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카트 손잡이를 잡고 있던 대현을 부드럽게 밀어낸 식이 카트를 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뜬금없는 소리에 대현의 입에서 아, 하는 작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우람의 어머니께서 보내주신 떡을 맛있게 먹었던 걸 말하는 모양이었다. 오랜만에 먹는 떡이라 좋긴 했지만 그렇게까지 기억할 정도로 맛있게 먹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뭐, 그래도 떡을 좋아하는 건 사실이니까. 볼을 긁던 대현이 차마 부정하지는 못하고 대신 작은 웃음만 흘렸다.
그 사이 식은 카트에 팔꿈치를 기댄 채로 마트 안을 둘러보고 있었다. 이른 시간이라 사람이 별로 없는 마트였음에도 곳곳을 꼼꼼히 관찰하듯 훑는 옆얼굴을 바라보던 대현의 걸음이 느려졌다. 그러고 보니 식은 마트에 들어선 순간부터 저렇게 신기하다는 눈빛으로 마트 안을 훑고 있었다. 마치 이곳을 처음 와본 사람처럼. 윤성과 우람도 마트에 오는 걸 좋아하긴 했지만, 식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하긴 식에 비해 숙소에 있는 일이 잦았던 우람과 윤성도 데뷔 후엔 마트에 와본 적이 없다고 했으니, 데뷔 이후 늘 바쁜 멤버였던 식은 오죽했을까. 나름의 납득을 마친 대현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식의 등을 툭 쳤다.
“오랜만이긴 한가 보다, 너. 마트 구경 열심히 하네.”
장난스럽게 뱉은 말에 그제야 식의 고개가 대현에게로 돌아왔다. 부정하지 않은 그가 대답 대신 어물쩍 시선을 피했다. 마치 부끄러워하는 것처럼. 또래보다 어른스러운 얼굴이나 행동 때문인지 어딘가 어렵게 느껴질 때도 있던 식이 순간 친근하게 느껴졌다. 그의 등을 툭 치며 걸음을 옮기려던 대현이 멈칫했다.
“오랜만이 아니라.”
“……어?”
“처음이에요.”
어색하게 몸을 돌리자마자 보인 식은 눈을 내리깐 상태였다. 손잡이에 나른하게 기댄 팔 때문에 조금 내려가 있는 어깨를 바라보던 대현의 입이 벌어졌다. 예상치 못했던 답변에 괜히 식의 눈치가 보였다.
“이런 데 데리고 가줄 만한 사람이 없었거든요.”
“아……….”
“그래서 욕심내 본 적도 없는데.”
“…….”
“와보니까 좋네요.”
고개를 든 식의 눈길이 마지막으로 가 닿은 곳은 대현의 얼굴이었다.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그가 다시 카트를 끌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어?”
“같이 온 게 형이라서 좋아요.”
무덤덤한 말투였으나, 확실히 간지러운 말이었다. 걸음을 멈추고 멍하니 바라볼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느끼는 건 대현뿐인지, 식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멈췄던 걸음을 다시 이어가고 있었다. 드르륵. 드르륵. 어딘가 거친 바퀴 소리와 함께 점점 멀어지는 카트를 멍하니 바라보던 대현이 그를 뒤쫓아 걸음을 옮길 수 있게 된 건 한참이 지나서였다.
“아, 형! 달라구요.”
“어쭈. 이게 뭘 잘했다고. 목소리 높아지는 거 봐라.”
“그건 형이 자꾸…… 아! 진짜!”
문을 열자마자 들려오는 소리들은 윤성이 깼을 뿐만 아니라 우람도 돌아왔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자꾸 자신이 다 들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식 때문에 두 개의 봉지를 모두 빼앗기고 말았던 대현이 식에게 먼저 들어가라는 고갯짓을 하며 문을 잡아줬다.
“뭐야.”
“어…… 안녕하세요. 어디 다녀오셨어요?”
이제는 저렇게 싸우기까지 할 정도로 우람을 편하게 대하기 시작한 윤성이었지만 식에게는 아직 어색함을 느끼는 듯했다. 불퉁한 우람의 시비와 비교되는 예의 바른 인사를 듣던 대현이 픽 웃으며 숙소로 들어섰다.
뒤늦게 등장한 대현에게 자연스레 거실 안의 시선이 몰렸다. 윤성의 표정이 확 펴지는 게 보였다. 큰 키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껑충껑충 뛰어 대현의 앞에 선 윤성이 자연스레 그의 팔을 붙잡았다. 어디 다녀오셨냐는 말에 마트라고 답하며 외투를 벗던 대현이 사라진 식을 찾아 눈을 굴리다 불이 켜진 부엌으로 걸음을 옮겼다.
우람은 이미 식을 따라 부엌에 들어와 있었다. 봉지 안의 식료품을 하나둘씩 꺼내는 식의 옆에 서서 기웃대는 덩치 큰 남자의 얼굴에 뿌리 깊은 불신이 비쳤다. 식이 방금 식탁 위로 내려놓은 계란 한 판을 들고 이리저리 살펴보는 우람을 보자 웃음이 샜다.
웃음소리를 들었는지 뒤돌아보는 식과 우람을 향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 보인 대현이 팔을 걷으며 식탁으로 다가섰다. 그러고 보니 아까 윤성이 좋아하는 과자도 몇 개 샀었는데, 어느 봉지에 뒀더라.
“저희 자주 가는 거기 마트 다녀오신 거예요? 어, 빵이다!”
“응. 식이가 도와줬어. 빵 먹고 싶으면 먹어. 많이 사 왔으니까. 아, 맞다. 오는 길에…….”
대현을 따라 부엌에 들어온 윤성이 어느새 눈을 빛내고 있었다. 반짝거리는 눈이 향하는 곳은 아까 대현이 시식하고는 바로 카트에 담았던 빵 봉지였다. 윤성과 대현은 여러 면에서 입맛이 비슷했다. 이번에도 그런 모양이었다. 포장지부터 크림이 가득 든 빵이 그려진 봉지를 뚫어지게 응시하는 그를 본 대현이 웃으며 빵 봉지를 건네주려 할 때였다.
우람의 시비를 묵묵히 받아내던 식이 윤성에게 건네려던 빵 봉지를 중간에서 낚아챘다. 그리고는 오는 길에 샀던 붕어빵 봉지를 대신 윤성의 품에 안겼다. 뜬금없는 식의 행동에 윤성은 물론이고 대현까지 당황한 표정이 되어 식을 응시할 때였다.
“빵은 형 드세요.”
“……어?”
“넌 그거 먹고.”
그 말을 끝으로 식은 다시 봉지 안의 식료품을 꺼내는 데 집중하기 시작했지만, 나머지 셋은 방금 벌어진 상황을 이해하지 못해 어색하게 서로를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침묵을 깬 건 우람이었다.
“그래. 캥거루 넌 빵을 먹을 자격이 없다.”
“엉?”
“아, 형 진짜…… 그건 또 무슨 말이에요!”
식의 말이라고는 덮어놓고 반대부터 하던 우람답지 않은 말이었다. 의외의 동조에 식도 눈썹을 꿈틀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졸지에 또 타깃이 되고 만 윤성만 붕어빵 봉지를 든 채 펄펄 뛰었다.
“야. 얘가 방금 뭐 하고 있었는 줄 알아? 아니 그래도 아이돌이란 새끼가…… 읍……! 미쳤냐, 너?”“아, 진짜 좀……!”
눈치를 보니 아까 숙소에 들어왔을 때 둘이 하고 있던 이야기를 다시 꺼내는 듯했다. 윤성이 황급히 붕어빵 하나를 꺼내 우람의 입을 틀어막았다. 누가 봐도 안절부절못하는 윤성의 모습에 이제는 대현의 흥미가 동하고 있었다. 식도 마찬가지인 듯, 시비를 거는 우람은 쳐다보지도 않던 그의 시선은 이제 윤성과 우람 쪽을 향했다. 식료품을 꺼내는 속도도 느려졌다.
“뭔데 그래, 윤성아. 무슨 일 있었어?”
“아니, 그게 아니라요……….”
“여자랑 연락했어. 저 새끼.”
그래도 붕어빵이 먹을 만은 했던 모양이었다. 윤성이 억지로 입에 쑤셔 넣었던 붕어빵을 씹어 넘긴 우람이 붕어빵 봉지로 손을 뻗었다. 붕어빵을 꺼내 입으로 가져가는 행동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볼 가득 든 붕어빵을 우물거리던 우람이 이르듯 툭 뱉은 말에 윤성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긴 했지만, 딱히 놀랍지는 않았다. 저렇게 잘생기고 귀엽기까지 한데 먼저 연락하는 이성이 없는 게 오히려 더 이상할 일이다. 그리고 만약 정말 진지하게 연락하는 사람인 거라면 우람이 놀리듯 이야기를 꺼내지도 않았을 테니 걱정할 필요는 없을 듯 했다. 그러나 윤성의 반응을 보니 놀려주고 싶은 것도 사실이었다.
부러 표정을 굳히고 설명을 바라듯 쳐다보는 대현의 눈을 피한 윤성이 더듬더듬 변명을 시작했다. 둥근 눈은 팔짱을 낀 채 의자에 앉은 우람과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식을 슥 훑어본 후에는 불안하게 흔들리기까지 하고 있었다.
“여자는 맞는데…… 아, 그게 옛날에 연습생 시절에 알고 지냈던 누나인데요…….”
“응. 근데?”
“근데 그런 의미로 그런 게 아니고…… 그냥 잘 지내냐고…….”
“응.”
“아, 정말! 우람이 형이 말하는 것처럼 그런 의도 없어요! 전 아이돌 하는 동안에는 연애할 마음 없단 말이에요…….”
취조하듯 지켜보는 형들 사이에서 나름의 항변을 마친 윤성이 결국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궜다. 억울함이 잔뜩 묻어나는 말투에 진지하게 꾸민 표정이 자꾸 무너지려 했다.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을 정도였다.
결국 대현의 입을 허물고 터져 나온 웃음소리에 윤성이 바로 고개를 들었다.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그가 눈앞의 짓궂은 형들을 차례대로 훑었다. 우람이야 아까부터 장난기 어린 눈을 하고 있었고, 식도 입꼬리를 올려 픽 웃고 있었다. 그제야 이 모든 게 자신을 놀리는 거라는 걸 깨달은 듯 윤성의 얼굴이 빨개지기 시작했다.
“아, 진짜…….”
팔을 뻗은 대현이 자연스레 제 어깨에 머리를 묻으며 투정을 부리는 윤성의 머리에 손을 얹고는 마구 문질렀다. 결 좋은 곱슬머리가 손 안에서 이리저리 스러졌다. 그마저도 윤성 같아서 귀여웠다.
“하긴 우리가 경계해야 할 건 이쪽이 아니지.”
“……뭐가요.”
“찔리냐? 난 누구라고는 말 안 했는데.”
어느새 부엌이 꽉 찼다. 그새 2차전을 시작한 식과 우람부터.
“형. 전 진짜 우리 멤버들이랑 팬밖에 없어요…… 아시죠?”
머리를 부비며 애교를 부리는 윤성까지.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감을 뽐내며 선 세 명의 장정을 살피던 대현의 눈이 부드럽게 접혔다. 거실의 창을 통해 햇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거실 곳곳에 스며드는 햇빛에는 거부할 수 없는 힘이 있었다. 빛은 거실을 넘어 자꾸만 영역을 넓혔다. 그리고 결국은 부엌의 한 가운데에 선 남자의 마음에 가 닿았다.
지금 느끼는 안정감의 무게조차 모르는 대현이 그 사실을 눈치챌 수 있을 리 없었다. 그 틈을 노리지 않고 파고든 햇빛은 그의 마음을 데웠다. 다시는 차가움에 적응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