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최애와 거리두기-56화 (56/119)

56화

“서프라이즈!”

“……무슨…….”

“오늘 지후 씨는 보조 엠씨로 저를 도와주실 겁니다.”

“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그런 소리 없었잖아?’

필요한 설명 대신 윙크로 때운 지웅이 다시 고개를 돌려 게임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자, 그럼 이제 게임을 시작해 볼까요?”

반박할 틈도 없이 진행을 이어나가는 멀끔한 옆모습을 경악한 얼굴로 보던 대현은 잊고 있었던 것을 새삼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멀쩡해 보이던 지웅도 결국 예스였다는 것을.

당황스럽지만 카메라가 켜져 있는 상황에서 이를 부정해 봤자 해결되는 일은 없을 거였다. 눈을 빠르게 깜빡인 대현이 마음을 진정시켰다. 효과가 있었는지 한결 차분해진 마음으로 큐카드를 눈으로 훑던 대현이 멈칫했다. 게임을 설명하는 대사에서 유독 튀는 단어들이 있었다.

요리라니. 여기서 볼 거라고는 생각해 보지 못한 단어였다. 그제야 대현이 빠르게 뒤를 돌아 아까 스태프들이 거실 가운데 들여온 긴 탁자를 살폈다. 보자기 비슷한 것으로 덮여있는 탁자의 울퉁불퉁한 표면 아래 있는 것들이 아마도 요리 도구인 모양이다.

“저희가 오늘 진행할 게임은…… 요리 게임입니다!”

타이밍 좋게 방금 대현이 본 부분을 읽는 지웅의 목소리가 거실에 울려 퍼졌다.

“벌써 졌네.”

“이거 게임 누가 정했어요?”

“이건 음모야! 음모라고!”

언질을 듣지 못했던 건 예스의 멤버들 쪽도 마찬가지였는지 반응이 거셌다. 자포자기한 표정을 짓는 기용과 흔들림 없이 대현만 빤히 바라보고 있는 예준, 부러 더 오버하며 손을 번쩍 드는 태영과 진수를 쭉 훑은 대현이 슬쩍 고개를 돌렸다.

“…….”

“…….”

“…….”

우람이 눈썹을 슬쩍 구기긴 했지만 의외로 셋은 별 다른 반응이 없었다. 예상치 못한 차분한 얼굴들에 당황스러워 하던 대현은 다음 순간 지웅의 말이 들리고서야 왜 그들이 그렇게 별 반응을 하지 않았는지 알 수 있게 됐다.

“네, 룰을 설명드리면…… 일단 저희 엠씨들은 게임 진행을 위해 참여하지 않을 거구요.”

“뭐? 그런 게 어딨어…… 요!”

갑자기 발끈한 우람은 그 와중에 대현의 눈치를 보고 존댓말로 수정하기까지 하고선 한 걸음 앞으로 나서기까지 했다.

“안 돼요…….”

창백해져서 대현과 지웅을 번갈아 보는 윤성.

“……불공평한 것 같은데요.”

차분하게 항의하는 식까지.

그러니까 셋이 요리 게임에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건, 자신이 있는 이상 괜찮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던 듯했다. 새삼 왜 지웅이 저에게 뜬금없이 보조 엠씨를 맡긴 건지도 알 것 같았다. 왜 미리 언질을 해주지 않았는지도.

“하하. 양 팀의 발랄한 모습 보기 좋네요. 자, 그럼 우리 식재료를 얻기 위한 몸 풀기 게임부터 해볼까요?”

실컷 안정시켜 놓은 보람이 없게 심장이 다시 불안하게 뛰기 시작했다. 양쪽의 거센 반응에도 눈 깜짝 하지 않고 진행을 이어나가는 지웅을 본 대현이 곤란한 얼굴로 거실을 훑었다. 카메라도 잊고 멤버들을 살피는 얼굴에는 어느덧 긴장감이 사라져 있었다.

“네가 추천한 거지 이거.”

“뭐. 요리?”

“그래.”

“아니, 추천한 건 아닌데…… 생각해 보니 추천으로 들렸을 수도 있겠다. 너 숙소에 온 적 있냐고 해서 그렇다 했더니 그때는 뭐했냐고 하시더라고.”

“……?”

“요리 이야기가 어쩌다 나왔는데 이렇게 게임으로 만드실지는 나도 몰랐어.”

몸 풀기 게임에 앞서 서로 고를 수 있는 식재료를 살피고 있는 멤버들 뒤에 선 대현이 소리를 죽여 물었다. 어깨를 으쓱한 지웅이 덩달아 소리를 죽여 대답했다. 표정을 봤을 때 몰랐다는 건 사실인 듯했다.

“이거 피망이야?”

“그게 어떻게 피망이에요 형. 양파지.”

“……바보들아. 너넨 생강도 모르냐?”

“모르는 척 좀 해봤어요.”

“웃기시네.”

식재료의 이름을 두고 토론하는 네 명의 요리 실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그가 먼저 제안했을 것 같지는 않다. 물론 그라고 해서 요리 실력이 그들에 비해 더 뛰어난 건 아니지만. 울퉁불퉁하던 샌드위치를 떠올리며 픽 웃던 대현이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보면 아냐?”

“형처럼 안 보는 것보단 낫겠죠.”

“시끄럽고. 시작되면 라면부터 가져와.”

“라면만 갖고 뭘 하시려구요.”

“면을 쓰든 스프를 쓰든! 안 되면 끓이기라도 해야지. 야, 캥거루. 알겠어?”

“전…… 잘 모르겠…….”

하다못해 뭘 가져올지를 두고서도 저렇게 싸울 수 있구나. 사이에 낀 윤성을 안타깝게 보던 대현이 지웅의 눈치를 보며 슬쩍 그쪽으로 걸음을 뗐다. 조금 도움만 주는 건 괜찮지 않을까.

“어디 가.”

“……조금만. 진짜 조금만 도와주고 올게.”

“어허. 엠씨가 룰을 그렇게 어기시면 됩니까?”

방금까지 큐카드를 들춰보던 지웅이 대현을 막아섰다. 장난스럽게 말을 거는 것과 반대로 대현이 앞으로 나가지 못하게 막은 팔은 쉽게 보내줄 기세가 아니었다. 결국 한숨을 쉰 대현이 지웅을 흘기며 다시 발을 제 위치로 돌렸다.

“자, 그럼 각자 자리로 돌아가 주시고.”

카메라에 슬쩍 신호를 준 지웅이 대현에게 따라오라는 손짓을 했다.

“몸 풀기 게임 룰 다시 한 번 설명 드릴게요. 코끼리 코를 하고 열 바퀴를 돈 후 탁자로 걸어가서 원하는 식재료를 가져오시면 됩니다. 각 팀마다 한 명씩 나와서, 둘씩 게임을 진행할 거예요. 예를 들어 저희 예스 팀에서는 진수 씨, 플러그 팀에서는 윤성 씨, 이런 식으로 나와서 먼저 식재료를 잡은 사람이 식재료를 가져갈 수 있게 되는 겁니다. 중간에 넘어지시면 무효 처리 되는 거 잊지 마시구요. 아, 그리고 지금 저희 팀이 한 명이 더 많기 때문에 게임은 세 번만 진행하는 걸로 하겠습니다. 다들 이해하셨죠?”

이해했냐는 듯 두 팀을 둘러보던 지웅이 곧 윤성과 진수에게 손짓을 했다. 둘을 마주 세운 그가 대현에게 눈짓을 했다. 아, 맞다. 식탁 뒤로 가서 서 있으랬지. 아까 나눴던 이야기를 떠올리며 대현이 걸음을 옮겨 식탁 뒤에 섰다.

“식재료 한 가지씩만 가져오는 겁니다. 저희 보조 엠씨가 식탁 뒤에 서 있는 거 보이시죠? 반칙하다 걸리면 바로 탈락이에요~! 그럼 진짜 시작할게요.”

마지막 주의사항까지 준 지웅이 목에 걸었던 호루라기를 들어 불었다. 몸을 조금 숙인 채 코끼리 코를 한 상태로 대기하던 둘의 몸이 정신없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둘 다 스피드가 장난 아니었다.

반쯤은 감탄 어린 눈으로 지켜보던 대현은 제자리에서 비틀대는 윤성을 초조하게 응시했다. 어지러운 듯 머리를 짚은 윤성은 그럼에도 착실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허공에서 맴돌던 그의 시선이 거짓말처럼 대현에게 멎었다. 시선을 맞춘 대현이 얼떨결에 흔들 뻔한 손을 멈칫하고는 대신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대현에 시선을 두고 깜빡거리던 윤성의 눈에 곧 초점이 잡혔다. 식탁으로 걸어올 때마다 조금씩 걸음이 안정적으로 변하고 있었다. 슬쩍 보니 개수를 채운 진수도 걸음을 떼고 있었다. 덩달아 마음이 급해진 대현이 식탁 밑의 발을 움찔거렸다.

“형…….”

식탁 앞에 다다른 윤성이 식재료를 훑다 말고 대현을 애처롭게 불렀다. 뭘 골라야 하냐는 듯한 얼굴이었다. 지웅의 눈치를 보며 덩달아 식재료를 훑던 대현의 머릿속에 떠오른 게 있었다. 그래, 직접적인 도움만 안 주면 되잖아? 나름의 합리화를 마친 대현이 속삭였다.

“윤성아, 우리 엊그제 먹었던 거.”

“네……?”

“기억나지.”

어리둥절한 낯을 하는 윤성과 눈을 맞춘 대현이 소리를 죽여  덧붙였다. 형이 레시피 쉽다고 했잖아.

며칠 전 먹은 로제 파스타 얘기였다. 어리둥절한 낯을 하던 윤성이 곧 알아들은 표정을 했다. 동시에 손을 뻗어 테이블 끝에 놓인 파스타 소스를 집는 윤성을 본 대현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오, 승자가 나온 모양인데요! 자, 그럼 1라운드는 플러그 팀의 지윤성 승리!”

승리를 확인시켜 주는 지웅의 말을 들은 윤성이 대현과 시선을 마주하고는 환하게 웃어 보였다.

걱정했던 것보다는 재료가 착실히 모아졌다. 자리로 돌아간 윤성이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귓속말 요청에 잔뜩 인상을 찌푸린 채로도 귀를 내어준 우람은 이어진 다음 경기에서 기용을 이기고 파스타 면을 가져오는 데 성공했고, 이어진 식과 예준의 싸움도 식의 승리로 끝났다. 물론 그 과정에서 아무 일도 없었던 건 아니지만.

실컷 빠른 속도로 잘 돌아서 먼저 출발해 놓고는 식탁 위 재료가 아니라 제 옆으로 다가와 풀썩 안긴 예준을 떠올린 대현이 헛웃음을 냈다. 저를 올려다보고 씩 웃던 해맑은 얼굴은 제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자각하고는 있나 궁금할 정도였다. 정말 볼수록 특이한 캐릭터였다. 문제는 그런 그를 지켜보다 보면 멀쩡한 사람까지도 그 이상함에 물드는 것 같다는 거다. 꿋꿋이 식재료를 집어 들던 식까지 갑자기 달려들어 예준의 등을 내려치는 이상행동을 했던 걸 보면 확실히 전염성이 있는 듯했다.

“나 약간 후회된다.”

“어? 뭐가.”

“우리가 심사위원 하기로 한 거.”

“갑자기 왜?”

“쟤네 봐봐.”

절망적으로 중얼거리는 지웅을 따라 옹기종기 모인 예스 멤버 쪽으로 고개를 돌린 대현은 다음 순간 잇새로 새어나가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느낌이 좋아. 우리가 이길 것 같아.”

“퍽이나.”

“형, 초 치지 말고 소금이나 뿌려요.”

“내가 뿌릴게.”

“아, 예준이 형! 형은 여기 와서 감자나 까라니까요!”

얼핏 보이는 검은 액체를 국자로 신나게 저어대는 태영의 얼굴이 해맑았다. 무기력하게 서 있는 기용은 말리기를 포기한 듯했고, 예준은 손에 든 양념 통들을 번갈아 가며 무작위로  쏟아 붓고 있었다. 예준을 말리는 진수가 그나마 가장 정상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듯했지만, 그의 손에서 으스러지는 감자를 봤을 때 딱히 희망적이지는 않았다.

“저게 뭘 만드는 건데?”

“……몰라. 그래서 더 무서워.”

보너스 게임에서 실컷 얻은 식재료가 그들의 손에서 짓이겨지는 걸 보던 대현도 반쯤 심각해졌다. 저걸 먹어야 되는 건 지웅뿐만이 아니었다. 괜히 침을 꿀꺽 삼킨 대현이 지웅을 쳐다봤다.

“상상하던 그림과 다른데.”

“뭐?”

“둘 다 못할 줄 알았는데. 그래도 너네 팀은 잘 하고 있어.”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지웅을 따라 시선을 돌린 대현이 눈을 크게 떴다.

“야, 비켜.”

“네?”

“칼질은 내가 할 테니까.”

“어어…… 형…… 제가 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은…….”

“뭐라고?”

“아니에요…….”

도마 앞에 선 윤성을 밀어낸 우람이 칼을 쥐는 게 보였다. 안전상의 이유로 주어진 짧은 식칼이 우람의 커다란 덩치와 비교되어 앙증맞아 보이기까지 했다. 얼떨결에 밀려난 윤성이 미간을 모은 채 양파를 까고 있는 식 쪽으로 다가갔지만 또 거절당하고는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눈 매워, 저리로 가.”

지켜보던 대현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걸렸다. 둘 다 말은 안 하지만, 궂은일을 자처하고 있었다. 투박한 방식이지만 나름대로 윤성을 배려하고 있는 듯했다. 숙소에서는 그렇게 윤성을 가운데에 두고 괴롭히더니, 그래도 다른 팀과 경쟁하는 게임에 참여하자 자연스레 막내 취급을 해주는 둘이 기특하고도 뭉클했다.

“그 뭐냐, 면? 그거나 삶든지. 심심하면.”

가운데에 붕 뜬 막내를 흘깃 본 우람이 퉁명스레 건넨 말에 윤성이 후다닥 움직였다. 파스타 면을 집어든 그가 머뭇거리며 우람 쪽을 응시했다.

“그…… 이 정도면 될까요?”

면의 양이 고민이 되었던 모양이다. 눈치를 보며 묻는 윤성에 칼질을 하던 우람과 양파를 까던 식까지 하던 일을 멈추고 윤성의 옆으로 다가섰다.

“그만큼 해가지고 누구 코에 붙이냐. 더 해.”

“그만큼 하는 게 맞는 겁니다. 파스타 처음 해보세요?”

“또 시작이네. 그러는 넌 파스타에 대해 뭘 아는데?”

“형보다는 잘 알걸요. 저만큼이면 충분해요.”

“모자라면 어떡할래? 그럼 넌 한 입도 못 먹을 줄 알아.”

“형만 안 먹으면 애초에 모자를 일이 없을 텐데요.”

“아오. 이걸 진짜.”

가운데에 낀 윤성이 둘을 번갈아 보더니 이내 손에 쥔 파스타를 물에 넣었다. 빠른 포기는 그들이 숙소에서 싸우는 걸 물리게 보아온 경험에서 우러난 듯했다. 그리고 이미 윤성과 파스타는 까맣게 잊은 듯한 둘은 익숙하게 투닥거림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 모든 모습을 지켜보던 대현은 지후의 몸에 들어온 이후로 처음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처음으로 한 프레임에 안에 있는 그들이 어색해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까, 이제야 좀 한 팀 같다.

“……다행이다.”

그렇게 중얼거린 대현의 입가로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안도감이 드러나는 목소리와 달리 웃음의 끄트머리에 그조차 알아채지 못할 조금의 씁쓸함이 묻어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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