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최애와 거리두기-45화 (45/119)

45화

“살이 빠진 것 같다, 너.”

“감기에 걸려서요.”

“쯧. 조심하지 않고. 요즘 감기 독하다던데.”

“네. 그래야겠어요. 선배님도 감기 조심하세요.”

시상식 풍경은 예상과 다르지 않았다. 중견 배우와의 대화를 끝낸 식이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을 훑었다. 다행일지도 모르지만 한껏 꾸며낸 미소로 서로 인사를 나누는 그들은 딱히 식에게 관심이 없어 보였다.

목을 조이는 타이를 조금 느슨히 풀어낸 식이 앞을 응시했다. 연말을 맞아 한껏 힘을 준 장식들이 홀 곳곳에 드리워져 있었다. 식의 시선이 구석에 위치한 크리스마스트리에 멎었다.

그러고 보니 크리스마스도 지났구나. 병원에 있는 동안 지나간 굵직굵직한 이벤트들을 꼽아 보던 식이 주머니에 든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오는 내내 고민했지만 보내지 못한 문자를 떠올리던 그가 툭 건드리는 손길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야, 식아.”

“선배님.”

“선배가 뭐야. 형이라 부르랬지.”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말을 걸어오는 사람은 식이 드라마를 함께했던 배우였다. 같은 아역배우 출신이어서인지, 식을 유독 잘 챙겨주고는 했다. 이십대 배우 중에서도 유독 상승세를 달리는 그는 오늘 시상식에서 mc를 맡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원래도 빛나는 얼굴이 오늘은 눈부실 정도였다.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손을 빼고 그를 마주 안던 식이 멈칫했다.

“오늘 기대해도 좋겠던데.”

“……네?”

“신인상 말야.”

식의 귀에 비밀스럽게 속삭인 그가 몸을 떼고는 윙크를 했다. 식이 무언가를 묻기도 전에 어깨를 툭 친 그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곧 201x년 mmm 연기 대상이 시작될 예정이니 참석해 주신 귀빈 분들께서는 착석해 주시기 바랍니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온 말과 함께 소란스럽던 장내가 또 다른 웅성거림으로 덮였다. 사방에서 의자 끌리는 소리가 났다. 잠깐 풀어놨던 타이를 다시 맨 식이 앞을 응시했다.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었다. 앞으로 걸어 나와 인사하는 엠씨들을 보는 식의 입에는 어느새 옅은 미소가 떠 있었다. 카메라 앞에서의 그가 늘 그랬던 것처럼.

“우당탕탕 김 씨네 가족들의 ‘김 식’ 씨! 축하합니다!”

식이 멍하니 스크린을 응시했다. 제가 연기했던 클립이 반복 재생되고 있는 스크린에 제 이름이 크게 떴다. 벌떼 같은 함성이 그를 감쌌다. 옆에 앉은 배우가 식을 일으켰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서로 얼굴만 아는 사이인 다른 테이블의 배우들도 박수를 치며 식을 돌아보았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한 머리는 돌아가기를 포기한 듯했다. 겨우 걸음을 떼 걸어갈 수 있었던 것도 뒤에서 밀어준 동료 배우들 때문이었다. 무대 앞 작은 계단을 올라가면서도 식은 아무런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이 상황이 지나치리만큼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정말 기대하지 않고 온 자리였다. 신인상 후보에 올라간 배우들 중 식이 제일 어렸고, 제일 비중이 작은 역이었다. 이 자리에 온 것도 새까만 신인인 식이 오지 않기엔 눈치가 보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이런 상황에 대해 아무런 대비도 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며칠간 몰아친 독감과 그 외의 것들은 이런 상을 받을 상황에 대비한 어떠한 시나리오도 그에게 준비해 주지 않았었다.

얼떨떨한 상태로 트로피와 꽃을 받은 그가 천천히 몸을 돌려 앞을 마주했다. 눈이 부실 정도로 내리쬐는 조명이 잡아 삼킬 것처럼 다가왔다. 조용해진 장내는 식이 입을 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

식의 목울대가 넘어갔다. 입술을 잠깐 깨문 그가 곧 입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대단하신 배우님들과 함께 시상식에 참여하는 것만으로도 영광스러웠는데, 이렇게 과분한 상을 받게 되어 감사하고도 죄송한 마음입니다.”

마이크를 통해 울리는 목소리는 생각보다 당황하지 않은 것처럼 들려 다행이었다. 당황했던 적이 없던 것처럼 익숙하게 말을 이어나가는 그의 얼굴로 줌이 들어왔다. 여전히 조명은 그를 집어삼키기라도 할 것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이 자리에 오기까지 많은 분들이 도움을 주셨습니다.”

머릿속에 떠오른 문장들을 읊어가던 식이 멈칫했다. 갑자기 떠오른 인물 때문이었다. 이 장소에서, 이런 순간에 떠올릴 거라고 생각하지 못한 인물이기도 했다. 괜찮냐는 말 하나 못 써 보낸 멍청한 제가 이 자리에서 그 사람을 언급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렇지만 이 순간 떠오르는 사람은 그뿐이었다. 그 사실이 식의 머릿속을 암전 상태로 만들었다. 누군가가 그의 목을 막기라도 한 것처럼 말문이 막혔다.

“…….”

식의 침묵이 길어졌다. 앞의 카메라맨이 한 손을 재빠르게 돌리는 게 보였다. 빨리 하라는 뜻인 걸 뻔히 알면서도 식은 그럴 수가 없었다. 침묵이 5초가 넘어가기 시작할 무렵이 되자 결국 mc석에서 바통을 이어받았다.

“아하하, 우리 식 씨가 많이 떨리는 모양이에요.”

“그러게요. 근데 생각해 보면 이런 게 또 신인상 수상의 묘미 아니겠습니까.”

“그렇죠. 자. 식 씨, 그럼 마지막 한 마디 해주시겠어요?”

자칫하면 방송사고로까지 이어질 수 있는 상황을 부드럽게 넘기고 식에게 다시 바통을 넘겨준 건 아까 식에게 수상 소식을 귀띔해 준 선배였다. mc석에 선 그가 식에게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식이 고개를 돌려 카메라를 응시했다. 여태까지와 달리 정면으로 카메라를 응시하는 식의 얼굴이 홀 양옆에 붙은 스크린에 가득 떴다.

“……감사합니다. 정말 많이.”

꽉 막힌 목에서 드디어 나온 말은 몇 초간 말을 잇지 못하던 거에 비하면 보람 없을 정도로 짧고 단순했다. 고개를 떨군 식이 손에 든 트로피를 다시 한 번 꼭 쥐었다. 하. 참았던 숨을 한꺼번에 몰아쉰 그가 뒤 쪽으로 이끄는 안내원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문 앞에서 망설인 지가 어느덧 십 분째였다. 이제는 제가 왜 이러고 있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벽에 기댄 식이 제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왁스가 덜 지워진 머리는 끈적거리기까지 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식이 강박 수준으로 화면을 껐다 켰다 한 핸드폰은 이제 배터리 부족 경고까지 보내고 있었다.

이 순간에도 식의 폰에는 축하 문자가 들어차고 있었다. 어떻게 식의 번호를 알았는지 모를 팬들부터, 동료 배우들의 문자들까지. 메시지 도착 알림이 뜰 때마다 열어보고 있었지만, 그 중 식이 찾는 연락은 없었다. 있을 리 만무했다. 식이 TV에 나오는지조차 모를 것 같은 사람들이었으니. 하지만 지금 식의 마음을 무겁게 하는 건 그들이 아니었다. 며칠 전과 같은 상황이었으며, 오늘로 두 번째였다. 가족들의 연락과 그의 연락을 같은 선상에 둔 게.

헛웃음을 흘린 식이 핸드폰을 껐다. 억지로 붙잡혀 간 뒤풀이에서 먹은 술은 어디로 증발한 건지 이보다 더 정신이 멀쩡할 수가 없었다. 마음이 뒤죽박죽이었다. 미안했고, 고마웠고, 또 미안했다. 그 말 중 어느 것도 전하지 못하는 제가 멍청하게 느껴졌다. 숙소에 들어가면 그 얼굴을 또 마주하게 될 텐데, 이번에도 아무 말을 하지 못한다면 그때는 정말로 자신을 용서하지 못할 것 같았다.

“후…….”

짧은 한숨을 내쉰 식이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도어락 앞으로 다가서는 얼굴이 잔뜩 긴장한 빛을 띠고 굳어졌다. ??. 경쾌하게까지 느껴지는 소리를 들으며 문을 연 식이 우뚝 굳었다.

“신인상 축하해!”

신발장 바로 앞에 지후가 서 있었다. 두 손으로 받친 접시 위에는 초코파이 하나와 방금 불을 붙인 듯한 초 하나가 올려져 있었다. 앗, 뜨거. 라이터를 끄던 중 손을 데었는지 짧게 소리까지 지른 지후는 반쯤은 멋쩍고, 반쯤은 들뜬 얼굴로 식을 바라보았다.

식은 멍하니 지후를 응시했다. 진수의 말대로 정말 감기에 걸린 건지 조금 붉은 볼을 한 그는 식을 웃으며 바라보고 있었다. 식이 시선을 옮겨 그의 손에 들린 접시, 그가 입은 조금 긴 듯한 잠옷, 그의 뒤에 켜져 있는 텔레비전을 짧게 훑었다. 오른쪽에 뜬 로고는 방금 식이 상을 받은 방송사의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시선이 향한 곳은 어둠이 가득한 집 안에서 홀로 빛을 내고 있는 초였다. 반쯤 녹은 초 하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식에 민망해진 지후가 변명하듯 덧붙였다.

“케이크를 사려고 했는데 이 시간에는 연 데가 없더라고.”

“…….”

“아쉬운 대로 오늘은 작은 초로 하고, 내일 큰 케이크로 다시…….”

지후는 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제 앞으로 다가온 식 때문이었다. 식의 움직이면서 바람이 분 덕에 지후가 애써 붙여놓은 불이 꺼졌다. 아, 힘들게 붙인 건데. 아쉬운 표정을 하던 지후가 곧 눈을 동그랗게 떴다.

“…….”

“…….”

다가온 식이 팔을 뻗어 그를 안았기 때문이었다. 갑작스러운 그의 접근에 접시를 치우지도 못하고 몸에 딱 붙인 채 어정쩡하게 안긴 지후가 눈을 깜빡거렸다. 둘 사이에서 뭉개지는 초코파이를 느낀 지후가 몸을 움직이려 했지만, 귀 옆에서 나직하게 울려오는 식의 목소리를 듣고 서서히 몸에서 힘을 뺐다.

“잠시만.”

“…….”

“잠시만요.”

작은 목소리였다. 잠시 머뭇거리던 지후가 접시를 붙잡고 있던 한 손을 떼 식의 등 뒤로 손을 올렸다. 너무 세지도, 너무 약하지도 않게 등을 토닥이는 손길은 식이 제가 모르던 사이에도 간절히 그리워하고 있던 것이었다. 눈가로 몰려오는 열을 느끼며 식은 눈을 꼭 감았다. 힘을 주어 지후의 허리를 끌어안는 손이 떨리고 있었다.

신발도 벗지 않고, 턱시도 앞에 초코과자를 잔뜩 묻힌 채로, 잔뜩 떨리는 몸으로 선 식은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제가 졌어요, 형.

완벽한 패였다. 저를 죽일 듯이 달려드는 다정함에는 도저히 반격할 수가 없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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