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지금도 그랬다. 계기판을 바라보고 꼿꼿이 서 있는 식과 달리 거울에 딱 달라붙어 삼초에 한 번씩 하품을 해대던 예준이 꺼낸 말은 웬만한 일에는 별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 편인 식이 어이없는 표정을 하고 돌아보게 하는 힘이 있었다.
“……좋겠네.”
“넌 나 몰라?”
“어떨 거 같은데.”
시트콤을 촬영하며 세 달을 넘게 같은 촬영장에 있었다. 비록 같이 붙는 장면은 많지 않았다지만 그래도 한 컷에 잡힌 건 식이 기억하는 것만 해도 한 손가락을 훌쩍 넘기고도 남았다. 여간해서는 촬영장 밖의 친목현장에 끼지 않는 식도 함께 출연한 배우들의 이름까지는 알았다.
더 짜증나는 건 저게 사람을 엿 먹이려고 그러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아서다. 잠시 회상에 빠졌던 식이 제 몸 위에 진 그림자를 느끼고는 눈을 천천히 치켜떴다. 어느새 다가온 예준이 한 뼘 정도의 거리를 두고 가만히 식을 응시하고 있었다.
“너 냄새 좋다.”
이 또라이 새끼가 진짜. 결국 포커페이스를 포기하고 예준을 밀쳐 낸 식이 방금 그가 코를 박고 킁킁대느라 구겨진 셔츠의 깃을 정리했다. 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예준을 노려본 식이 걸음을 옮겼다.
“향수 뭐 써? 아님 바디로션?”
“…….”
“알려주라. 나 향수 바꿔야 된단 말야.”
가볍게 무시한 식이 작가에게 들었던 호수를 기억해 내며 걸음을 옮겼다. 제 숙소임에도 이끌 생각은 않고 되레 식을 졸졸 따라오던 예준이 걸음을 멈췄다. 이유는 간단했다. 식이 멈춰 섰으니까. 그의 시선이 닫힌 문을 향했다. 제작진이 알려주지 않은 사항이었다. 그들을 탓할 수는 없는 문제였다. 당연히 예준이 문을 열 거라 생각했겠지.
제작진의 추측을 훌륭하게 비껴간 예준은 앵무새처럼 질문을 반복하고 있을 뿐이었다. 식이 한숨을 쉬며 예준을 응시했다.
“문 좀 열지 그래.”
“향수 뭐 쓰는데.”
“문 열라고.”
“향수 알려주면.”
독한 새끼. 앞에 선 해맑은 얼굴은 멀쩡한 사람의 혈압을 높이는 데 탁월한 재주가 있었다. 이를 가는 식을 보면서도 싱글벙글 웃는 예준은 묻지도 않은 정보까지 술술 불고 있었다.
“마음에 드는 사람한테 어필하는 방법 중 하나가 기억할 만한 좋은 냄새를 가지는 거래.”
“어쩌라고.”
“너 냄새 좋으니까 알려줘. 나 관심 있는 사람한테 잘 보이고 싶어.”
저 새끼한테 관심 받는 사람은 누굴까. 저런 또라이가 부끄러운 티를 내면서까지 말하는 사람이 누군지 알고 싶기도, 알고 싶지 않기도 했다. 어이없는 눈으로 그를 잠시 응시하던 식이 한숨을 쉬며 기억나는 향수 이름을 아무렇게나 뱉었다.
불…… 가리…… 잊지 않으려는 듯 여러 번 중얼거리는 얼굴을 노려보던 식이 손목에 찬 시계를 확인했다. 앞의 또라이 때문에 벌써 십분이나 지체했다. 아니었으면 벌써 지후의 얼굴을 보고도 남았을 시간이다. 식이 꽉 문 잇새로 분노를 담아 말했다.
“됐지? 문 열어, 이제.”
“확실한 거지?”
“어. 그러니까 열라고.”
지후는 왜 이런 또라이 같은 새끼가 있는 그룹과 친한 걸까. 이제는 그런 의문까지 들 지경이었다. 더 이상 중얼거리지 않는 걸 보니 외우길 성공한 모양이다. 밝은 얼굴로 저를 쳐다보는 예준을 본 식이 지친 얼굴로 문을 턱짓했다. 식의 턱짓을 따라 문을 본 예준이 다가가 도어락을 여는 것 대신 멀뚱히 서 식을 응시하고 있었다. 불안한 느낌에 식이 한 쪽 눈썹을 찡그렸다.
“근데 있잖아.”
“…….”
“나 비번 까먹었어.”
눈앞의 얼굴은 이번에도 그의 0에 수렴하는 기대를 훌륭하게 바닥에 처박고 있었다.
“미친…….”
“왜?”
“강예준 온대.”
“아…… 광고 미팅 있다고 하지 않았어?”
“몰라. 아, 매니저 형이 오래 걸릴 거래서 마음 놓고 있었는데. 또 엄청 시끄럽게 생겼네.”
“어?”
제작진과 통화를 마치고 자리에 돌아온 지웅이 골치 아픈 얼굴을 했다. 대현이 뭐라 대꾸를 하기도 전에 벨소리가 울렸다. 올 것이 왔다는 표정으로 일어서는 지웅을 따라 거실로 나간 대현이 마주한 의외의 인물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럴 만했던 게, 촬영을 하러 갔던 식이 눈앞에 있었다.
“안녕. 안 그래도 온다고 들었어.”
“안녕하세요.”
지웅은 식이 오는 것도 알고 있었는지 특유의 사람 좋은 얼굴로 인사까지 건네고 있었다. 문을 열어준 지웅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한 식이 살벌한 눈빛으로 들어서다가 대현을 보고는 멈칫했다. 찌푸려져 있던 미간이 조금 판판해졌다. 놀란 얼굴을 하고서도 식에게 걸어가던 대현이 발을 떼지 못하고 멈춰 섰다.
“역시 사진은 실물을 따라갈 수가 없어.”
“…….”
“봐.”
앞을 막고 선 예준 때문이었다. 뜬금없는 대화의 시작에 어색하게 저를 보는 대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핸드폰으로 무언가를 타이핑한 후 대현에게 들이대는 그는 당당했다. 홀린 듯 그가 내민 핸드폰 화면을 본 대현이 멍한 표정을 했다.
“…….”
“…….”
어떻게 찾았을까 싶은 사진이었다. 데뷔 초인 게 분명해 보이는 지후의 얼굴이 화면 가득 떠 있었다. 그것도 밑에서 찍었는지 이목구비가 평소보다 두 배로 팽창되어 나온, 쌍꺼풀 라인을 넘어 잔뜩 칠해진 아이라인까지 보이는. 팬들까지도 은근슬쩍 외면하고 마는 사진 말이다.
시비를 거는 거라기에는 표정이 너무나도 해맑았다. 어이없음에 입을 떡 벌린 제 반응을 어떻게 해석한 건지 반짝반짝 빛나는 눈을 하는 그를 본 대현은 그제야 예준의 이야기만 나와도 골치 아픈 표정을 하던 지웅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런 또라이가 누군가의 이름을 물어보는 거면 놀라는 건 둘째 치고 경계해야 할 일이 맞을 수도 있다. 그를 전해준 지웅의 의도는 조심하라는 거였을 수도. 대현이 경계하는 눈빛을 하고 슬쩍 뒷걸음질쳤다.
“너…….”
그때였다. 식이 다가온 건. 어딘가 창백해진 얼굴을 한 식이 예준의 어깨를 잡고 대현에게서 그를 떼어냈다.
“아니지.”
“엉?”
“아니잖아. 야. 아니라고 해.”
윽박지르듯 내뱉는 식의 강렬한 눈빛이 예준의 태평한 얼굴로 쏟아지고 있었다. 말끝에 대현 쪽으로 고개를 돌려 그의 흘끔 본 식이 예준의 어깨를 세게 그러쥐는 게 보였다. 물론 멀쩡한 대답을 내놓으면 그거야말로 예준이 할 법한 행동이 아니었다. 멀뚱히 제 어깨를 잡은 식을 보던 예준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현에게 고개를 돌렸다.
“얘 이상해.”
이르듯 말하는 예준을 본 대현은 어이가 없었다. 네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요. 입을 열려던 대현이 결국 포기하고는 다시 식에게 시선을 돌렸다.
“식아, 너 온다는 얘기 못 들었는데. 촬영은?”
“……끝났어요. 생각보다 빨리 끝나서 오겠다고 진수 형한테 말씀 드렸더니 데려다주셨고.”
“아…… 근데 너 괜찮겠어? 피곤할 텐데.”
“괜찮아요, 전.”
한숨을 쉰 식이 예준의 어깨를 놓는 게 보였다. 몸을 아예 대현 쪽으로 돌린 그가 질문에 착실히 답했다. 네가 그렇다면 다행이긴 한데…… 말을 흐리던 대현이 식의 옷깃에 묻은 먼지를 발견하고는 손을 뻗었다. 느닷없는 행동에 당황한 건지 식이 눈을 데룩 굴렸다. 먼지를 떼낸 대현이 식에게 보여주며 웃었다.
“뭘 이렇게 묻히고 다녀.”
“아…….”
대답 대신 눈을 두어 번 깜빡이는 식을 보던 대현이 시선을 느끼고는 고개를 돌렸다.
예준이 대현과 식을 번갈아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머무른 곳은 방금 식에게서 떼어낸 먼지가 묻어 있는 대현의 손가락 끝이었는데, 뚫어버릴 듯한 시선에 괜히 꿀꺽 침을 삼킨 대현이 손을 쓱 내렸다.
“역시 냄새가 중요하구나.”
“……뭐?”
“나도 얼른 주문해야지. 벌거리.”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린 예준이 어딘가로 달려갔다. 벌거리? 예준이 남기고 간 말을 곱씹던 대현이 곧 더 생각하기를 포기하고 고개를 돌렸다. 알아내려고 해봤자 알 수 있을 것 같지도 않고.
어쨌든 정신없게 만들었던 사람이 사라지자 거실이 조용했다. 그리고 대현은 그제야 지웅이 사라졌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도망이라도 간 거 아냐? 제작진에게 전화를 받은 순간부터 십년은 늙은 것 같은 표정을 짓던 그를 떠올린 대현이 거실을 두리번거리며 터무니없는 생각까지 할 때였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복도를 걸어오던 지웅과 그 뒤를 따라오는 기용과 우람을 확인한 대현이 지웅과 시선을 마주했다.
“이렇게 된 거 게임이나 하게.”
대현이 묻기도 전에 대답하는 얼굴에서 벌써부터 피곤함이 묻어났다. 그러나 동시에 피할 수 없다면 이겨내기라도 해야 된다는 결연함이 묻어나기도 하는 얼굴이기도 했다. 대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암묵적인 동의를 표했다.
“뭐야. 얘 왜 여기 있어.”
“따뜻한 환영 감사드려요.”
“아오.”
기용과 이야기를 나누며 걸어오던 우람이 식을 발견하고는 경악하며 물었다. 지지 않고 비꼬는 식에게 반박하려던 그가 대현의 눈치를 봤다. 대현이 고개를 젓자 우람은 한숨을 쉬곤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자연스레 거실에 있는 이 모두의 시선이 지웅과 대현을 향했다. 손가락을 들어 인원수를 세는 듯하던 지웅이 슬쩍 미간을 모았다. 그가 누군가를 찾듯 거실을 두리번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