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이지. 테니스 경기를 보는 것처럼 말을 하는 상대에 따라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가던 대현이 변태라는 단어에 입이 떡 벌어진 우람을 보고서야 그 사이에 끼어들었다.
“왜 이래, 둘이.”
어색하게 웃어 보이는 대현을 흘끔 본 식이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우람도 마찬가지였다. 가까이 다가온 대현의 얼굴에 멈칫한 우람은 그러면서도 식의 오른손에 들린 한약으로 손을 뻗는 행위를 멈추지 못했다. 얄밉게 손을 이리저리 피하던 식이 김치냉장고 위로 한약 상자를 올려놓는 게 보였다.
“야, 너 이리 안 내놔?”
소리 지르는 우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한약 상자를 개봉한 그가 한약 한 봉을 꺼내 주방으로 걸어갔다. 가위를 들고 윗부분을 조금 잘라내고는 바로 입안으로 내용물을 털어 넣는 행동에는 1초의 망설임도 없었다. 멍하니 보고 있던 대현이 그 즉시 앞으로 튀어나간 우람의 허리를 반쯤은 무의식적으로 붙들었다. 대현을 돌아본 우람이 차마 대현의 손을 잡아 떼어내지는 못하고 낑낑댔다.
“미친 새끼야! 뒤질래? 그게 얼만데……!”
“얼만데요.”
“저 새끼가 진짜! 이지후, 이거 놔봐!”
우람이야 그렇다 치고 식까지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 한약이 쓴지 인상을 잔뜩 구기면서도 지지 않고 우람에 맞서는 식을 본 대현이 곤란한 표정을 했다.
“그만해 둘 다. 나눠 먹으면 되잖아. 응?”
한약이 그렇게나 먹고 싶었던 건가. 엉뚱하게 결론을 낸 대현이 우람의 허리를 토닥이며 식에게 말을 걸었다. 홱- 동시에 대현을 바라본 둘이 어이없는 헛웃음을 짓기도 잠깐 다시 서로를 향해 으르렁댔다.
그때였다.
“형! 저 왔어요! 형 보고 싶어서 빨리 왔…….”
도어락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들린 발랄한 목소리에 부엌에 선 셋의 얼굴이 한 방향으로 돌아갔다. 아까의 우람처럼 양손 가득 짐을 든 윤성이 말을 잇다 말고 마주한 셋을 멀뚱히 응시했다.
“아오, 넌 왜 이렇게 빨리 왔어? 아니지. 잘 왔다, 너. 일로 와서 저 새끼 손에 한약 좀 뺏어봐.”
“……오기만 해.”
부엌을 둘러보던 윤성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어가는 게 보였다. 다가오라 손짓하는 우람과 다가오기만 하라며 서늘한 시선을 던지는 식을 본 그가 도움을 청하는 눈빛으로 대현을 바라봤다. 작게 한숨을 쉰 대현이 어깨를 으쓱했다.
아무래도 점심 먹기는 그른 듯했다.
“앉아봐, 둘 다.”
“너 방금 발로 나 밀었냐?”
“먼저 미셨잖아요.”
“미친. 또 밀었어, 이 새끼!”
소파에 잠깐 앉으랬더니 그새를 못 참고 티격대는 둘을 지겹다는 듯 바라보던 대현이 고개를 돌렸다. 대현의 옆에 붙어 앞의 둘을 멀뚱히 바라보고 있는 윤성이 보였다. 결심한 듯한 표정을 한 대현이 윤성의 어깨를 잡았다.
윤성아. 부름에 고개를 돌리자마자 마주한 대현의 얼굴에 무의식적으로도 풀린 입가를 하던 윤성의 여유로움은 오래가지 못했다.
“뭐야, 캥거루 너 미쳤냐?”
“……야. 좁아.”
윤성의 어깨를 잡은 대현이 우람과 식 사이로 그를 밀어 넣었기 때문이었다. 좁지 않은 소파에서도 굳이 옆에 붙어 앉아 서로 눈싸움을 하던 식과 우람의 황당한 시선이 윤성을 향했다. 살벌하게 한 마디씩 보태는 그들 사이에 낀 윤성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여전히 어깨를 꽉 잡고 있는 대현 덕에 그러지 못했다.
“형…….”
충격과 약간의 배신감까지 느껴지는 윤성의 눈빛에 마음이 약해질 것 같았지만 버텨냈다. 형이 맛있는 거 사줄게…… 윤성은 못 들을 마음 속 약속까지 해가며 그의 어깨를 놓은 대현이 그제야 조용해진 분위기에 식과 우람을 번갈아 응시했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찔린 얼굴로 고개를 돌리는 우람과 달리 대현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는 식은 찌푸렸던 미간의 힘만 슬쩍 풀 뿐이었다.
“그러니까 너네 지금 이러는 이유가 저 한약 때문이야?”
정신없었던 방금 전 상황을 요약한 말이었다. 홱 고개를 돌린 우람이 억울한 표정으로 항변했다.
“가만히 있는 한약은 왜! 갑자기 달려든 저 새끼가 문제지!”
“한우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멤버 동생한테 새끼가 뭐야.”
“그럼 뭐라고…… 아니, 그러니까 저 자식이!”
단어를 바꿔 억울함을 토로하는 우람에 찝찝한 표정을 짓고서도 대현은 금방 포기했다. 그래도 생각해 보면 새끼보단 자식이 나은 거 같기도 하고. 워낙 입이 거친 우람이라 그런지 저렇게 바로 고쳐 준 것만 해도 감지덕지라고 느껴진다. 어쩌면 당연하게도 그의 시선이 입을 꾹 다문 식에게로 향했다.
“너도 그래. 김 식. 우람이는 그렇다 쳐도 너까지 약 올리듯이 그러는 건 뭐야?”
“……약 올린 거 아니에요.”
“그럼?”
식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제야 자신이 왜 그랬는지를 생각해 보는 듯한 얼굴을 지켜보던 대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전에 숙소에서 관찰한 바로는 서로에 대해 관심도 없어 보이던 둘이 갑자기 이렇게 불이 붙어 싸우는 이유를 도통 알 수가 없어서였다. 골똘히 생각하던 대현이 옆얼굴로 쏟아지는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형…….”
잊고 있던 윤성이었다. 무릎 위에 두 손을 올리고는 애처롭게 응시하는 얼굴을 보던 대현이 정신을 차렸다. 허리에 두 손을 올리고 엄한 표정을 지은 그가 둘에게 명령했다.
“어쨌든 다시는 이러지 마, 둘 다. 식이도 이제 촬영 끝나서 집에 자주 있을 텐데 마주칠 때마다 이렇게 싸울래?”
“…….”
“…….”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양옆으로 휙 돌리는 둘을 확인한 대현이 한숨을 내쉬며 다가섰다. 한 손을 뻗은 대현이 한 손에는 식의 손을, 다른 한 손에는 우람의 손을 쥐었다. 얼떨떨한 얼굴로도 순순히 손을 내주던 둘이 곧 맞물린 서로의 손에 경악했다. 당장이라도 내뺄 기세로 몸을 물리는 우람과 식을 본 대현이 이를 악 물고는 둘의 손 위에 제 손을 덮었다.
“자. 악수.”
“미쳤냐?”
“……이건 아닌 것 같은…….”
“악. 수.”
단호한 음성은 정말 악수하는 걸 보기 전까지 둘의 손을 놓아줄 기세가 아니었다. 둘이 힘을 주어 손을 놓는다 해도 몇 번이고 다시 겹쳐 놓을 것 같은 표정이기도 했다. 불만스럽게 눈을 굴리던 우람이 대현의 단호한 눈을 마주하고는 한풀 꺾인 표정을 했다. 식도 마찬가지였다.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던 그가 대현의 곧은 시선을 마주하고는 손의 힘을 뺐다.
허공에 뜬 둘의 손이 성의 없이 맞물린 채로 두어 번 흔들렸다. 물론 둘 모두의 시선은 딴 데를 향하고 있었지만. 뭐, 처음부터 친해질 수는 없겠지. 그래도 서로 관심도 없던 것보다는 이렇게 싸우는 게 나은 거 아닐까. 싸우고 화해하고 그러면서 친해지는 거지 뭐. 나름의 합리화를 마친 대현이 윤성에게로 손을 내밀었다.
“윤성아, 미안. 놀랐지.”
대현의 손을 동아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꽉 붙잡은 윤성이 양옆의 기세에 자연스레 움츠렸던 어깨를 폈다. 우는 소리를 하며 일어서려던 그가 그제야 발견한 것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대현의 잠옷 바지에 시선을 고정한 그가 벌떡 일어서 감격에 젖은 목소리로 소리쳤다.
“형, 입어주셨네요!”
“어? 아, 이거?”
덩달아 눈을 동그랗게 떴던 대현이 윤성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눈치채고는 알겠다는 얼굴을 했다. 그러고 보니 입은 걸 윤성에게 보여준 건 처음인 것 같았다. 지금 입은 잠옷은 윤성이 선물해 준 거였다. 연말인데 집에 다녀오는 게 어떻겠냐는 말을 듣고도 한참을 꾸물거리던 그가 떠나기 전 쭈뼛쭈뼛 내밀던 선물을 떠올린 대현이 눈을 접어 웃었다.
한 유명 캐릭터의 얼굴이 워터마크처럼 박힌 잠옷은 누가 봐도 윤성이 준 선물 같았다. 딱 그 나이대에서 할 법한 귀여운 선물 말이다. 평소 잘 때 잠옷을 챙겨 입는 스타일이 아니었기에 처음 받았을 때만 해도 이걸 어떻게 해야 되나 고민했지만, 선물을 해준 윤성의 얼굴을 생각하며 입어본 잠옷은 생각보다 편했다. 나름 따뜻하기도 했고.
“따뜻하고 좋던데? 네가 준 날부터 매일 밤마다 입었어.”
“진짜요, 형?”
“응?”
“진짜 매일 입고 계셨어요?”
“응. 왜? 매일 입으면 안 되는 재질이야?”
“아뇨, 아뇨! 돼요. 완전 돼요. 맨날 입고 계셨으면 좋겠어요. 앞으로도.”
선물해 준 걸 입었을 뿐인데 제가 선물을 받기라도 한 듯한 표정을 하고 눈을 반짝이는 윤성이 귀여워서 손이 절로 나갔다. 올곧이 자신을 향한 윤성의 애정은 사람을 뭉클하게 만든다. 윤성이 없는 사이에 사두었던 선물을 얼른 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대현이 다정하게 대답했다.
“그럴게. 물론 잘 때만.”
대현의 손에 머리를 맡긴 윤성은 방금 전의 기억은 까맣게 잊은 것처럼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물론 그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야.”
“어?”
“한약도. 맨날 맨날 먹어. 알았어?”
“어…….”
“저거 몸에 좋은 거래서 내가 예약까지…… 아니, 어쨌든 그러니까! 챙겨먹으라고. 알았냐?”
몸을 벌떡 일으켜 다가온 우람이 윤성과 대현 사이에 끼어들었기 때문이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저항도 못하고 밀려난 윤성이 멍하니 눈을 깜빡이는 게 보였다. 물론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대현에게 바짝 다가선 우람은 말을 잇다 말고 또 귀를 붉게 물들일 뿐이었다.
“난 왜 저 캥거루새끼처럼 못 하겠지.”
한탄하듯 중얼거리던 우람이 갑자기 인상을 썼다. 옆을 향한 그의 시선을 따라가던 대현이 멈칫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