의 모든 행동을 따라오는 은호와 눈을 마주하며 잔을 서서히 기울인 대현이 다음 순간 눈을 찌푸렸다.

목에 넘어가는 알코올의 쓴 맛보다 더 강하게 코를 찔러오는 향을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자연스럽게 물 컵으로 손을 뻗어 한 모금 들이켠 대현이 아직 입안에 남은 맛을 혀로 쓸어내렸다.

착각이 아니었다. 술을 잘 마셔본 사람이 아니라면 알아채지 못할 정도의, 그러나 한 번이라도 이 맛을 본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그런 맛. 달짝지근한 사이다의 맛이 남은 입안을 다시 물로 축인 대현이 고개를 들었다. 은호가 고개를 돌려 제 잔에 든 술을 넘기는 게 보인다. 잔을 내려놓으며 저를 바라보는 은호의 시선을 마주한 대현이 한쪽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이렇게 나오시겠다? 하긴. 갑자기 고기 먹자고 할 때부터 이게 무슨 전개인가 싶었다.

“은호야.”

“네.”

여상한 말투로 입을 연 대현이 수저통 옆에 놓인 맥주잔으로 손을 뻗었다. 포개어 뒤집어져 있던 맥주잔을 분리하는 과정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테이블 위로 손을 뻗어 은호의 팔 근처에 있던 소주병을 잡은 대현이 맥주잔 위로 병의 주둥이를 가져다 댔다.

“취하고 싶으면 방법은 많아.”

콸콸콸.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쏟아붓는 소주가 맥주잔의 절반 이상을 채웠다. 예상외의 풍경에 멍하니 그 모습을 구경하던 은호가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었을 때는, 어느덧 테이블을 건너 제 앞에 멈춰선 투명한 맥주잔이 있을 뿐.

“굳이 그런 더럽고 유치한 방법 말고도.”

눈을 휘어 보였지만 가까이서 바라본 눈동자에는 웃음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은호가 자리에 앉은 후 처음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대현은 술을 잘 마시는 편이었다. 그 사실을 안 건 고등학생 티를 막 벗지 못하던 겨울, 신입생들끼리 모인 자리에서였다. 제 주량도 모른 채 부어라 마셔라 목에 털어 넣는 아이들과 똑같이 따르고 마셨음에도 끝내 그 자리에서 살아남은 건 대현뿐이었다. 자신이 꽤 잘 마시는 편이라는 걸 알고 나서도 딱히 바뀌는 건 없었다. 대현은 오히려 더 조심하려 애쓰는 편이었다.

술을 잘 마신다는 건 모두가 취했을 때 조금 더 자제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야 좋을 뿐이지 그 외에는 딱히 드러낼 일도, 자랑할 일도 아니라고 생각했으니까. 더군다나 술 부심을 부리며 후배들에게 술을 강요하는 선배들이야말로 대현이 싫어하는 부류 중 하나였다. 오죽 자랑할 게 없으면 그런 걸 자랑하려 할까. 한심했다.

그러니까 이렇게 누군가와 전투적으로 술을 들이켜는 건 그도 처음 해보는 일이었다. 이런 특수한 상황이 아니라면 앞으로도 해볼 일이 없을지도 모른다. 하긴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그가 속칭 ‘다이다이’라고 불리는 행위를 한때 제가 좋아한 아이돌과 하게 될 줄은.

“한 병 더 시킬까?”

고기가 그대로 남은 판을 바라보던 대현이 물었다. 물을 들이키던 은호가 말없이 대현을 쏘아봤다. 대현이 어깨를 으쓱했다.

“못 먹겠으면 말고.”

“……시켜요.”

갈라진 목소리를 내뱉는 눈이 조금 충혈되어 있었다. 대현이 테이블 위의 벨을 눌렀다. 발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열린다. 문 사이로 빼꼼 고개를 내민 알바생을 본 대현이 웃으며 부탁했다. 저기, 한 병만 더 가져다주시겠어요? 네. 오리지널로요. 감사합니다. 감사 인사까지 멀끔히 마친 대현이 은호에게 고개를 살짝 비틀어 말했다.

“오리지널 괜찮지?”

“네.”

“힘들면 고기도 좀 먹고 그래.”

“형이야말로 힘드시면 좀 드세요.”

일부러 걱정하듯 건넨 말에 은호가 발끈하는 게 보였다. 이젠 웃으려는 노력도 안 한다. ‘너나 처드세요’라고 들리기까지 하는 말을 곱씹던 대현의 입에서 피실 웃음이 흘러나왔다. 취하지는 않았다지만 계속 들이켠 술 탓에 나른했다. 하품이 나올 뻔한 걸 참은 그가 반대편에 앉은 은호의 얼굴을 관찰했다.

어디 보자. 귀도 빨개졌고, 이마도, 코까지 빨개졌네. 거기다 방금 나눴던 대화를 생각해 보면 늘 형식적으로나마 쓰고 있던 가면은 어디다 접어 날려 버린 듯했다. 술에 취한 상태라는 걸 감안한다 쳐도 조급함과 혼란스러움이 섞인 눈빛은 여유롭던 유은호답지 않다.

의외였다. 자리에 앉자마자 자연스럽게 술부터 시키기에 어느 정도 각오는 하고 덤빈 건 줄 알았는데, 고작 소주 세 병을 나눠 마시고 이렇게 된 거면 그 생각을 수정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별개로 궁금하긴 했다. 그렇게 날 취하게 해서 뭘 하려고?

대현이 눈을 가늘게 좁혔다. 때마침 다가온 알바생이 소주를 건넨다. 소주를 건네고 돌아서려던 그가 조금은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테이블을 흘끔거리는 걸 확인한 대현이 뚜껑을 따며 창호지 너머로 보이는 식당을 흘끔거렸다. 그러고 보니 고깃집에서 대낮부터 방에 앉아 고기 대신 술만 들이붓는 젊은 남자 둘은 충분히 이상해 보일 만도 했다. 특히나 둘이 대화를 나누거나 친해 보이지도 않는 상태일 때는 더더욱.

“마실 거지?”

“…….”

“잔 좀 똑바로 들어. 흘리겠다.”

이를 악문 얼굴이 잔을 받아 내려놓는다. 그러기가 무섭게 곧바로 테이블을 건너온 손이 방금 대현이 내려놓은 소주병을 쥐었다. 지켜보던 대현이 동요 없이 잔을 들었다. 멈칫하던 은호가 인상을 찌푸리는 게 보인다. 도발이라도 하듯 강하게 마주쳐 온 눈을 피하지 않은 대현이 어깨를 으쓱했다.

“형이야말로 똑바로 드세요.”

“똑바로 들었는데? 네 자세가 이상해서 그렇지.”

“…….”

멈칫하기를 잠깐, 표정을 가다듬고 다시 대현의 잔에 소주를 따르는 얼굴은 여전히 빨갛게 달아올라 있다. 거기다 방금 잘못 본 게 아니라면 분명 비틀거린 것 같았는데.

대현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저 작은 머리통에 무슨 생각이 들어서 이렇게 오기를 부려대는 건지 모르겠지만 계속 모른 척 따라줬다가는 사람 하나 죽이겠다. 사람이 화장실에 간 사이 사이다까지 타 더 빨리 취하게 하려는 얄팍한 술수에 짜증이 나 내버려 뒀다지만, 더 이상은 자신에게도 은호에게도 이득이 될 것 같지 않다. 판단을 마친 대현이 잔을 내려놓고 은호를 불렀다.

“유은호. 이쯤에서 관둬.”

“…….”

“그만하고 가자.”

미동도 없이 눈만 깜빡이는 그를 본 대현이 손을 뻗었다. 은호의 손에 불안하게 잡혀 있는 소주잔을 대신 잡아 내려놓은 대현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희 계산 좀 해주시겠어요?”

문을 열고 카운터로 걸어간 대현이 계산을 마치고 돌아올 때까지도 은호는 아까 그 자세 그대로 앉아 있었다. 테이블 어딘가를 멍하니 응시하는 그를 본 대현이 망설이다 은호를 불렀다.

“계산 끝났어. 가면 돼.”

은호에게서는 대답이 없었다. 미동도 없는 그에 덜컥 불안해진 대현이 다시 방 안으로 들어섰다. 신발을 벗고 올라가 은호의 옆으로 다가간 대현이 그의 어깨를 잡았을 때였다.

“야. 유은호…….”

생각보다 더 뜨거운 어깨에 손을 움츠린 순간 세상이 흔들렸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게 뭐 하는…… 안 비켜?”

대현이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그를 깔고 앉은 은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충혈된 눈이 대현을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멍한 눈빛을 하고 있었던 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집요하게 얼굴을 훑는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주정 한 번 심하게 부린다는 생각을 하며 인상을 찌푸린 대현이 손을 들어 그를 밀쳐 내려 할 때였다.

“그만하라고?”

“야. 유은호.”

“이제 와서?”

핏줄이 선 눈이 대현에 시선을 둔 채 흔들리고 있었다. 그의 몸도 마찬가지였다. 맞닿은 몸을 통해 대현이 그의 떨림을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고개를 돌려 한숨을 뱉은 그가 갈라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너야말로 그만해.”

“…….”

“이제 와서…… 사람 들쑤시지 말란 말이야.”

짓씹듯 내뱉은 말과 함께 차가운 눈동자가 대현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동시에 몸을 일으킨 그가 거칠게 문을 열고 나갔다. 술기운을 완전히 털어내지 못한 비틀거리는 걸음걸이로도 금세 시야에서 사라진 그의 뒷모습을 좇던 대현의 입에서 결국 욕이 흘러나왔다.

씨발, 유은호. 넌 대체 뭐가 문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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