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최애와 거리두기-48화 (48/119)

48화

“형.”

“어?”

“필요하신 거 있으세요?”

이번에는 식이었다. 어느새 대현의 옆으로 다가온 그가 강렬한 눈빛을 하고는 뜬금없는 질문을 했다. 그 바람에 셋에게 둘러싸인 꼴이 된 대현이 슬쩍 뒤로 물러섰다. 그의 머릿속에서 답이 나오지 않는 의문이 회오리쳤다. 얘들이 정말 왜 이러는 거지, 오늘.

“없는데……?”

“뭐든 상관없으니까 편하게 말씀해 주세요. 제가 드리고 싶어서 그런 거니까.”

“어? 어…… 근데 나 진짜 필요한 게 없…….”

말만 하면 별이라도 따다 줄 것 같은 기세였다. 필요한 게 없다는 말에도 거둬지지 않는 시선을 받아내던 대현이 진동 소리에 살았다는 표정을 하고는 발을 옮긴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화면도 확인하지 않은 채 폰을 귀에 가져다 댄 대현이 뒤의 눈치를 슬쩍 보고는 방으로 걸어갔다. 문까지 닫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쉰 그가 그제야 통화로 관심을 돌렸다.

[여보세요? 이지후?]

“여보세요?”

[나야. 김지웅.]

대현을 구해준 전화는 지웅으로부터 온 것이었다. 발신자를 확인하지 못한 탓에 나갔던 형식적인 인사말 때문인지 어색하게 자기소개까지 덧붙이는 건너편을 느낀 대현이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대꾸했다.

“야, 내가 네가 누군지 모르겠냐.”

[모르는 줄 알았네. 전화 너무 사무적으로 받는 거 아냐?]

“아, 확인 못 하고 받았거든. 미안.”

[미안하면 내 부탁 좀 들어주라.]

“갑자기 무슨…….”

[우리가 지금 리얼리티를 찍고 있거든? 내가 얘기했나?]

“아, 어. 얘기했던 것 같아. 근데 그건 왜? 부탁이랑 관련 있는 거야?”

[어, 완전.]

지웅의 목소리가 급격히 낮아졌다. 무슨 부탁이길래 이렇게 서두가 거창한 걸까. 덜컥 불안해진 대현이 덩달아 심각한 목소리로 물었다.

“뭔데. 무섭게 그러지 말고 빨리 얘기해.”

[이번에 숙소에서 친구 특집을 찍기로 했는데, 내가 너네 그룹을 추천했거든.]

“뭐?”

[먼저 물어보고 진행했어야 했는데 미안. 갑자기 결정된 거라 빨리 말해달라고 쪼는데 네 얼굴밖에 생각 안 나더라고. 안 믿길 수도 있겠지만, 내가 숙소 데리고 온 연예인 친구 너밖에 없거든. 근데 생각해 보니까 너보다 더 적임자가 없잖아. 저번에 애들 만나기도 했었고. 우리 막내들이랑 윤성이도 친하니까.]

“그건 그렇지만…….”

[부담 가질 필요는 없고, 저번처럼 우리 숙소에 와서 같이 놀다가 가면 돼. 게임할 때만 빼면 최대한 자연스러운 분위기 살릴 거라서 감독님 한 분 빼면 진짜 그냥 우리끼리만 있는 거거든.]

“난 괜찮긴 한데…… 근데 우리 그룹을 추천했다고 하지 않았어? 윤성이랑 나만 가도 되는 거야?”

[많이 오면 좋긴 하겠지. 근데 둘만 와도 괜찮아. 어때. 가능할 것 같아?]

듣다 보니 나쁜 제안은 아니었다. 당장 방송이고 뭐고 플러그로서 활동을 하나도 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그런데 타 그룹의 리얼리티에 얼굴을 비출 수 있는 기회라니. 거기다 그 타 그룹은 플러그와 늘 라이벌이라는 관계로 묶이던 예스였다. 어느 쪽이든 화제가 될 것 같기는 했다.

날카롭게 장단점을 짚어가던 대현이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지금 지웅은 부탁을 하는 것처럼 말해오고 있었지만, 플러그와 달리 연예계 인맥이 많은 예스를 떠올려 봤을 때 그가 굳이 제게 부탁을 하는 건 사실 플러그가 방송에 노출될 수 있게 도와주는 행위와도 같았다.

지웅이라고 그걸 모를 리 없었다. 자존심을 지켜주기 위해서든, 고맙고 미안해할 이쪽을 알아서든 어느 쪽이든 배려가 묻어나는 행동이었다. 더군다나 저번에 만났을 때 방송 활동 이야기가 나왔을 때 제가 얼버무리자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던 지웅까지 생각하자 대현은 마음이 찡했다. 생각을 정리한 대현이 핸드폰을 고쳐 쥐었다.

“할게.”

[어? 진짜?]

“응. 근데 멤버들 몇 명 갈 수 있을지는 언제까지 말해줘야 되는 거야?”

[음…… 촬영이 다음 주라 이번 주 일요일까지만 말해주면 될 것 같은데. 왜? 더 올 수 있을 것 같아?]

밝아진 지웅의 목소리를 듣던 대현이 걸음을 옮겨 슬쩍 문을 열었다. 문틈 사이로 아직도 아까 그 자세로 서 있는 셋이 보였다.

야, 너 그거 어디서 샀어. ……네? 그거. 씨발, 이지후가 입은 거. ……그건 왜……. 왜는 무슨 왜야. 얼른 안 불어? xxx 아냐? 네? xxx 아니면 ooo인가.

대현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윤성에게로 타깃이 옮겨간 듯했다. 우람이야 그렇다 치고 식까지 윤성을 취조하듯 몰아세우고 있는 풍경을 바라보던 대현의 입에서 한숨 같은 말이 흘러나왔다.

“글쎄…… 될까…….”

* * *

필요한 게 양파랑 당근, 우엉이었나. 어제 밥 할 때 보니까 쌀도 다 먹어가던데, 가격 괜찮으면 이 김에 그냥 사 와야겠다. 그러고 보니까 어제 윤성이가 파스타 먹고 싶댔는데. 파스타야 집에서도 몇 번 해봤으니 어려울 것 같지는 않고. 면은 있으니까 소스만 사면 되겠지.

장 볼 거리들을 생각하며 거실로 나오던 대현이 의외의 인물을 발견하고는 눈을 크게 떴다. 대현을 보자마자 손에 든 것을 내려놓고 소파에서 일어서는 식은 언제나처럼 멀끔한 차림이었다. 언제 일어나 샤워까지 마친 건지, 기름기 없는 하얀 얼굴과 깔끔하게 넘겨진 머리를 훑던 대현은 모자만 푹 눌러쓴 자신이 새삼 부끄러워졌다. 딱히 게으르다고 느껴본 적은 없는데, 바쁜 스케줄 속에서도 꾸준히 관리하는 게 보이는 식을 볼 때면 꼭 그런 것 같지도 않다.

“어? 벌써 일어났어?”

“네. 어디 가세요?”

“응. 장 보러 가게.”

“이 시간에요?”

손목에 찬 시계를 내려다본 식이 이해가 가지 않는 듯한 표정을 했다. 그럴 만도 했다. 장을 보러 가기에는 이른 시간이었으니. 하지만 최근 팬카페에 급격히 늘어나기 시작한 마트 목격담부터 시작해 마트까지 따라 들어오는 사생팬들 덕에 대현의 선택지는 상당히 줄어든 상태였다.

차선책으로 인터넷으로 주문도 해봤지만, 채소 상태도 그렇고 여러 물품이 뒤죽박죽 섞여 망가진 배송물을 한 번 받고 보니 손이 잘 가지 않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 결과 나오게 된 나름의 방법이 이거였다. 마트 오픈 시간과 맞추어 장을 보러 가는 것 말이다. 가끔은 윤성이 함께할 때도 있었지만, 한창 자랄 때의 그가 잠과 사투를 벌이는 모습은 어딘가 좀 안쓰러운 면도 있어서 처음에야 깨우는 척이라도 하던 대현은 이제 소리소문 없이 숙소를 나서곤 했다.

운동선수를 할 때의 버릇이 남아서인지 새벽같이 일어나 운동을 하러 가는 우람은 자연스레 선상에서 제외된 상태였다. 어차피 장은 늘 혼자 봐왔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부터 자연스럽게 이어오던 일이라 혼자 한다고 해서 어색하거나 불편한 건 없었다.

“요즘 팬분들도 그렇고…… 불편해서.”

“…….”

“가다 보니까 이 시간이 사람도 없고 편하더라고.”

변명처럼 덧붙인 말에 식은 고개를 끄덕였다. 신발장으로 걸어가던 대현이 식에게 인사를 하려다 말고 멈칫했다. 언제 다가온 건지 모를 식이 그의 옆에서 신발을 신고 있었다.

“같이 가요.”

“어? 너 뭐 하고 있었던 거 아냐?”

“괜찮아요. 나중에 해도 되는 거라서.”

대수롭잖게 말하는 얼굴을 응시하던 대현이 고개를 돌려 식이 앉아 있었던 소파를 응시했다. 식이 팔을 대고 있었던 팔걸이를 비롯해 소파 이 곳 저곳에 여러 색의 종이뭉치가 쌓여 있었다. 제일 위에 있는 종이뭉치에 적힌 드라마라는 글자를 읽어낸 대현이 잠시 망설였지만 식은 이미 숙소를 나서는 중이었다. 말려야 되나 고민하던 대현이 결국 어깨를 으쓱하고는 걸음을 옮겼다.

“이것도요?”“응. 그 옆에 피망도 세 개만 담아줘.”

사야 되는 것들을 적어온 리스트를 한 번 더 확인한 대현이 제 앞에 진 그림자에 고개를 들었다. 방금 부탁한 채소들이 담긴 봉지를 카트에 실어놓던 식과 눈이 마주쳤다.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식이 그의 곁으로 바짝 다가왔다. 하얗고 긴 손가락이 의식하기도 전에 대현의 입가를 툭 건들이고는 떨어져 나갔다.

“묻어서요.”

갑작스러운 접촉에 대현이 놀라든 말든, 손끝에 걸린 부스러기를 보여주는 식은 답지 않게 씩 웃어 보이기까지 하고 있었다. 아까 마트에 들어올 때부터 느꼈지만, 평소보다 풀어진 듯한 분위기의 그였다.

고른 이가 드러나는 웃음에 덩달아 어색하게 웃던 대현이 손을 올려 더듬더듬 입가 주위를 훑었다. 아까 시식했던 빵의 부스러기가 묻어 있었던 모양이었다. 식이 떼어낸 게 마지막이었는지 더는 손끝에 잡히는 부스러기가 없었다. 그래도 동생 앞에서 칠칠치 못한 행동을 했다는 게 어딘가 멋쩍어서 괜히 머쓱한 표정을 지어 보일 때였다.

“빵도 좋아하시나 봐요.”

“응?”

“떡 맛있게 드시던 거 생각나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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