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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애와 거리두기-62화 (62/119)

62화

“네, 형.”

핸드폰을 귀와 어깨 사이에 둔 채로 대현이 방에서 걸어 나왔다. 숙소가 고요했다. 윤성은 아이돌 축구단 연습, 우람은 헬스장, 식은 광고 촬영 건으로 일찍부터 숙소를 나선 날이었다. 늘 한 명씩은 숙소에 있었던 것 같은데, 이렇게 스케줄이 다 맞물려 대현이 혼자 숙소에 남은 건 처음이었다. 그 때문인지 새벽부터 방 밖에서 느껴진 인기척들은 유독 제 방 앞을 오래 맴돌았었다. 진작 잠에서 깨 윤성과 우람이 투닥이는 소리까지 들었음에도 부러 나가보지 않았던 아침을 떠올린 대현이 작게 입술을 깨물었다.

[지후야?]

건너편에서 들린 부름에야 정신을 차린 대현이 진수가 전화를 한 이유를 되짚었다.

“네. 지갑 두고 가셨다구요?”

[어. 어제 회식 있었거든. 취해서 너네 숙소에 또 갔던 모양이야. 아침에 일어나서 얼마나 놀랐는지 아냐. 어쨌든 두고 온 건 확실한 것 같은데 혹시 모르니까 네가 좀 체크해 줘.]

“네. 근데 어제 어디서 주무셨어요?

[어제? 은호 방.]

“……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소파를 살피던 대현이 멈칫했다. 자연스레 시선이 향한 곳은 그가 숙소에 들어온 후 한 번도 발을 디뎌본 적이 없던 곳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 방의 주인이  유은호였으니까. 곤란한 표정이 된 대현을 알 리 없는 진수는 찾아보고 있냐는 태평한 소리를 늘어놓고 있었다. 망설이던 대현이 걸음을 뗐다.

“형. 이거 제가 꼭…….”

[엉?]

“……아니요. 지금 방문 앞이에요 형. 찾아보고 연락드릴게요.”

[어, 그래. 고맙다, 지후야.]

웬만하면 피하고 싶은 일이었지만 숙소에 저밖에 없는 걸 아는 진수가 제가 하고 싶지 않다고 할 경우에 이해를 할 수 있을지가 의문이었다. 그와의 입씨름이 더 귀찮을 것 같다는 걸 예감한 대현이 결국 문고리에 손을 얹었다. 질끈 눈을 감은 그가 문고리를 돌렸다.

“…….”

긴장했던 게 무색할 정도로 평온한 방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눈에 들어오는 물건이 별로 없는 방은 꽤 넓음에도 어딘가 정리되어 있다는 것보다는 허전하다는 인상이 더 강하게 느껴졌다. 아마 그건 방주인이 꽤 오랫동안 오지 않아서겠지. 마지막으로 숙소에서 은호를 보았던 게 꽤 되었음을 떠올린 대현이 곧 고개를 틀어 방을 훑었다. 그의 시선이 침대 위 구겨진 이불에 닿았다. 진수의 흔적일 터다.

그렇다면 지갑도 이 주위에 있겠지. 침대 위로 몸을 구부린 그가 이불을 살짝 위로 들어올렸다. 툭. 한시라도 방을 빨리 뜨고 싶은 대현이 반길 만한 소리가 들렸다. 베개 옆에 비스듬히 놓인 지갑을 발견한 대현이 손을 뻗었다. 아슬아슬한 거리기에 닿을 거라 생각했지만 가볍게도 그의 예상을 빗나간 지갑이 곧 시야에서 사라졌다.

“……아씨.”

침대와 벽 사이의 틈으로 떨어진 지갑을 확인한 대현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한숨을 쉰 그가 결국 침대에 살짝 몸을 기대고 누워 틈 사이로 손을 넣었다. 아까 눈대중으로 짐작했던 사정거리에 손을 넣어 휘젓자 걸리는 것이 있었다. 단숨에 잡아 올린 대현이 멈칫했다.

“…….”

지갑을 들어 올리며 덩달아 함께 올라온 것이 벽과 침대의 틈 사이로 빼꼼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어렴풋이 보이는 끄트머리로 보건대 노트인 듯했다. 진수가 두고 간 걸까. 침대와 벽 사이에 틈에 끼어 있었다고 보기에는 너무나도 깨끗한 노트에 대현이 이내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한 번도 들어와 본 적 없는 은호의 방에 있는 노트가 익숙할 리 없는데도 자꾸 어디선가 본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지갑을 옆에 놓아둔 대현이 손을 뻗어 노트를 끌어당겼다. 별 힘을 들이지 않아도 쑥 끌려온 노트를 내려다보던 대현의 눈빛이 의아함으로 물들었다. 그의 머릿속이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것을 쫓고 있었다.

잠시만. 이거…….

“못 본 사이에 새로운 취미가 생기셨나 봐요.”

대현이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마자 마주친 눈은 이곳에서 마주칠 거라 생각지 못했던 인물이었다. 이 방이 그의 방이라는 걸 고려할 때 모순적인 일이었지만 사실이 그랬다. 그는 오랫동안 숙소에 오지 않았었으니까.

“이거 원 무서워서 마음 놓고 돌아다닐 수나 있겠어요?”

비틀린 미소를 지은 채 문가에 선 은호를 확인한 대현의 얼굴이 굳었다. 팔짱을 낀 채 대현을 내려다보는 얼굴은 흥미로운 거라도 보듯 그를 관찰하고 있었다. 잠시 눈을 마주하던 대현이 고개를 돌렸다. 의식적으로 은호를 외면한 그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옆에 놓인 지갑을 챙긴 그가 차분한 말투로 늦은 대답을 내놓았다.

“진수 형이 찾아달라고 한 게 있어서 들어온 거야. 나갈 거니까 걱정 마.”

대답 없이 자신을 뚫어져라 보는 은호와 잠시 시선을 나누던 대현이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한때 좋아했었던 이와 함께 있는 이 순간이 이렇게 불편하고 끔찍하게 느껴질지는 몰랐다. 새삼스러운 변화에 허탈한 미소를 지으며 걸음을 떼던 대현이 멈칫했다. 방금 전까지 들고 있었던 노트가 발치에 떨어졌다. 무의식적으로 몸을 굽혀 주우려던 대현이 멈칫했다.

먼저 선수를 친 은호 때문이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여유로웠던 그는 어디로 가고, 빠르게 다가온 그가 바닥에 떨어진 노트를 낚아챘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봤어요?”

거친 목소리로 묻는 은호의 눈빛이 떨리고 있었다. 어딘가 이상함을 느낀 대현이 눈을 찌푸리고는 그를 응시했다. 시선을 내리자마자 노트를 꽉 쥐고 있는 그의 손이 보였다. 힘줄이 솟아날 만큼 긴장한 게 보이는 손. 대현이 시선을 올리자마자 따라오는 시선은 확실히 이상하다. 무엇보다 그답지 않다. 지후의 몸에 들어온 이후로 처음 보는 듯한 그의 모습에 덩달아 행동을 멈추고 잠시 생각하던 대현이 대답했다.

“뭘 얘기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대답을 들은 얼굴이 창백해진다.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생각난 게 있었다. 잔뜩 떨며 내뱉은 제 질문에 방금 자신과 똑같은 대답을 내놓았던 얼굴이.

‘무슨 얘기를 하시는 건지 모르겠는데.’

‘…….’

‘제가 뭐 잘못한 게 있나요?’

의도한 건 아니지만 돌고 돌아 같은 대답을 들려줄 수 있게 된 꼴이다. 시원해야 할 일인데 생각보다 그러지는 못했다. 헛웃음을 친 대현이 시선을 끊고 몸을 일으켰다. 뭘 저렇게 두려워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어떤 식으로든 두려움을 느꼈다면 다행이다. 여태껏 관찰한 바로는 그는 이 숙소에 두려워할 이 하나 없어 보였고, 그 사실이 그로 하여금 남의 불행을 비웃는 잔인하고 쓸데없는 짓이나 하게끔 만들었으니까.

“노트 말하는 거면.”

“…….”

“안 봤어. 진수 형이 두고 가신 건가 해서 겉만 확인한 거야.”

하지만 그는 은호와 다르게 누군가를 고문하는 취미가 없었다. 단호하게 말을 끝맺은 대현이 은호를 지나쳐 방을 나서려 할 때였다.

“형.”

뜬금없는 부름이었다. 이 상황에 그의 입에서 나올 거라고 생각지 못했던 친근한 호칭에 대현이 걸음을 멈췄다. 뒤를 돌자마자 보인 건 아까 자신에게서 노트를 낚아챘을 때처럼 여전히 한쪽 무릎을 바닥에 댄 채로 앉은 은호의 옆모습이었다. 노트를 쥔 손이 하얗게 질려 있는 걸 본 대현이 서서히 제게로 돌려지는 얼굴과 시선을 맞췄다.

“밥은 드셨어요?”

저번에도 느꼈지만 표정 관리가 정말 뛰어나다. 방금 전의 일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그린 듯한 미소를 짓고 올려다보는 얼굴은 누가 보면 잘 따르는 동생이라도 되는 줄 알 것이다. 그 얼굴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게 되었다는 건 제게 청신호인 걸까. 덩달아 표정을 관리한 대현이 은호를 빤히 응시했다. 차분한 시선과 다르게 머릿속에서는 그만이 들을 수 있는 경보음이 울리고 있는 중이었다.

“아직이면 같이 드실래요? 저랑.”

유은호가 이상하게 굴고 있었다.

“형.”

“어?”

“술은 제가 시켜놨어요.”

“아…… 어.”

꼭 필요한 상황이 아니면 붙이지 않던 호칭을 부른 게 벌써 두 번째였다. 동시에 몸을 가까이 하는 그의 행동에 자리에 앉으려던 대현이 움찔했다. 티 안 나게 몸을 비껴 자리에 앉은 대현이 물수건으로 손을 괜히 북북 닦아내는 동안에도 은호의 입가에 자리한 미소는 여전했다. 옆얼굴로 쏟아지는 시선을 모른 척 물컵에 든 물을 원샷한 대현이 그때까지도 떨어지지 않는 시선에 결국 고개를 은호 쪽으로 돌렸다.

마주친 시선에도 은호는 당황하지 않은 눈치였다. 오히려 싱긋 웃으며 빈 물컵에 물을 따라주는 그에 결국 대현의 입에서 허, 하는 작은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

확실히 이런 유은호는 낯설었다. 살가운 태도나 자진해서 베푸는 유은호의 배려는 지후의 몸에 들어온 후 처음 겪어보는 일이었다. 새삼 입이 쓴 그 사실에 대현은 티 안 나게 볼 안에서 혀를 굴렸다. 그의 긴 눈매가 유은호의 옆얼굴을 짧게 훑었다. 이 새끼가 왜 이러지, 오늘 진짜.

“배고프세요?”

“아니. 왜?”

“쳐다보시길래.”

“아.”

눈을 휘는 은호를 보던 대현이 이어지던 생각을 접고 장단을 맞췄다.

“멤버 얼굴도 마음대로 못 보냐. 리더가.”

식탁에 팔을 얹어 얼굴을 괴고서 빙긋 웃어 보이는 얼굴이 방금까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짐작조차 못할 정도로 천연덕스러웠다. 턱을 괸 대현 덕에 자연스럽게 그를 내려다보게 된 은호가 눈을 두어 번 깜빡거렸다. 무표정해지던 표정은 곧 둘 사이를 가른 알바생으로 인해 가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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