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대현이 묻는 것들은 지후가 그렇다는 대답을 내놓을 수 있어야 하는 것들이었다. 대현에게 제 행세를 해달라고 부탁하며 자신이 알아보겠다고 약속한 부분이었으니까. 그러나 방금 그의 입에서 나온 것처럼, 그렇지 못했다. 갑자기 나타난 대현의 친구고, 여행이고 뭐고. 핑계를 걷어내고 나면 원론적인 문제만이 남았다. 정말 알아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걸까. 지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정대현, 나…….”
“괜찮아. 뭐라 하려고 물어본 거 아니니까.”
“…….”
“근데 이젠…….”
“…….”
“알아봐야 하지 않을까. 우리.”
드디어 고개를 든 대현이 지후와 시선을 마주했다. 방금 말한 것처럼 지후를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원망 혹은 그와 비슷한 어떠한 감정도 찾을 수 없었다. 대신 그를 더 견딜 수 없게 하는 것이 있었다. 눈을 마주하던 지후의 눈빛이 흔들렸다.
“계속 이렇게…… 있을 수는 없잖아.”
결국 고개를 떨어뜨리고 만 지후의 머리 위로 대현의 말들이 떨어졌다. 옳은 말이기에 더 미안하고 더 죄책감이 들 수밖에 없는 말들이었다.
“너를 위해서도.”
“…….”
“나를 위해서도.”
자신이 이렇게나 혐오스럽고 부끄러울 수가 없었다.
* * *
대현이 숙소에 돌아온 건 오후가 훌쩍 넘어서였다. 지후의 집에서 생각보다 시간을 많이 보내기도 했지만 교통 체증도 만만치 않았다. 지친 표정으로 숙소에 들어서던 대현이 깜짝 놀라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거실 가운데에 동그랗게 서 있던 세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고 생각한 순간 대현의 몸이 휘청거렸다.
“형!”
“이지후?”
허리에 딱 달라붙은 머리통이 윤성의 것이라는 걸 파악했을 즈음, 거친 손길이 그의 얼굴을 잡고는 이리 저리 좌우로 살피기 시작했다. 투박하고 큰 손이 양 볼을 잡고는 오른쪽 왼쪽으로 거칠게 돌려댔다. 어질어질할 정도로 머리가 이리저리 흔들리고 나서야 자유로워진 머리에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대현이 눈앞의 우람을 얼떨떨하게 응시했다.
“이게 뭐 하는…….”
“너…… 너! 어디 갔었어!”
대현이 말을 채 다 끝내기도 전에 말을 끊고 들어온 우람은 흥분한 탓인지 말을 더듬기까지 했다. 얘는 왜 또 이렇게 흥분해 있어. 대현의 시선이 거실에 서 있던 셋 중 가장 대화를 할 만한 상태인 것 같은 식에게 향했다. 설명을 바라는 눈으로 바라봤지만, 들어온 순간부터 대현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는 그는 안타깝게도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 와중에도 성난 우람의 시선은 따갑도록 쏟아지고 있었다. 너, 그러니까, 왜, 아니, 이 시간까지, 어딜…… 저조차도 알아듣지 못할 것 같은 소리를 반복해서 뱉고 있는 그를 보던 대현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제가 큰 잘못이라도 저지른 것 같은 분위기에 목소리 끝이 저절로 잦아들었다.
“볼일 있어서 잠깐…… 나갔다 왔는데. 왜? 무슨 일 있었어?”
덩달아 심각해진 대현이 셋이 선 거실 곳곳을 훑었다. 반쯤 매달린 윤성을 달고서도 목을 쭉 빼 부엌까지 살펴봤지만 육안으로는 딱히 문제가 없어 보였다. 그럼 뭐가 문제인 걸까. 혼란스러운 표정을 된 대현이 마지막 희망이기도 한 윤성의 뒤통수를 내려다봤다.
“형 전화도 안 받으시고…… 진짜 걱정했어요…….”
때마침 얼굴을 든 윤성이 하는 말을 듣고서야 왜 이 난리인지를 조금 알 것 같았다. 주머니의 핸드폰을 꺼낸 대현이 버튼을 눌러도 까맣기만 한 화면을 보다 고개를 들었다.
“미안. 꺼졌었네. 걱정했어?”
대답 대신 크게 한숨을 쉰 우람이 뒷머리를 긁으며 소파로 걸어갔다. 윤성은 대현의 손을 잡고 울망울망한 눈을 한 채 서 있었다. 식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대현의 얼굴을 뚫을 기세로 바라보고 있었다.
대현은 얼떨떨한 머리로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세 명이 거실에서 정신 사납게 구는 이유는 제가 연락을 안 받고 반나절 동안 보이지 않았기에 생긴 일이었다. 의아함은 잠시고 곧 정체 모를 감정들이 그의 발치를 간질였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는 감정들 사이에서 방황하던 대현이 결국 입매를 굳혔다.
“계속 밖에 있었어요?”
“어?”
식이었다. 성큼성큼 다가와 망설임 없이 대현의 귀로 손을 뻗은 그가 대현의 한쪽 귀를 만지작거렸다. 따뜻한 손이 추위에 무감각해졌었던 귀의 감각을 일깨웠다.
“귀. 차갑잖아요.”
귀가 간질거려 고개를 뒤로 빼자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허공에 뜬 손을 잠시 바라보던 식이 손을 내리고는 평탄한 어투로 덧붙인 말에 대현이 잠시 눈을 깜빡거렸다.
“…….”
“…….”
“…….”
“…….”
조용해진 거실. 현관 앞에 어정쩡하게 서 있는 대현을 향한 셋의 시선. 대현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한 걸음 물러섰다. 힘을 별로 주지 않고 팔에 매달린 윤성의 손을 떼어내는 손짓은 조심스럽지만 그만큼 단호하기도 했다.
“안 그랬어도 되는데…….”
“형…….”
“야, 넌 그걸 말이라고…!”
“…….”
대현이 외투 아래로 숨긴 손을 꽉 쥐었다. 익숙해져야 할 일이었다. 한참 전부터 생각은 했음에도 늘 지키지 못했다. 제게 기대오는 윤성을 보면서도, 틱틱대면서도 눈에 안 보이는 순간부터 늘 자신을 찾는 우람을 알면서도, 점점 제게 더 마음을 여는 식을 느끼면서도 실행으로 옮기지 못했다. 그러니까, 먼저 선을 넘은 건 대현이다. 멤버들의 사이를 좋게 한다는 명분을 앞세워 그 이상으로 그들에게 마음을 줘버린 건 자신이었다. 그러니 탓해야 할 대상도 자신뿐이다.
“걱정 끼쳐서 미안해. 다신 안 그러도록 주의할게.”
“…….”
“…….”
“…….”
빠르게 말을 마친 대현이 몸을 틀었다.
“나 편집할 게 좀 남아서…… 옷도 갈아입어야 되고. 방에 있을 테니까 필요하면 불러. 다들 나 때문에 못 하던 거 있으면 하고.”
묘하게 달라진 분위기 탓인지 움찔거리면서도 윤성은 대현을 잡지 못했다. 등으로 쏟아지는 시선들을 느끼면서도 대현은 걸음의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문을 닫고 기댄 그의 표정이 흐트러졌다.
“괜찮아, 정대현.”
지후의 몸에 들어오고 나서 입 밖으로 꺼내본 적 없는 제 이름이었다. 얼마나 됐다고 낯설게 느껴지는 그 이름을 힘주어 곱씹으며 대현이 의자에 앉았다. 노트북을 켜자마자 뜨는 화면 속 얼굴들을 멍하니 바라보던 그가 고개를 젓고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자신조차도 몰랐던 빈 곳을 채워주는 애정에 흔들리면 안 된다. 어차피 제 것이 아니니까. 늦었지만 이제라도 알았으니 이제는 자신을 다잡고 다른 것들에 집중해야 한다. 이지후인 척하는 게 아니라, 팬으로서 자신이 해줄 수 있는 일들. 마우스를 움직이며 화면을 응시하는 대현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 * *
“형?”
“어. 뛰고 왔냐?”
“네.”
“헬스장 가라니까 말 안 듣지.”
“전 밖이 좋더라구요. 새벽엔 사람도 없으니까 괜찮을 것 같고.”
트레이닝복 차림의 그를 훑어보며 못마땅한 표정을 하는 진수에게 씩 웃어 보인 대현이 숙소 안으로 들어섰다. 영하로 접어든 날씨 때문인지 평소라면 땀만 좀 흘리고 말았을 한 시간가량의 조깅은 오늘따라 숨이 목 끝까지 차게 만들었다. 냉장고를 열어 생수병을 꺼낸 그가 물을 마시며 부엌으로 따라 들어온 진수를 곁눈질했다. 현관에서 마주쳤을 때만 해도 숙소를 나가는 것처럼 보이던 그였다. 할 말이 있는 것 같은 얼굴을 본 대현이 숨을 고르며 식탁 위로 다 마신 생수병을 내려놓았다.
“하실 말씀 있으세요?”
“뭐,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이거.”“이게 뭐예요?”
“열어봐.”
식의 지방 촬영을 따라가 며칠간 볼 수 없었던 그였다. 아까 나갈 때까지만 해도 보이지 않았던 그가 숙소에 있는 것도 놀라웠는데, 이제 그는 선물로 보이는 상자까지 건네고 있었다. 그가 내민 상자를 의아하게 바라보던 대현이 결국 상자를 개봉했다. 무늬 없는 상자를 열자 보인 것은 하얀 절편이었다. 떡을 좋아하는 대현 덕에 할머니가 장을 보러 다녀오실 때마다 사오시던 것이기도 했다. 갑자기 찾아온 그리움에 대현의 표정이 흐려졌다.
“너 떡 좋아한다며.”“……네? 누가요?”
감사 인사를 뱉는 것도 잊은 채 한참을 떡을 내려다보고 있던 대현이 고개를 들었다. 새벽빛이 어슴푸레하게 들어오는 부엌에 선 진수는 어딘가 뿌듯한 표정이었다.
“식이가.”
“…….”
“그것도 걔가 산 거야. 촬영지 앞에 떡으로 유명한 집이 있었거든. 오늘 숙소 갈 일 있다니까 너 주고 오라고 얼마나 닦달을 하던지…… 어휴.”
“……아.”
“뭐, 그래도 너네 이렇게 잘 지내는 거 보니까 좋긴 하다.”
실컷 다 말해놓고는 갑자기 부끄러워졌는지 북북 머리를 긁던 진수가 가야 한다고 사라진 후에도 대현은 한참 동안이나 움직이지 못했다. 망설이던 그가 손을 뻗어 가장자리의 절편을 집어 입으로 가져갔다.
“……맛있네.”
절편은 적당히 기름졌고, 적당히 달았다. 촬영 때문에 바쁘면서도 제 생각을 해서 보내준 얼굴을 생각하니 맛없을 수가 없기도 했다. 우람의 어머님의 보내주신 떡을 먹을 때 유독 제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얼굴이 떠오르자 힘 빠진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내가 뭐라고 너는, 아니 너네는 이렇게까지 해주는 걸까. 내가 뭐라고…….
요 며칠 그를 괴롭게 한 질문이 기껏 추운 날씨에 한 시간 넘게 뛰며 식혀놓은 보람이 없게 불쑥 다시 머리를 내밀었다. 얼굴을 뜨끈하게 만드는 열도 마찬가지였다. 실컷 숨을 고르고 나니 몸에 돌던 열이 이제야 얼굴로 올라오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마른세수를 한 대현이 몸을 일으켰다. 윗옷을 벗으려던 그가 멈칫했다. 자석처럼 그의 시선이 달라붙은 상자 위로 잊고 있던 얼굴이 뭉게뭉게 떴다.
촬영은 잘 하고 있으려나. 주머니 속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대현이 결국 고개를 젓고는 화장실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