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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애와 거리두기-59화 (59/119)

59화

갑작스러운 식의 등장에 놀란 대현이 척추를 세우며 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눈을 떴을 때 아무도 보이지 않기에 밴에는 자신뿐인 줄 알았다. 적막이 흐르고 있는 밴 내부는 그의 추측에 힘을 실었었고.

“뭘 그렇게 놀라요.”

“아니…… 나 왜 여기…… 다른 사람들은?”

“먼저 올라갔어요.”

“아…….”

뒷자리에서 그를 바라보고 있는 얼굴을 보고서야 이 상황이 어딘가 부자연스럽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잠에서 덜 깬 탓인지 아무렇지 않게 넘겼던 사실들이 이상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혼자 밴에 남아 있었던 것도 ,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다 올라갔는데도 식만이 그와 함께 남아 있었던 것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었다.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을 짚어가던 그가 잠기운이 묻은 눈을 깜빡이며 식을 응시했다.

“넌?”

“형 깨시면 같이 올라가려고 기다렸어요.”

대수롭잖은 듯 답하며 대현의 옆자리로 온 식이 그의 손에 들린 패딩을 가져갔다. 잠시 내려다보더니 밴 문 옆에 붙은 좌석 쪽으로 툭 패딩을 던지는 손길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아까 제 어깨에 기대어 자고 있던 윤성까지도 숙소로 올라간 것 같이 보이는 이 상황에서 앞좌석에 앉아 있던 식이 굳이 왜 뒤로 와서 기다렸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가 묻기도 전에 등을 보인 식은 어느새 운전석 쪽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방금 잠에서 깨서인지, 아니면 이해가 안 가는 상황 때문인지. 멍한 눈으로 식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대현이 갑자기 떠오른 기억에 눈을 살풋 찡그렸다.

‘무책임한 건 알았대도.’

‘……….’

‘이렇게 무모하기까지 한 줄은 몰랐네요.’

해체를 보류해 달라고 무릎을 꿇었던 날, 숙소로 돌아오는 밴 안에는 지금처럼 식과 함께였다. 큰일을 저질러 놓고 티 안 나게 떨고 있던 대현을 꿰뚫어보듯 말없이 응시하던 칠흑 같던 눈, 그리고 결국 그를 외면하고 먼저 밴 밖으로 나가 버리던 등이 차례대로 떠올랐다.

“형.”

그때의 자신은 감히 상상할 수 있었을까. 차가운 등을 보이고 나갔던 식이 저와 함께 올라가겠다는 이해 안 되는 이유로 차에 같이 남아주는 사람이 될 거라고.

“히터 꺼서 추워질 거예요. 얼른 나오세요.”

식은 어느새 문을 잡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손에 들린 차 키를 보자 방금 그가 운전석으로 몸을 구부린 채 한 게 무슨 행위였을지가 짐작이 갔다. 재촉 한 번 없이 기다리고 있는 식의 얼굴을 한 번 본 대현이 몸을 움직여 밴에서 내렸다. 대현이 내린 것을 확인하자마자 밴의 문을 닫은 식이 대현을 돌아봤다. 눈이 마주쳤다.

“가요.”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자세로 선 식은 가자고 말한 사람답지 않게 대현을 마주본 자세 그대로 계속 서 있었다. 망설이던 대현이 먼저 걸음을 옮기자 그제야 같이 움직였다. 한 뼘 정도를 남기고 나란히 선 그는 어느새 대현과 발걸음 속도를 맞추고 있었다. 굳이 시계를 보지 않아도 새벽이란 건 알 수 있었다. 목덜미에 닿아오는 차가운 새벽바람에 고개를 움츠리던 대현은 자꾸 옆을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려 마주쳐 오는 눈은 언젠가 보았던 것처럼 깊었다.

바람에 묻어온 향도 그랬다. 이제는 멀게 느껴지는 그날만 해도 뒤에 남겨진 그의 코에 맴돌던 머스크 향은 이제는 그의 옆에서 걸음마다 짙은 향을 남기고 있었다. 막 잠에서 깼을 때 덮고 있던 롱 패딩에서 나던 향이기도 했다. 낯설게 느껴지는 그 모든 것들에 대현은 뒷목을 만지작거릴 수밖에 없었다.

“……왜요?”

“어? 아냐. 춥다. 얼른 가자.”

고개를 저은 대현이 다리를 부지런히 놀렸다. 새벽의 공기가 이상하게도 달착지근했다.

* * *

지후의 의지라고는 하나도 포함되지 않은 채 시작된 제주도 여행은 생각보다 꽤 오래 지속되고 있었다. 처음에야 일정에 대해 물으면 제가 대현이 아니라는 게 들통 날 것 같아 묻지는 못했다지만, 3주차로 접어들자 지후도 슬슬 걱정하던 걸 멈췄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물론 지후가 답지 않게 편하게 마음먹은 데에는 꽤 괜찮은 여행이 끼친 영향도 있었다. 첫 주는 제주도의 유명한 곳들을 구경 다녔고, 둘째 주부터는 영민과 그날 그날의 기분에 따라 주위를 둘러보는 등 자유로운 여행이 이어졌다. 선우가 함께하지 못한 이유는 어느 날 영민의 입에서 불쑥 튀어나온 정보로 알 수 있었다.

‘역시 부자들은 경영 수업 받는 것도 남달라.’

듣자마자 미간을 모은 선우는 경영 수업이라는 말을 걸고 넘어졌지만, 부자란 말에 대해서는 부정하지 않았다.

‘경영 수업은 무슨. 거창한 말 가져다 붙이지 마.’

단호하게 대꾸하는 멀끔한 얼굴을 보던 지후는 그제야 맞춰지는 듯한 퍼즐들에 홀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평범한 대학생들 셋이 아무리 돈을 모아도 정원까지 딸린 괜찮은 펜션을 3주 가까이 빌리는 건 말이 안 된다. 경제 감각이 없는 편인 지후마저 의아하게 생각했던 부분이었기에 알고 나니 차라리 마음이 편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정대현이 정말 정대현의 몸에 있을 때 제공되었던 호의에 제한되어 그랬던 거였지, 지후가 지금 대현의 몸 안에 있는 상태에서 그에게 제공되는 호의까지 편하게 넘길 수는 없는 거였다.

“아, 맞다. 여기.”

“……뭔데.”

“핸드폰.”

여느 날처럼 밖에 나갈 준비를 마치고 나서던 선우와 마주친 지후가 멈칫했다. 머리를 깔끔하게 넘긴 선우는 경계 어린 눈빛을 하는 지후와 눈을 맞추고 반듯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 있었다. 그제야 며칠 전 바다를 보러 갔다가 바다에 핸드폰을 빠뜨렸던 일이 생각났다. 제 폰을 가져가며 수리를 맡기겠다고 했던 선우를 떠올린 지후가 손을 내밀다 말고 멈칫했다.

대현과 연락하는 것 말고는 별로 들춰본 적도 없는 그의 핸드폰이었지만, 그래도 지금 선우의 손에 들린 신형 핸드폰이 이전의 핸드폰이 아니란 건 알 수 있었다. 이게 뭐지. 지후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이거 내 거 아닌데.”

“아냐. 네 거 맞아.”

미간을 찌푸린 그가 반박을 이어가려다 멈칫했다. 갑자기 무거워진 어깨 때문이었다.

“둘이 뭐해.”

“……야, 치워.”

“엉.”

영민이었다. 잠이 덜 깬 얼굴을 하고 지후의 어깨에 얼굴을 비비적거리던 그가 지후의 날카로운 말에 별 다른 저항 없이 고개를 뗐다. 하품을 하며 식탁으로 걸어가는 그를 잠시 노려보던 지후가 고개를 돌려 선우를 응시했다.

“너 이거…….”

“어? 김선우, 너 또 폰 바꿨냐?”

선우의 손에 있던 핸드폰이 영민의 손에 넘어갔다. 시리얼을 접시에 붓다 말고 달려온 그는 잠이 달아난 얼굴로 핸드폰을 이리저리 돌려보고 있었다. 그를 못마땅하게 바라보던 지후와 눈을 마주친 선우가 여상한 말투로 대신 대답했다.

“아니, 대현이 거.”

“뭐래. 정대 핸드폰 이거 아니잖아. 바꿔왔어? 수리 안 된대?”

놀란 듯 묻는 영민과 한껏 인상을 찌푸린 지후의 시선이 선우를 향했다. 시선을 받고 선 얼굴은 여전히 태연했다.

“그건 아닌데, 수리하는 가격이나 새로 사는 가격이나 그게 그거 같길래 그냥 샀어.”

“너.”

“안에 있는 건 다 옮겨달라 했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나 이제 슬슬 가야겠다.”

“야!”

시계를 한 번 더 들여다본 그가 제 할 말만 마친 채 부엌을 빠져나갔다. 지후가 따라 나가며 뒤늦게 소리를 질러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새 차에 타 창밖으로 손을 흔든 그가 빠르게 펜션 앞을 빠져나가는 모습만 볼 수 있었다. 어이없는 표정으로 지켜보던 지후가 걸음을 옮겨 펜션 안으로 들어왔을 때는, 영민이 폰을 식탁에 올려놓으며 고개를 젓고 있었다.

“저거 또 돈지랄 했구만.”

그걸로 감상을 마친 듯 영민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익숙하게 냉장고를 열어 우유를 꺼냈다. 심각한 얼굴로 서 있던 자신만 바보 같이 느껴질 정도였다. 인상을 구기고 선 지후를 흘깃 본 영민이 하품을 하며 툭 내뱉었다.

“놔둬. 한두 번이야?”

선우의 이런 행동이 처음이 아니라는 듯한 뉘앙스였다. 우유에 만 시리얼 그릇을 들고 거실로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던 지후가 시선을 돌려 식탁 위의 핸드폰을 응시했다. 새 핸드폰답게 한눈에 봐도 반들반들한 화면을 노려보던 그가 한숨을 쉬었다.

그러니까, 다른 건 다 익숙해져도 이런 거엔 익숙해질 수 없었다. 어렸을 때부터 모든 걸 혼자 해온 지후에게 유독 낯선 것들이었다. 묻고 따지지도 않고 제게로 불쑥 건네지는 호의 이상의 것들은 고맙다기보다는 신경 쓰였다. 특히나 그게 제가 받을 자격이 없다는 걸 알고 있는 상태에서는 더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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