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Ch 3_3.)
새해 첫 날. 아침부터 분주히 움직였던 대현을 가장 먼저 맞아준 건 눈이었다. 다행히 통행에 불편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소리 없이 꽤 오래 지속된 덕에 걸음을 옮길 때마다 뽀득거리는 소리가 날 정도로는 눈이 쌓였다. 잠시 멈칫한 대현이 텅 빈 도로를 돌아보고는 어깨를 으쓱한 뒤 발 끝에 더 힘을 주어 언덕을 올라갔다.
한참을 걷자 누군가 치워놓은 듯한 길이 드러났다. 언덕 위에서부터 내려오는 차를 본 대현이 인도에 올라섰다. 익숙하게 언덕을 오른 그가 이내 한 건물 앞에서 멈춰 섰다. 때마침 건물 안에서 나오던 사람들이 반대편에서 걸어오는 대현을 흘깃거렸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쓰고 있던 모자를 더 눌러쓴 대현이 무색하게끔, 금방 시선을 돌린 그들은 바삐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무리가 지나가기 편하게 옆으로 조금 물러서 그들을 지켜보던 대현의 시선이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서 멎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녀의 발간 눈가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그녀의 뒷모습을 따라 시선을 옮기던 대현이 무리 끄트머리에 선 사람까지 언덕 아래로 사라지는 걸 확인하고서야 고개를 돌렸다.
oo추모공원.
손에 쥔 꽃을 고쳐 쥔 대현이 발을 뗐다. 건물을 끼고 돈 뒤 언덕으로 걸어가 오른쪽으로 한 번, 왼쪽으로 한 번. 그리고 성인 남성 기준으로 다섯 걸음을 더 걸으면 나오는 곳. 의식도 하기 전에 발이 자연스레 이끄는 곳에 다다른 대현이 제 허리께에 위치한 석물대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상단에 적힌 이름 부근에서 한참을 머물던 그의 시선이 내려갔다. 조심스레 석물대 앞에 꽃을 내려놓은 그는 시선을 아래로 떨군 채로 한참을 그렇게 더 서 있었다. 꾹 닫혀 있던 입이 열린 건 스스로도 꽤 시간이 흘렀다고 느꼈을 때였다.
“할머니.”
한 단어일 뿐인데, 허공에 내어놓자마자 약속이라도 하듯 몰려오는 그리움들은 이곳에 올 때마다 대현의 혀를 묶곤 한다. 잠긴 목을 정리하고 다시 입을 열 수 있던 건 또 한참이 지나서였다. 새벽의 어스름에 얼어가던 눈들이 쏟아지는 햇볕에 뚝뚝 눈물을 흘리기 시작할 때가 되어서야 입을 연 대현은 그제야 인사할 수 있었다.
“나 왔어.”
씩씩한 목소리와 달리 눈가가 촉촉했다. 누군가 살짝만 건드려도 울 것처럼.
“손자 얼굴이 좀 바뀌었는데, 못 알아보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이곳에 올 때마다 하곤 했던 혼잣말이지만 오늘은 유독 더 기분이 이상했다. 지후 외에는 입 밖으로 꺼내본 적이 없는 이야기여서 그런가. 주위에 아무도 없는 걸 진작 확인했음에도 혹시 모른다는 생각에 모자를 더 푹 눌러쓴 그가 말을 이었다.
“……나 오랜만에 왔다. 그치.”
미안함에 꺼낸 말이었지만 뱉자마자 떠오른 그녀의 얼굴은 뭐가 오랜만이냐며 오히려 대현의 말에 질색하듯 손을 흔들고 있었다. 대현의 입술을 가르고 작은 웃음이 새어나갔다.
“알아. 할머니는 내가 가끔씩 와야 더 좋아할 거라는 거. 그래도 알잖아. 나 진짜 노력하고 있는 거. 못 견딜 정도로 보고 싶어질 때만 오는 거야. 그래도 점점 간격이 늘어가고 있잖아. 그건 인정해 줘야 돼.”
투정을 부리듯 살짝 입까지 내민 그가 천천히 몸을 낮췄다. 조심스레 뻗은 손이 비석을 어루만졌다. 하얀 손 안에서 깊게 패인 글자들이 올록볼록 자신을 감췄다 드러냈다를 반복했다. 손끝으로 전해지는 차가움에 살짝 몸을 떨면서도 계속된 행동은 비석 위로 약간의 온기가 남을 때까지 지속됐다.
“그래도 할머니.”
허공에서 잠시 멈칫한 손이 이내 거둬졌다.
“요새는 진짜…… 별로 외롭지 않아. 더 정확히 말하면 외로울 틈이 없다는 게 옳겠지만.”
말을 뱉자마자 투닥투닥 싸우는 식과 우람, 그리고 그 옆에 서서 울상을 하고 있는 윤성까지 자연스레 떠올랐다. 그러는 사이 아까보다는 훨씬 자연스러운 미소가 대현의 얼굴에 떠 있었다. 말을 이어나가던 그가 멈칫했다. 잠깐의 침묵. 다시 입을 연 그가 한참을 머뭇거리다 내놓은 말은 한 번도 입 밖으로 내본 적이 없던 것이었다. 듣는 사람이 없음에도 한껏 목소리를 죽인 그가 작게 중얼거렸다.
“……사실 새해를 맞으면서 이렇게 외롭지 않았던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어.”
선우와 영민이 들으면 섭섭해할 말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실로 그랬다. 그들이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멤버들보다 존재감이 약하다거나 혹은 덜 소중하다거나 그런 건 절대 아니었다. 대현의 모든 소중한 순간들에 함께했던 친구들이었다. 때로는 대현보다 대현을 더 잘 아는 것 같은 사람들이기도 했다. 대신 목숨을 내놓으라 하면 망설임 없이 그럴 수 있을 것 같은 친구들.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가족이 있었고, 그들의 삶이 있었다. 그렇기에 항상 대현의 옆에 있을 수 없었다. 어쩌면 당연한 거였다. 그랬기에 대현은 감히 그 문제에 대해 욕심을 내본 적이 없었다. 말도 안 되는 거였다.
그렇지만…… 갑자기 몸이 바뀌어 시작된 숙소 생활은 대현의 기분을 이상하게 했다. 눈을 떠도, 밥을 먹을 때도, 심지어 잠에 들 때도 멤버들과 함께였다. 윤성, 우람, 식과의 관계가 개선되고서는 더했다. 마트를 가는 제 옆에 당연하다는 듯이 따라붙는 윤성과, 아침마다 제 입에 한 움큼 비타민을 털어 넣으려고 하는 우람, 제가 편집을 하고 있을 때마다 옆에 앉아 조용히 책을 읽고 있는 식. 그들이 대현의 삶을 쪼개고 흘러 들어왔다. 비어 있는지도 몰랐던 자리를 보란 듯이 차지한 그들의 존재감은 날로 커져 갔다. 대현은 슬슬 그 사실이 무섭게 느껴졌다.
“알아. 그래도 익숙해지면 안 되겠지.”
그래서 매번 이렇게 자신을 다잡곤 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다짐을 하듯 중얼거리던 대현이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몸을 돌리자마자 쏟아진 햇빛에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몇 번의 시도 끝에 꽤 그럴싸하게 웃을 수 있게 된 그가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어쨌든 나 괜찮아, 할머니.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알았지?”
그녀의 앞에 선 대현의 마지막 인사는 늘 같았다. 병실에서 제 손을 꽉 잡던 가냘픈 손목이 습관처럼 내뱉곤 하던 한 마디 때문이리라. 대현아, 괜찮지? 괜찮지 않을 때가 더 많았으나 대현은 매번 그렇다고 대답했고, 그녀는 슬픈 눈을 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손을 잡고 괜찮은 척을 해야 할 그녀가 없었지만 그래도 대현은 대답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대현이 흐리게 웃어 보였다.
“또 올게.”
바람 탓인지 방향이 조금 흐트러진 꽃다발을 정리해 놓아둔 그가 몸을 돌렸다. 입구에 도착해서야 뒤를 돌아본 그가 방금 제가 걸어온 방향으로 눈인사를 하듯 눈을 깜빡거렸다. 먼 곳을 응시하던 그의 눈이 점차 주위의 사물들로 거리를 좁혔고 끝내는 발밑에 녹아 있는 눈까지 내려다본 그가 곧 걸음을 옮겼다.
* * *
“형.”
“어?”
“바쁘세요?”
“아니. 왜?”
대현이 보고 있던 노트를 덮으며 고개를 들었다. 문가에 서서 대현을 바라보고 있던 식의 시선이 그가 방금 내려놓은 작곡 노트를 짧게 훑다 떨어졌다. 들어오라는 손짓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문가에 계속 서 있는 식을 의아하게 바라보던 대현이 결국 몸을 일으켰다.
“무슨 일 있어?”
“아니요. 그런 건 아닌데…….”
“응.”
답지 않게 말을 끌던 그가 망설이듯 꺼내놓은 말은 싱거웠다. 할 말의 끝이냐는 듯 쳐다보는 대현을 본 그가 물고 있던 입술을 놓으며 빠르게 중얼거렸다.
“……저 지금 나가거든요.”
민망한 듯 목을 매만지는 식을 본 대현이 눈을 깜빡거렸다. 새삼 신기했다. 밖에 나가기 전에 어딜 간다고 신고하는 멤버라니. 거기다 그 사람이 김 식이라니. 괜히 멋쩍은 기분이 들었다. 연말을 하루 앞둔 새벽, 현관문에서의 어색한 포옹 이후 놀라울 정도로 호의적으로 변한 그가 느껴졌지만 그래도 이렇게까지 해줄지는 몰랐다.
놀랄 만한 행동을 하는 건 자신이면서도 눈에 띄게 어색해하는 식을 보니 더더욱 그랬다. 덕분에 아무 생각 없던 대현마저 민망해지는 기분이었다. 상념에서 빠져 나온 대현이 뒤늦게 식의 말에 반응했다.
“지금?”
“네. 미팅 건 때문에.”
“……아.”
미팅이라면 저번에 말했던 그 광고 건 얘기하는 건가. 진수에게 대충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인 대현이 손을 들어 식의 어깨를 두어 번 다독였다.
“잘 하고 와. 말 안 해도 잘하겠지만. 떨지 말고.”
대답 대신 대현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식의 입에서 힘 빠진 미소가 터져 나왔다. 가만히 문가에 서서 사람을 쳐다보다가, 막상 다가가니 뜬금없이 자신이 가는 곳을 털어놓고, 혼자 웃기까지 하는 식의 행동을 종합해 보던 대현의 미간이 슬쩍 모아질 무렵이었다. 웃음을 멈춘 식이 대현을 응시했다. 어딘가 어색해 보였던 아까의 모습은 거짓말처럼 대현을 바라보던 눈이 자연스럽게 휘어졌다.
“솔직히 얘기하면서도 내가 왜 이런 얘기까지 하고 있지 싶었는데.”
잠시 말을 멈춘 식이 대현과 시선을 맞췄다.
“……알 것 같아요.”
“어?”
의미심장한 말에 무슨 뜻이냐 묻기도 전에 진수가 숙소로 들이닥쳤다. 식에게 얼른 나오라며 손짓을 하는 진수를 보던 대현이 그 뒤를 따라 나가는 식의 뒷모습을 멍하니 응시했다. 신발을 신고 문을 열던 식이 돌아봤다. 얼떨결에 마주한 대현이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작게 흔들었다. 식의 눈이 부드럽게 곡선을 그렸다.
“다녀올게요, 형.”
환하게 웃는 얼굴이 문 사이로 사라지고, 도어락이 잠기는 소리까지도 들었으면서도, 대현은 이상하게도 그 자리에서 한참을 움직일 수 없었다. 뒷목이 뜨거웠다. 갑자기 올라온 정체 모를 열에 고개를 갸웃한 대현이 느리게 자리를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