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막내들 어딨냐.”
“방에서 게임하던데.”
“아직도?”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우람과 식을 번갈아 응시하던 기용이 내놓은 대답에 한숨을 쉰 지웅이 거실의 반대편 복도로 걸어갔다. 대현이 눈치를 보고는 그 뒤를 따랐다. 어차피 지금 거실에 있어봤자 더 나은 상황일 것 같지도 않고, 윤성이 뭐 하고 있나 궁금하기도 했다. 뒤에 붙은 대현을 본 지웅이 눈썹을 들어 올리더니 이내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 너 말은 들을지도 모르니까. 중얼거리듯 나온 그의 말은 정확히 삼 초 후 이해할 수 있었다.
“이진수. 이태영.”
“…….”
“야!”
나란히 앉아 헤드폰을 낀 세 명은 지웅의 말이 들리지도 않는 듯했다. 인기척을 느끼고 돌아볼 만도 한데 한 치의 흔들림 없이 모니터를 보고 있는 세 명을 본 지웅이 한숨을 내쉬며 대현에게 말했다.
“게임 중독이 멀리 있는 게 아냐.”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대현이 가운데에 앉은 윤성을 응시했다. 그러고 보니 윤성이 저렇게 집중해서 게임하고 있는 건 처음 보는 것 같다. 철권 같은 게임은 몇 번 같이 해주긴 했는데. 저렇게 집중해서 할 만큼 좋아하는 게임인데 숙소에서는 하는 걸 본 적이 없었다. 같이 할 사람이 없어서 그랬던 걸까. 뭔가 미안한 마음이 든 대현이 윤성을 불렀다.
“윤성아.”
“……형?”
한숨을 쉬며 셋에게 다가서려던 지웅이 깜짝 놀란 눈으로 대현을 돌아봤다. 그도 그럴게 대현의 작은 음성을 들은 윤성이 바로 고개를 돌렸기 때문이었다. 대현을 발견한 그가 헤드폰을 쑥 벗고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 지윤성! 미쳤냐고!”
“……어, 형? 언제 들어왔어요?”
윤성이 일어서자 자연스럽게 두 명의 시선도 따라 올라왔다. 일어서며 모든 행동을 멈춘 윤성 덕에 무언가 잘못되었는지 욕을 하는 진수와 헤드폰을 벗으며 해맑게 묻는 태영을 본 지웅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같은 막내인데 이렇게 다르냐.”
“다양성을 존중해 주시죠.”
“말을 말자.”
“고 말을 만 리더가 말했다.”
“진수 말이 맞다 이건. 진짜 재미없다 야.”
“와, 진짜 상처.”
“상처받은 척 극혐.”
“이라고 극혐이 말했다.”
“진지하게, 돈 주면 그만할래?”
“라고 현질 망해서 돈 없는 이진수가 말했다.”
어느새 시끄러워진 방에서 홀로 초조한 얼굴을 한 윤성이 대현에게 다가왔다. 대현이 뭐라 묻기도 전에 윤성에게서 먼저 질문이 건너왔다. 다급함이 느껴지는 어투에 대현이 윤성을 의아한 낯으로 응시했다.
“형. 어디 계셨었어요?”
“어? 나 지웅이 방에.”
“아…….”
“왜? 찾았어?”
“네. 아까 간식 먹는데 형 드리려고…….”
그제야 과자 봉지가 잔뜩 널려 있는 모니터 앞 풍경이 들어왔다. 과자를 받자마자 저에게 주겠다고 두리번거렸을 윤성이 어렵지 않게 상상됐다. 대현이 웃으며 윤성의 머리를 흩뜨렸다. 하여간 귀엽다니까.
“난 괜찮아. 맛있게 먹었어?”
“네. 형 근데…….”
“응?”
“죄송해요.”
“어? 뭐가?”
윤성이 미안해할 일이 뭐가 있지. 묘하게 시무룩한 그를 느낀 대현이 깜짝 놀라 윤성의 팔을 잡았다. 우물쭈물하던 윤성이 대현의 눈치를 보고는 제 옷을 쥐었다.
“……이거 ……묻었어요.”
대현 쪽으로 보여주는 후드 하단에 작은 얼룩이 져 있었다.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 대현을 흘끔 본 그가 조그맣게 덧붙였다.
“음료수 먹다가…… 죄송해요.”
“그게 왜 죄송할 일이야.”
“형이 주신 건데…… 자랑하려고 입고 왔다가 괜히…… 이럴 줄 알았으면 입고 오지 말걸.”
그제야 대현은 상황을 이해했다. 지금 윤성이 입고 있는 건 대현이 연말에 선물로 건넨 것이었다. 그는 대현이 준 후드에 음료를 흘렸다는 사실이 적잖이 신경 쓰였던 모양이다. 입고 온 걸 후회하는 듯한 얼굴을 본 대현은 그제야 윤성이 왜 답지 않게 스타일리스트에게 오늘 이 옷을 입겠다고 고집을 부렸는지를 알 것 같았다. 이게 뭐라고. 찡해오는 것 같은 마음을 뒤로 하고 대현이 다정하게 말을 건넸다.
“나한테 미안해할 필요가 뭐 있어. 네 건데.”
“그래도…….”
“숙소 가서 세탁하면 금방 지워질 거야. 아니면 또 사줄게, 형이.”
“……진짜요?”
“응. 진짜.”
한결 나아진 표정을 하는 윤성을 보고 마주 웃어준 대현이 고개를 돌렸다.
“와.”
“와.”
어쩐지 투닥거리는 소리가 안 들린다 싶더니, 어느새 다가와 나란히 선 채로 이쪽을 바라보는 태영과 진수의 입에서 나온 감탄사에 대현이 윤성의 팔을 잡고 있던 손을 뗐다.
“지윤성 가식 오져따리 오져따…… 와…….”
“저거 아까 음료 좀 흘렸다고 내 목 조르던 지윤성 아니지? 그냥 지윤성이랑 재수없게 똑같이 생긴 1인인 거지?”
“그만해라.”
“그??라~”
“그?해라~”
괜히 뻘쭘했다. 톤이 달라진 윤성의 말에도 놀림을 멈추지 않는 둘을 보던 대현이 시선을 돌렸다. 믿었던 지웅마저도 의외라는 얼굴로 둘을 바라보고 있는 걸 발견한 대현이 주의를 환기했다.
“다 같이 게임한다며.”
“어? 아, 맞아. 해야지, 게임. 야. 그만들 하고 따라와.”
그제야 기억났다는 표정을 한 지웅이 태영과 진수를 양 옆구리에 끼고 먼저 방을 나섰다.
“근데, 형. 우리 무슨 게임해요?”
“아직 안 정해진 거면 리더 바꾸기 이런 게임은 어떠신지?”
“누구 좋으라고.”
“물론 저희죠. 저도 옷 사주는 형 필요한데요.”
“옳소. 이태영 간만에 밥값 하는 말하네.”
“배은망덕한 놈들. 모니터 누가 사줬는데?”
“아하.”
“아하.”
한데 뭉쳐 방을 나가는 셋을 물끄러미 보던 대현이 윤성의 부름에 고개를 돌렸다.
“형. 저희도 가요.”
“……그래.”
평소라면 제가 했을 말을 먼저 꺼내는 윤성을 본 그가 멈칫했다. 그도 잠시 윤성처럼 옅은 미소를 띤 대현이 걸음을 옮겼다.
모든 게 신기했다. 카메라들이 늘어나고 감독이 지웅에게 무언가를 지시하고 있었다. 스태프들이 우르르 들어와 게임을 하기 위한 도구들로 거실을 채우고 있는 광경까지 넋을 놓고 지켜보던 대현이 이내 흠칫 놀라 한 걸음 물러섰다.
또다. 저 알 수 없는 윙크. 아까 게임을 해야 된다는 지웅에게 끌려나올 때만 해도 부루퉁하던 얼굴은 대현을 발견한 순간 자세를 똑바로 하고 저렇게 윙크를 하기 시작했다. 능청스러운 얼굴을 애써 무시한 대현이 슬금슬금 걸음을 옮겨 옆의 우람에게 좀 더 붙었다. 못마땅한 눈으로 거실을 둘러보고 있던 우람이 대현을 돌아봤다.
“왜.”
“아냐.”
어깨를 으쓱한 우람이 다시 고개를 돌리는 게 보였다. 대현이 제게 다가오는 지웅을 눈치채고는 눈을 깜빡였다.
“세팅 다 됐대. 시작하려고 하는데 괜찮지?”
“어? 어…….”
대현이 멤버들을 찾아 고개를 돌렸다.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리는 식, 옆에 서서 저를 돌아보는 우람, 진수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 제게 걸어오는 윤성을 확인한 대현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손에 든 큐카드를 정리한 지웅이 대현에게 씩 웃어주고는 거실의 중앙으로 걸어 나갔다. 흩어져 있던 모든 이들의 지웅에게 쏠렸다. 익숙하게 몰린 시선들을 소화한 지웅이 손을 들어 물었다.
“슬레이트 칠 사람?”
“저요!”
“나! 나!”
“나나 같은 소리 하네.”
“윤성이가 한번 해볼래?”
자리에서 방방 뛰는 태영과 진수, 시니컬하게 내뱉는 기용까지 가뿐히 무시한 지웅이 윤성에게 고개를 돌렸다. 오른쪽에 와 서던 윤성이 깜짝 놀라 대현을 쳐다봤다. 어떻게 해야 하냐는 듯한 눈빛이었다. 대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등을 슬쩍 밀어줬다. 어색하게 뒷목을 만지던 윤성이 나가서 슬레이트를 쳤다. 치기가 무섭게 후다닥 다시 자리로 돌아온 윤성을 본 대현이 픽 웃었다. 조금 붉게 달아오른 귓불을 바라본 대현이 손을 뻗어 윤성의 등을 토닥였다.
“자, 본격적으로 게임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간단한 인사부터 드릴까요? 저부터 할게요. 안녕하세요. 오늘 일일mc를 맡은 김지웅이라고 합니다.”
“와아아아아아……”
“함성이 약하네요.”
“와아아아아아악!”
“지금은 너무 시끄럽구요.”
촬영이 시작되었다. 불이 들어온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한 지웅이 능숙하게 말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손에 든 큐카드는 별로 보지도 않고 술술 말을 이어나가는 그가 신기했다. 긴장한 모습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 예스의 멤버들까지 확인한 대현이 어색하게 고개를 돌렸다.
지금 그들은 가운데에 선 지웅을 주축으로 예스는 오른쪽, 플러그는 왼쪽에 모여 서 있었다. 지웅 옆에는 우람이 있었고 그 다음에는 대현, 옆에는 윤성, 그리고 끝에는 식이 있었다. 시끌시끌한 예스 쪽과 다르게 플러그 쪽은 차분했다.
“오늘 저희 숙소에 특별한 손님이 찾아주셨죠? 친구 특집을 맞아 초대한 손님들입니다. 플러그!”
“플! 러! 그!”
“플! 러! 그!”
얼굴 가득 미소를 지으며 큐카드 든 손을 플러그 쪽으로 펼치는 지웅을 따라 앞의 카메라들이 대현이 선 쪽으로 돌려졌다. 눈앞에 가득한 카메라들을 어리벙벙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대현이 갑자기 거리를 좁혀 다가온 지웅에 눈을 크게 떴다.
“와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일단 대표로 우리 플러그 리더님의 소감을 한번 들어볼까요?”
손에 든 마이크를 대현 쪽으로 내미는 얼굴이 장난스러웠다. 대현이 어색하게 입을 열었다.
“어, 초대……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야말로 초대에 응해주셔서 감사하죠. 지후 씨, 잠시 이쪽으로 와주시겠어요?”
“……네?”
흐뭇한 얼굴로 대현의 인사를 듣던 지웅이 갑자기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엉겁결에 그의 손에 끌려간 대현이 제게 내밀어진 큐카드 뭉텅이를 내려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