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최애와 거리두기-53화 (53/119)

53화

“야, 뭔데.”

결국 삐딱하게 말이 나가고 나서야 웃는 걸 멈춘 지웅이 웃음을 완전히 지우지는 못한 낯으로 말을 이었다.

“아, 미안. 네 표정이 너무 웃겨서.”

“무슨…….”

“괜찮아. 내가 말했잖아. 특별하게 하는 거 없을 거라고. 그리고 어차피 좀 이따 모여서 게임할 거야.”

“……그래도.”

“괜찮다니까. 근데 너 왜 이렇게 긴장했냐. 귀엽게.”

웃음을 터뜨렸던 이유가 잔뜩 긴장한 대현을 느껴서인 모양이었다. 신기하다는 눈빛으로 저를 살피는 지웅을 느낀 대현이 부러 미간을 찌푸리며 그의 어깨를 툭 쳤다. 아야. 엄살을 부리며 아픈 표정을 지어 보이던 지웅이 다시 대현의 팔을 끌었다.

“어쨌든 가자. 나 들려주고 싶은 곡 또 생겼어.”

“어어…….”

윤성이야 걱정 없지만, 친한 사람도 없는 우람이 마음에 걸린 대현이 지웅의 팔을 슬쩍 밀고는 뒤를 돌아봤다. 눈이 마주치자 우람이 대현을 향해 손을 휘휘 저어 보였다. 신경 쓰지 말라는 뜻인 듯했다. 문가에 섰던 기용이 그에게 말을 거는 듯 몸을 굽히는 것까지 확인한 대현이 어딘가 찝찝한 마음으로 지웅의 뒤통수에 대고 질문했다.

“너네 멤버들…… 이게 다였나?”

“아니. 개인 스케줄 간 애들 있어. 두 명. 은빈이는 뮤지컬 촬영 중이고, 또라…… 아니, 예준이는 광고 미팅.”

“아…….”

“다행이지.”

그러고 보니 없다. 그제야 저번에 저를 경악하게 했던 전라의 남자가 보이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대현이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멈칫했다. 끝에 소리를 죽여 덧붙인 지웅의 말이 신경 쓰여서였다.

“다행이라고?”

“봤잖아, 저번에.”

여섯 글자로 설명이 끝날 수 있는 일이었다. 저만큼이나 당황해 하얀 등 위로 파를 내려치던 지웅을 떠올린 대현이 알아들은 표정을 하고는 방에 들어섰다. 대현이 올 걸 알고 미리 준비해 두었는지 작업실 안에 나란히 놓인 의자가 보였다. 의자에 앉자마자 건네진 악보를 살펴보던 대현이 시선을 느끼곤 고개를 들었다. 무언가를 찾는 듯 작업대를 뒤적이던 지웅이 행동을 멈추고 대현을 돌아보고 있었다. 시선을 나누던 그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뜬금없는 소리를 했다.

“하여간 인기 많아, 이지후.”

장난기가 묻어나는 음성이었다. 그렇지만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어리둥절한 대현의 얼굴을 바라본 지웅이 설명을 덧붙였다.

“살다 보니 강예준이 이름 물어보는 것도 다 보고.”

“……나?”

“그래. 너. 우리 다 얼마나 깜짝 놀랐는지 아냐.”

강예준이면 그 전라의 사내를 말하는 모양이었다. 얼굴과 이름을 매치시키는 데 성공한 대현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이름 물어본 게 왜? 그냥 궁금해서 물어봤겠지.”

전라를 보여준 사람이니 궁금해할 만도 하지 않나. 곰곰이 생각해 봐도 딱히 특별한 일은 아닌 것 같았다. 그 일을 특별한 일인 양 말하는 지웅이 더 신기했다.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 표정을 짓고 있는 대현을 본 지웅이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다.”

“……어?”

“처음 본 거여서 나도. 뭐라 확답은 못하겠네.”

의뭉스럽게 말을 뭉갠 지웅이 자연스럽게 대화의 주제를 전환했다.

“여기서 막혔거든. 코드가 너무 단조로워서 그런가? 네가 보기엔 어때.”

뭘 처음 봤다는 거지. 그럼 여태껏 전라를 보여준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는 이름조차 안 물어봤단 말인가. 생각할수록 이상했지만 그럼에도 전라의 예준이 제 이름을 묻는 장면은 어렵지 않게 상상이 가능했다. 아무래도 첫인상이 너무 강렬했던 모양이다. 고개를 저어 예준의 이미지를 머릿속에서 몰아낸 대현이 한 박자 늦은 대답을 했다.

“모르겠어. 보기에는 괜찮아 보이는데. 작업은 했어?”

“어. 틀어볼까?”

“응.”

안 그래도 걱정할 거리가 산더미인데, 타 그룹의 범상치 않은 사람까지 굳이 얹을 필요는 없다. 그렇게 정리를 마친 대현이 다시 시선을 내려 악보를 읽어 내려갔다.

촬영은 놀라울 정도로 빨리 끝났다. 거기다 새롭게 촬영한 장면은 이전에 했던 촬영의 완성본과 별 차이도 없어 보여서, 굳이 제가 올 필요가 있었나 싶을 정도였다. 촬영한 시간보다 지나가던 스태프들한테 붙잡혀 신인상 수상을 축하한다는 말을 듣던 시간이 더 긴 것 같다. 피곤한 낯을 한 식이 시계를 무감각하게 응시했다. 텅 빈 대기실에는 제가 신은 검은색 로퍼가 가끔 바닥과 부딪쳐 내는 딸깍 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복도를 울리는 발소리에 그의 고개가 들렸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대기실로 들어온 진수를 본 그가 느릿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미안. 늦었지.”

“아니에요.”

“애들 데려다 주고 오느라. 아니, 촬영은 왜 이렇게 일찍 끝난 거야? 이럴 줄 알았으면 성호 대기시켰지.”

“괜찮아요, 형. 가요.”

“어어, 그래.”

지하주차장으로 가는 내내 진수는 끊임없이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차가 막혔다느니, 오는 길에 감독을 만났는데 네 칭찬을 하더라니 등의 사소한 이야기였다. 간혹 고개를 끄덕이며 듣던 식이 진수의 말을 끊은 건 그의 입에서 멤버들을 예스 숙소에 데려다 주며 생긴 에피소드가 나올 때쯤이었다.

“형.”

“어?”

타 그룹의 리얼리티를 찍고 있는 제작진들마저 네 수상 소식을 알고 있더라며 뿌듯한 얼굴을 하던 진수가 식의 부름에 하던 말을 멈추고 백미러로 식을 흘끔거렸다.

“몇 시쯤 데려다 줬어요?”

“어? 뭐. 애들?”

“네.”

“지금이 6시니까…… 한 4시쯤 데려다준 것 같은데. 왜?”

식이 대답 대신 또 다른 질문을 했다.

“여기서 안 멀죠?”

“……거기? 왜. 너 가게?”

평소라면 관심도 없을 일을 자꾸 묻는 식이 신기했다. 백미러로 식을 살피던 진수가 장난스레 묻다 멈칫했다. 당연히 아니라는 말을 뱉을 줄 알았던 식이 생각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쯤 얼떨떨한 표정을 짓던 진수가 머리를 긁적이며 식을 돌아봤다.

“아니, 뭐…… 아까 제작진들도 너 왔으면 좋았겠다고 하긴 하던데. 뭐야. 너 진짜 갈 거야?”

“가도 돼요?”

“어?”

“되는 거면 갈래요.”

“진짜?”

“네.”

“너 안 피곤하겠어?”

“괜찮아요.”

단호한 말투였다. 할 말은 끝났다는 듯 다시 보고 있던 책으로 고개를 떨구는 얼굴을 훔쳐보던 진수가 결국 핸들을 틀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으면서도 그의 손은 착실하게 아까 받아놓은 제작진의 번호로 전화를 걸고 있었다.

“예, 안녕하세요. 저 아까 뵈었던 플러그 매니저 김진수라고 합니다. 네. 하하. 다름이 아니라…….”

방금 당황했던 사람이라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넉살 좋게 말을 이어가는 그의 음성을 한 귀로 흘리며 보고 있던 페이지를 넘기던 식의 입 꼬리가 작은 호선을 그렸다.

진수의 말이 과장이 아니었던 듯, 식을 본 감독은 환한 얼굴을 했다. 식은 예능 출연을 잘 하지 않는 편이었다. 플러그에 들어가기 이전부터 그를 배우로 포지셔닝한 소속사에서 권장한 바이기도 했고, 식도 굳이 예능에 나갈 필요성을 못 느꼈다.

예스의 리얼리티를 맡은 감독도 그걸 아는 듯했다. 거기다 신인상까지 받은 아이돌인 그는 화제성 측면에서도 꽤 괜찮은 미끼일 거였다. 편집 잘 해줄 테니 앞으로도 자주 나와달라는 말을 하는 그의 속이 뻔히 읽혔음에도 식이 옅은 미소를 띠고는 감사 인사를 했다. 감사합니다, 감독님.

“지금은 각자 방에 있대요. 둘 투입하면서 게임 시작하라고 해도 될 것 같아요.”

숙소에 들어가 있다는 카메라 감독에게 전화를 하고 온 보조감독이 다가와 전했다. 어, 그렇게 해. 고개를 끄덕이며 답하는 감독의 말을 듣던 식이 방금 들은 문장에서 거슬리는 부분을 되짚었다.

둘? 저 말고도 누군가 있다는 소리였다. 주위를 짧게 훑었지만 딱히 보이는 이가 없었다. 설마 유은호는 아니겠지. 오랜만에 떠올려 보는 이름에 미간을 찌푸리다 말고 그가 멈칫했다. 그제야 멀리서 다가오는 사람을 눈치챈 탓이었다.

“……하.”

답지 않게 눈 크기를 키운 그가 제 앞으로 다가선 남자를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응시했다.

“어, 예준 씨. 왔어?”

앞의 감독은 확인사살까지 시켜줬다. 저 새끼, 예스였나. 식이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었다.

예준과는 예전에 시트콤을 함께 촬영한 적이 있었다. 식은 기본적으로 타인을 파악하는 데 능숙했다. 몇 번을 보면 패턴이 읽히고, 한 번 패턴이 읽히면 성격을 파악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런 식이 파악하지 못한, 아니 파악하길 포기한 사람이 한 명 있었다. 그게 바로 예준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파악하긴 했구나.

“나 너 아는 것 같아.”

웬만해서는 마주치고 싶지 않은 또라이로 말이지.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