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최애와 거리두기-52화 (52/119)

52화

“사고 치지 말고.”

“아, 우리가 애예요?”

“너한테 나올 말은 아니라고 본다. 한우람.”

밴으로 태워주는 내내 계속된 진수의 잔소리를 듣다 못한 우람이 결국 볼멘소리를 내뱉었다. 대현이 몸을 돌려 뒤를 봤다. 바로 눈이 마주친 우람이 찔끔한 표정으로 입을 다무는 게 보였다. 뭐라 할 생각으로 본 게 아니었는데도 혼날까 봐 바로 딴청을 피우는 그가 웃겼다.

그래도 덕분에 긴장은 좀 풀린 것 같았다. 티는 안 내려고 노력 중이었지만 사실 대현은 긴장한 상태였다. 지후의 몸에 들어와 처음 해보는 방송 활동이었다. 아무리 플러그가 예능에 얼굴을 비추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해도, 연예계에서의 삼 년간의 경험이 있는 그들 사이에서 혼자만 튀는 행동을 할까 봐 겁이 났다.

물론 지웅이 카메라 감독님 한 분 외에는 스태프들도 최소화한 상태에서 진행되는 촬영이니 걱정 말라고 강조하긴 했지만 그래도 기록으로 남을 수 있는 카메라 앞에 서서 연예인처럼 행동해야 된다는 게 기분이 이상하고도 무서웠다. 떠는 기색 하나 없는 우람과 윤성이 신기하기도 했다.

윤성은 지금 만나러 가는 예스의 막내들과의 단체 메시지방에 집중한 상태였고, 진수의 말에 종종 반격하는 우람의 얼굴에는 긴장감보다는 친하지 않은 아이들과 만나러 가야 된다는 사실이 주는 불만스러움이 떠 있었다. 그래도 그가 오겠다고 한 건 확실히 의외긴 했다. 물론 그마저도 식과의 쓸데없는 경쟁에서 결정된 일이긴 했다지만. 식이 급하게 잡힌 추가 촬영으로 인해 오지 못할 것 같다는 소식에 만족스러운 얼굴을 하던 우람을 떠올린 대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여간 징하게도 싸워댄다고 생각하며.

그러는 사이 밴이 멈춰 섰다. 도착한 모양이었다. 기어를 중립으로 놓고 돌아본 진수가 대현에게 당부했다.

“지후야, 형은 너만 믿는다. 믿어도 되지?”

“네, 형. 걱정 마세요. 가벼운 촬영이랬으니까 걱정하시는 일은 없을 거예요.”

“알지…… 그래도 왜 하필 그게 리얼리티라서…….”

한숨을 푹푹 쉬며 말을 흐리는 그를 보다 못한 대현이 결국 주의를 돌렸다.

“형. 제가 아까 선물 앞에 놓아뒀었는데.”

“아, 어. 잠시만.”

조수석 밑에 놓아둔 종이봉투를 주우려 등을 구부리는 진수를 잠깐 바라본 대현이 고개를 돌려 윤성과 우람을 살폈다. 나갈 준비를 다한 그들이 대현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여전히 긴장한 기색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얼굴들이었다. 대현이 진수에게 건네받은 봉투를 쥐고는 둘에게 물었다.

“갈까?”

“네!”

“어.”

눈을 반짝이는 윤성과 뚱하게 대답하는 우람까지 확인한 대현이 숨을 크게 들이쉬고는 문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지웅에게 전해 들었던 대로, 스태프들은 밖에서 플러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밴에서 내리자마자 다가온 그들의 손에 들린 핀 마이크를 본 대현이 애써 마음을 진정시키며 꾸벅 허리를 숙였다.

“야. 근데 너 손에 든 건 뭐냐.”

“…….”

“이지후.”

“어?”

“그거 뭐냐고.”

멍하니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계기판을 보고 있던 대현이 그제야 정신 차리고 뒤를 돌아봤다. 거울에 삐딱하게 기댄 우람이 눈썹 한쪽을 들어 올리며 대현을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흘리듯 들었던 말을 떠올린 대현이 아, 하는 짧은 신음을 내며 종이봉투를 열었다. 별말이 없었던 윤성도 궁금하긴 했는지 대현의 옆으로 다가서 종이봉투 안을 힐끗거렸다. 봉투 안에 든 네모난 상자를 둘 쪽으로  들어 보인 대현이 설명했다.

“아. 간단하게 선물 샀어. 그래도 집에 놀러 가는 건데, 빈손으로 가면 좀 그럴 것 같아서.”

“야. 그걸 왜 너 혼자 사. 얼마 썼는데.”

“형. 혼자 사러 가셨었어요? 저랑 같이 가시지.”

말을 건네자마자 건너온 반응은 생각보다 격렬했다. 어느새 대현의 손에 들린 상자를 뺏은 우람이 상자를 조심성 없이 흔들었다. 상자를 이리저리 뒤집던 그가 왜 가격표가 안 보이냐고 짜증을 냈다. 가만 두면 예쁘게 포장되어 있는 상자까지 열어 확인할 기세인 그를 보다 못한 대현이 결국 그에게서 상자를 뺏어 들었다.

“그러다 뜯어지겠다.”

“뭔데 이거?”

잔뜩 찌푸려진 얼굴을 하고도 상자를 순순히 넘긴 우람이 불만스레 물었다. 쉽게 물러설 것 같지 않은 그의 기세에 대현이 상자를 다시 봉투에 넣으며 대답했다.

“디퓨져.”

“뭔데 그게. 혹시 향기 존나 나는 거, 그건가?”

“형. 욕…….”

대현이 혼자 선물을 사러 갔다는 사실이 그렇게도 속상했던 건지, 서운한 표정으로 가만히 서 있던 윤성이 깜짝 놀라 우람을 불렀다. 덩달아 놀란 대현도 빠르게 주위를 살폈다. 다행히 엘리베이터 안에는 셋뿐이었다. 알고 있으면서도 주위를 둘러본 이유는 깜짝 놀라서였다.

숙소에 들어서면서부터 촬영이 시작된다는 말을 남긴 제작진은 층수만 알려주고 그들과 함께 엘리베이터에 타지 않았다. 정말 지웅의 말대로 스태프의 개입을 최소화한 상태로 이뤄지는 촬영인 모양이었다. 새삼 감사하게까지 느껴지는 사실을 떠올리며 대현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어진 대현의 단호한 부름에 우람이 움찔했다.

“한우람.”

“……미안.”

뱉은 후 잠깐 우람의 얼굴의 스쳤던 표정을 보니 의도하고 한 욕은 아닌 것 같았다. 당황한 얼굴로 바로 사과를 해오는 우람을 본 대현이 짧게 한숨을 쉬었다. 촬영을 한다는 사실에 너무 긴장해서 우람과 윤성을 신경 쓰지 못했다. 진수의 당부까지 들어놓고도. 대현이 우람과 눈을 맞췄다.

“너 안에 들어가서는 그러면 안 되는 거 알지?”

“……알아. 방금은…… 순간 나도 모르게, 그러니까…… 미안하다고.”

답지 않게 순순히 사과하는 우람은 어딘가 시무룩해 보였다. 자책의 빛이 스쳐 지나가는 얼굴을 본 대현의 마음이 약해졌다. 그러고 보니 안에 들어가면 대현에겐 지웅이 있고, 윤성은 진수가 있지만 우람은 그중 딱히 친한 멤버들이 없었다. 그럼에도 촬영에 오겠다 한 건 대현과 했던 약속을 떠올렸기 때문이리라. 연습실에서 그가 발간 눈가로 전해왔던 말. 열심히 하겠다고 다짐하듯 중얼거렸던 그를 떠올린 대현이 우람의 어깨를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너랑 친한 멤버 없는 그룹인 건 알아. 근데 내가 저번에 여기 왔을 때 느꼈던 건데, 좋은 애들이더라고 다들. 어딘가 순서가 뒤바뀌긴 했지만, 이번 기회로 친해져도 좋을 것 같고.”

말을 마친 대현이 고개를 오른쪽으로 꺾어 고개를 숙인 우람에게로 가까이 다가갔다. 엘리베이터 바닥을 운동화 끝으로 툭툭 차던 우람이 지나치게 가까운 대현의 얼굴에 움찔했다.

“응?”

“알았어. 알았다고.”

대답을 기다리듯 저를 바라보는 눈을 결국 마주한 우람이 툴툴거리며 대현의 얼굴을 슬쩍 밀었다. 한결 나아진 얼굴을 확인한 대현이 웃으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둘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윤성이 안심한 얼굴로 자연스레 대현의 뒤에 따라붙었다.

그래도 얼마 전에 와봤다고 복도가 익숙하다. 제작진이 알려준 호수를 굳이 상기할 필요 없이도 발이 이끄는 대로 걸어가던 대현이 그제야 복도를 울리는 소음을 눈치채고는 눈을 깜빡거렸다. 소란은 복도 끝에 위치한 곳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대현이 기억하는 예스의 숙소의 위치이기도 했다. 왁자지껄함이 문을 뚫고 복도까지 흘러나오는 것에 대현은 제대로 찾아온 게 맞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옆에 선 우람이 황당한 얼굴로 문을 가리켰다.

“……설마 여기냐?”

왜 자신이 다 머쓱해지는지 모를 일이다. 작게 고개를 끄덕인 대현이 손을 뻗어 벨을 눌렀다. 딩동. 그리고 거짓말같이 소음이 멎었다. 우당탕탕 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곧 문이 열렸다.

“내가 열 거라고!”

“아, 이진수! 너 지금 내 발 밟고 있다고! 아악!”

문틈으로 얼굴을 내민 사람은 태영과 진수였다. 그러나 우람과 대현, 윤성이 왜 왔는지조차 잊은 것처럼 투닥대고 있는 둘은 셋이 들어갈 수 있게 문을 열어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당황한 빛을 띠던 대현의 얼굴이 그들 뒤에 선 얼굴을 발견하고는 밝아졌다.

“야, 비켜봐.”

지웅이었다. 문고리를 잡은 둘의 머리 위로 사이좋게 꿀밤을 놓은 지웅이 민망한 표정으로 문을 활짝 열어줬다. 눈을 맞춘 그가 예의 그 멀끔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셋을 맞았다.

“왔네.”

“응.”

“미안. 애들이 너네 온다니까 신나가지고.”

“아냐.”

들어오라는 제스처를 하는 지웅을 따라 걸음을 옮기던 대현이 멈칫했다. 경계 어린 눈을 하고서도 별말 없이 신발을 벗고 있는 우람을 확인한 대현이 윤성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윤성은 멀지 않은 곳에서 진수, 태영과 서 있었다.

“야, 얼른 와. 게임하게. 이태영이랑은 도저히 못하겠어. 완전 허접.”

“이라고 정말 허접이 말했다.”

“너네 또 게임하고 있었냐.”

“라고 어제 밤 내내 접속해 있던 지윤성이 말했다.”

“아, 이태영. 그 드립 노잼이라고.”

“라고 진짜 노잼이 말했다.”

“말을 말자.”

거실 한쪽에 모여 아웅다웅하는 셋을 발견한 대현의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저를 따르던 때와는 또 다르게 눈을 빛내는 윤성이 귀여웠다. 잠깐 본 건데도 숙소에서는 보지 못한 윤성의 표정이 여럿 보였다. 신기한 듯 바라보던 대현이 제 팔을 잡는 손길에 고개를 돌렸다. 지웅이 대현의 팔을 끌고 있었다.

“가자.”

“어? 어딜?”

“어디긴. 내 방.”

“……그래도 돼? 촬영하고 있는 거 아냐, 지금?”

망설이며 자리에 멈춰선 대현을 돌아본 지웅이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뜬금없는 그의 호탕한 웃음에 대현이 슬쩍 눈썹을 들어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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