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이지후!”
조용한 집에 들어선 우람이 가장 먼저 찾은 건 지후였다. 마치 숨바꼭질이라도 하는 것처럼 지후의 이름을 크게 부르며 거실도 기웃, 부엌도 기웃, 쓸데없이 제 방까지도 확인한 그가 그때까지도 보이지 않는 지후에 결국 머뭇거리며 가장 안쪽에 위치한 그의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지후……?”
조금 열린 문 사이로 고개를 내민 우람이 눈을 굴렸다. 침대에 엎어진 둥근 뒤통수를 확인한 그의 미간이 슬쩍 풀렸다.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방에 들어서려던 그가 멈칫했다. 두 손 가득 든 것들의 무게감을 그제야 깨달은 탓이었다. 곧장 뒤돌아 부엌으로 걸어간 그가 양 손 가득 들고 있던 것들을 미련 없이 내팽개쳤다. 한약이며, 보조제며, 옷이 든 종이 상자들이 제 손짓 한 번에 대현이 잘 정리해 놓은 식탁 위를 엉망으로 만들었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방향을 틀어 지후의 방에 다시 들어서는 우람의 얼굴은 스스로조차 정의하지 못할 기대감이 잔뜩 묻어 있었다.
“야, 이지후.”
부엌에 짐들을 내팽개칠 때의 패기는 어디로 가고 침대에서 멀찍이 떨어져서 선 그가 지후에게 말을 걸었다. 금방이라도 일어나 맞아줄 줄 알았던 지후는 대답이 없었다. 결국 침대 쪽으로 한 발자국 더 다가선 우람이 지후를 다시 불렀다.
“나 왔다고. 야.”
조금 더 가까워진 거리 때문인지, 아니면 뒤통수를 뚫어버릴 듯 바라보는 우람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드디어 그가 꿈틀거렸다. 순간 작게 화색이 일었던 얼굴이 얼마 가지 못해 실망감으로 물들었다. 잠깐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던 지후가 자세를 바꾸어 다시 새근새근 숨소리만 냈기 때문이었다. 어이없는 얼굴을 하던 우람이 방 안의 시계를 확인했다. 10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숱이 진한 우람의 한쪽 눈썹이 슬쩍 들렸다.
지후가 늦잠을 자는 건 처음 보는 것 같았다. 먼저 일어나 저나 윤성을 깨우면 깨웠지, 그들이 자신을 깨우게 한 적은 없던 지후였다. 제가 온 것도 모르고 자고 있는 무방비한 얼굴을 잠시 바라보던 우람은 갑자기 장난기가 동했다.
지후의 책상에서 굵은 매직 하나를 찾아낸 그가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지후에게 다가섰다. 침대 위 지후 옆의 조금 남은 공간에 한쪽 무릎을 꿇은 그가 지후의 위로 몸을 숙였다. 잠깐 침대가 출렁이기까지 했는데 감긴 눈은 뜨일 기미가 없었다.
가만 보자. 어디에 낙서를 해야 재미있을까. 얼굴에 낙서할 만한 곳을 찾아 눈을 굴리던 우람이 이내 감탄 반, 허탈함 반이 담긴 음성을 내놓았다.
“와, 이 새끼는 모공도 안 보이네.”
같은 피부과를 다녀도 결과물이 이리 다르다. 혀를 찬 그가 다시 지후의 얼굴에 집중했다. 낙서를 할 만한 곳을 발견한 그가 눈을 반짝이며 펜을 가져다 대려던 때였다. 흐응, 소리를 낸 지후가 인상을 찌푸리며 몸을 돌렸다. 자는 사람에게는 당연한 행위가 문제가 된 건 그 상황을 대비하지 못한 우람의 무게중심이 거의 앞쪽으로 쏠려 있었고, 그 때문에 우람이 지후의 위로 엎어졌다는 것이다.
“아씨.”
운동신경을 발휘해 침대 헤드 쪽으로 손을 뻗은 우람 덕분에 둘이 완전히 포개지는 불상사는 막을 수 있었지만, 여전히 둘의 몸은 맞닿아 있었다. 우람이 밑을 내려다봤다. 여전히 세상모르는 얼굴로 자고 있는 지후가 보였다. 감긴 눈 위로 드리워진 속눈썹을 잠시 내려다보던 우람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킨 그가 눈을 크게 뜬 채 한 손으로 제 목을 감쌌다. 방금 지후의 더운 숨이 닿았던 곳이기도 했다.
“뭐 하시는 겁니까.”
그때였다. 우람이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문가에 선 의외의 인물에 그가 멍하니 눈을 깜빡거렸다. 도무지 뜨여질 것 같지 않았던 지후의 눈이 뜨인 것도 그쯤이었다. 깜빡깜빡. 두 번의 깜빡거림 끝에 긴 눈매 사이로 갈색 눈이 드러났다. 동시에 몸을 일으킨 그가 눈을 비비며 앞의 우람에게 물었다.
“……한우람? 언제 왔어?”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이상하게도 얼굴이 빨간 우람과, 그런 우람을 미심쩍은 눈으로 보고 있는 식만 있을 뿐. 절로 나오는 하품을 숨기지 않은 그가 잠에서 덜 깬 눈으로 둘을 번갈아 응시했다.
“그러니까, 이건 엄마가 너랑 나눠먹으라고 넣어준 거고. 이건 내 친구가 집에 숨겨놓은 건데 몸에 좋대서 내가 쌔벼왔…… 아니, 가져왔으니까 먹으면 되고. 이건 내가 집으로 시켜놨던 건데.”
“한우람.”
“너도 먹고 싶으면 먹어.”
“한우람?”
“근데 많이 먹으면 오히려 몸에 더 안 좋다니까 너무 많이는 먹지는 말고.”
“야!”
대현이 더는 듣지 못하고 우람을 크게 불렀다. 그제야 장황하게 늘어놓던 설명을 멈추고 돌아보는 얼굴이 곧 못 볼 것을 보기라도 한 것처럼 굳어졌다. 다시 허공의 어딘가로 돌려지는 시선을 보던 대현이 미간을 찌푸렸다. 벌써 세 번째다, 저러는 게. 연말이니까 가족들이랑 시간 좀 보내라고 집에 보내놨더니 애가 뭘 잘못 먹고 온 건지, 아니면 너무 많이 먹어서 탈이라도 난 건가. 겉으로 보기에는 괜찮아 보이긴 하는데. 우람을 요리저리 살피던 대현이 결국 그의 이마로 손을 뻗었다.
“뭐, 왜! 뭐!”
화들짝 놀라 몸을 뒤로 물리는 우람에도 불구하고 손에 남은 온도를 사수한 대현이 다음으로 제 이마를 짚어보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열은 없는 것 같은데. 흠, 짧은 신음을 내던 대현이 슬쩍 고개를 돌렸다. 이해가 안 가는 상황은 단지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의자에 저를 앉혀놓고 이것저것을 설명하는 우람 옆에서 가만히 앉아 듣고 있는 식도 만만치 않게 이상했다.
한 손에는 커피를, 다른 한 손에는 대현이 며칠 전 읽고 있던 책을 든 식은 식탁의 한 자리를 떡하니 차지하고 앉아 있었는데, 아침임에도 스웨터에 청바지까지 깔끔하게 차려입은 그는 잠옷을 입고 있는 대현과 맨투맨과 츄리닝 차림인 우람 사이에서 상당히 튀어 보였다.
이상한 건 그가 가끔 고개를 들어 우람을 빤히 바라보고는 한다는 거였는데, 눈빛과 표정은 모르는 사람이 보면 그가 우람을 감시라도 하는 줄 알 거였다. 더 이상한 건 식의 그런 시선을 받을 때마다 우람의 귀가 달아오른다는 거였다. 그러고 보니 아까 일어났을 때도 우람의 얼굴이 빨갰던 것 같은데, 혹시 관련 있는 건가.
나름의 추리를 하던 대현이 결국 결론을 내지 못한 채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의미 없는 눈 맞춤을 하고 있던 식과 우람의 시선이 따라 올라왔다.
“이제 정리하고 밥 먹자. 나 배고파.”
“어?”
“…….”
“점심은 우람이 어머님이 보내 주신 떡으로 해결하면 될 것 같은데. 괜찮지 다들?”
자연스럽게 물은 대현은 이미 우람의 어머님이 싸주었다는 보자기를 풀고 있었다. 갓 뽑아 온 건지 온기가 느껴지는 떡에 그의 얼굴이 밝아졌다. 고개를 끄덕이는 식을 확인한 대현이 우람 쪽으로 휙 고개를 돌렸다. 이번에는 피하지도 못한 채 반짝반짝한 눈을 정통으로 마주한 우람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어머님께 잘 먹겠다고 말씀 드려줘. 아니다, 내가 좀 이따 전화 드릴게. 번호 주라.”
“어? 어…….”
큼큼, 헛기침을 한 우람이 이내 제 옆에 놓아두었던 상자를 조심스럽게 들고 일어섰다. 떡을 든 채 주방에 들어서던 대현이 인기척을 느끼고는 뒤를 돌아봤다. 심호흡을 한 우람이 대현의 얼굴 앞으로 상자를 내밀었다. 인삼이 잔뜩 그려진 상자를 훑어가던 대현이 고개를 돌려 상자 옆면에 적힌 이름을 읽어내고는 다시 우람을 쳐다봤다.
한x기 한의원……·? 한약 같은데. 근데 얘는 이걸 왜 나한테 주는 거지. 보관해 달라는 건가. 물음표가 가득한 얼굴의 대현을 본 우람이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이거 너 먹어.”
“나?”
“그럼 여기 너 말고 누구 있냐?”
버럭 소리를 지르는 얼굴은 어느덧 또 빨개져 있었다. 얼른 받으라는 듯 제 쪽으로 들이밀어진 상자를 본 대현이 결국 얼떨떨한 얼굴로도 상자를 받아 들었다.
“고마…… 워?”
어색한 감사 인사조차 채 듣지 않고 뒤도는 뒷모습을 보던 대현이 옆얼굴로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시선의 출처는 식이었다. 손에 든 책까지 내려놓은 식이 팔짱을 낀 채 대현과 우람을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다. 무언가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이었다.
몸을 일으킨 그가 다가오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던 대현이 순식간에 휑해진 왼손을 내려다봤다. 방금 우람에게 건네받은 한약 상자가 식의 오른손으로 넘어가 있었다.
진작 부엌을 나간 줄 알았던 우람이 다시 돌아서 그들에게 다가온 것도 그쯤이었다. 어이없다는 표정의 그가 식의 손에 든 한약을 낚아채려 했으나 뒤로 상자를 숨기는 식 때문에 성공하지 못했다. 우람이 인상을 구기며 식을 노려봤다.
“너 뭐 하냐?”
“이거 믿을 만한 겁니까?”
“뭐?”
“믿을 만한 거냐구요.”
“내가 못 믿을 걸 얘한테 주겠…… 아니, 근데 넌 왜 갑자기 지랄이야? 숙소에 잘 들어오지도 않는 새끼가 갑자기 나타나서는.”
“이제 자주 있을 건데요.”
“그러던 말던. 왜 갑자기 지랄이냐고.”
“그럼 변태가 준 약을 그냥 먹게 놔둬요?”
“변, 변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