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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애와 거리두기-44화 (44/119)

44화

“……병신.”

이 정도면 병이다. 진심으로 식은 그렇게 생각했다. 다가오는 누군가에게 습관처럼 기대려 하는 자신이 무서웠다. 성장 과정에서 식은 자신이 특별하다는 걸 알았다. 잘생기고, 공부를 잘하고 그런 식의 특별함이 아니었다. 회색 감정에 물든 가족들 사이에서 식 혼자만 색깔에 반응했다. 잘하면 칭찬을 듣고 싶었고, 아프면 누군가 걱정해 주길 바랐다. 하지만 누구도 식을 위해 그렇게 해주질 않았다.

그래서 식은 자신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엄마, 아빠, 큰형, 작은형, 식을 제외한 모두가 이상할 리 없었으니까. 그게 아니란 걸 깨달은 건 학교에 다니고부터였다. 제가 이상한 게 아니었다는 걸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은 후였다.

누구와 관계를 맺건, 식은 애정을 갈구했다. 그렇게 몇 명의 사람을 떠나보낸 후, 식은 기대지 않는 법을 학습했다. 이론은 쉬웠다. 그 사람이 다가와도 괜찮을 정도까지만 곁을 내주면 된다. 관건은 그 정도를 잘 파악해야 한다는 거였다. 다행히 식은 눈치가 빨랐다. 한 번 그 사람을 파악하고 나면, 그 사람에게 제가 감당할 수 있을 정도 이상의 곁을 내주는 일은 없었다.

잘되고 있다고 생각했다. 지후가 갑자기 저와 그 사이에 그어진 금을 뛰어넘으려 하기 전까지는. 의미를 알 수 없는 그의 행동은 식을 얼리고는 또 다시 흐물흐물하게 만들었다. 그의 온기를 그리워하는 게 그 시작이었고, 문이 열리는 소리에 그일까 기대하며 쳐다보게 한 게 그 증거였다.

“어, 지후야.”

문 사이로 들어선 그를 확인하고 안심하는 자신이 싫었다. 정말, 너무 싫었다.

“형, 가보셔야 한다고 하시지 않으셨어요?”

“어, 가야지. 식이랑 이야기 중이었어. 식아, 나 회사 들어갈 일 있어서 갔다 올게. 그동안 지후랑 있어.”

“…….”

“지후야, 힘들겠지만 부탁 좀 하자.”

“네, 형. 걱정 말고 다녀오세요.”

잡을 새도 없이 진수가 병실을 나갔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 뒷모습을 따라 시선을 옮기던 식이, 핸드폰을 귀에 가져다 대며 반쯤 뛰기 시작하는 진수를 보고서야 한숨을 쉬고 고개를 돌렸다.

“…….”

“…….”

손에 들고 있던 종이가방을 내려놓고 안의 물건을 정리하는 지후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식이 입술을 깨물었다. 버석해진 입술은 조금의 자극에도 금세 찢겨나갔다. 입술 사이로 배어 나오는 피 맛을 느끼며 식이 입을 열었다. 그조차도 놀랄 정도로 빠르게 말이 튀어나갔다.

“가도 돼요.”

식 나름의 방어기제 같은 거였다. 허락의 형식을 띤 말은 사실 부탁과도 다름없었다. 더 있으면 위험할 것 같았다. 그에게도, 자신에게도. 잠시 멈칫하는 듯 보였던 지후는 대답 대신 하던 일을 계속 할 뿐이었다. 종이가방 속 물건을 정리해 몇몇은 옷장에, 몇 개는 냉장고에 넣어놓는 그의 움직임을 따라가던 식이 미간을 찌푸렸다. 아까보다 더 날카롭게 말이 튀어나갔다.

“가셔도 된다구요.”

“…….”

“충분히 혼자 있을 수 있으니ㄲ…….”

그때였다. 지후가 휙 소리까지 날 정도로 큰 몸짓으로 뒤돌았다. 그 기세에 말을 멈춘 식이 입술을 놓고 지후를 마주봤다.

“아니. 넌 혼자 못 있어.”

지금 화내는 건가. 머리를 쓸어 올리며 저를 내려다보는 얼굴을 보던 식은 멍하니 그런 생각을 했다. 무표정한 지후의 얼굴은 많이 봤지만 저런 표정은 처음이었다. 꾹꾹 참는 것이 여실히 드러나는 얼굴은 무섭게 굳어 있었다.

“열 떨어진 지 이제 겨우 반나절 지났어. 너 여섯 시간 전까지 눈도 제대로 못 뜨고 끙끙 앓고 있었다고. 근데 혼자 있겠다고?”

“…….”

“그래. 계획이라도 들어보자. 어떻게 할 건데?”

“…….”

“다시 아프면 어떻게 할 거냐고. 매니저 형들도 다 바쁘고, 나까지 가면 병실에 아무도 없을 텐데.”

이렇게 몰아붙여질 줄은 몰랐던 터라 식은 어떠한 대답도 내놓지 못했다. 둘의 눈 맞춤이 꽤 오래 지속되었다. 먼저 시선을 돌린 건 지후였다. 고개를 돌린 그가 호흡을 정리하듯 숨을 몰아쉬고는 식을 마주봤다. 방금 전보다 한결 차분해진 표정이었다.

“네가 나 마음에 안 들어 하는 거 알겠고, 내가 이러는 게 부담스러운 것도 알겠어.”

“…….”

“근데 그거 다 제쳐 놓고, 너 지금 아파. 그게 중요한 거야.”

“…….”

“일단 낫고 생각해. 화를 내든, 뛰쳐나가든. 다 낫고 나서 하라고. 네가 뭘 모르나 본데, 그게 먼저야.”

확인 도장을 찍듯 식의 눈을 한 번 더 쳐다본 지후가 뒤돌아서 하던 일을 다시 하기 시작했다. 일정한 속도로 움직이는 등을 몇 초 더 바라보고서야 식은 지금 이 상황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그가 방금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로 화를 낸 이유는 자신이 제 몸을 챙기지 않아서였다. 나을 생각은 하지 않고, 도와주려는 저에게 가도 된다고 해서. 그러니까…… 온전히 저를 위한 이유였다.

그 사실을 믿을 수가 없어서 식은 한참을 더 그 뒷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말했던 대로, 식의 퇴원까지 지후는 그의 옆에 있었다. 그리고 예상과 달리 둘 사이에서는 그 이후 어떠한 충돌도 일어나지 않았다. 지후는 간호에 충실했고, 식은 그런 그를 티 나지 않게 훔쳐보는 데 충실했다.

화장실에서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나온 식이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병실 문가에 선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지후가 아니었다. 의아함에 슬쩍 눈썹을 들어 올리던 그가 제게 다가오는 사람을 응시했다. 며칠간 살이 빠진 얼굴에서 턱 선이 유독 도드라져 보였다. 다가오던 간호사의 얼굴이 붉어졌다. 하얀 종이가 식의 쪽으로 내밀어졌다.

“제가 진짜 팬이라서…… 사인 한 장만 해주실 수 있을까요?”

“아. 네.”

익숙하게 표정을 관리한 식이 그녀가 건넨 펜으로 종이 위에 싸인을 마쳤다. 이름까지 물어봐 적어주는 그를 황홀한 표정으로 쳐다보던 그녀는 종이를 다시 받고서도 자리를 떠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마주친 시선에 작게 미소 지어주던 식이 티 나지 않게 문을 힐끔거렸다.

지후가 보이지 않았다. 아침 내내 정리하던 짐을 고이 쌓아둔 채 나가는 모습에 퇴원 수속을 밟으러 가려나 했다. 그게 벌써 한 시간 전의 일이었다. 다른 간호사가 들어와 환복하라는 이야기를 할 때까지도 얼굴을 비추지 않는 그가 의아했다.

“사실 놀랐어요.”

“……네?”

“제가 인터넷을 다 믿는 건 아닌데…… 워낙 이야기가 많았으니까…….”

그러는 사이에 그녀는 뜬금없는 소리를 시작하고 있었다. 당황한 얼굴로 대답하는 식과 또 눈을 마주한 그녀가 다시 얼굴을 붉혔다. 그렇지만 말을 이어나가는 목소리는 또렷했다. 그제야 식은 왜 그녀가 자리를 뜨지 않고 있고 제 앞에 서 있는지를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무슨 이야기일지는 몰라도, 지금 하는 이야기를 꼭 들려주고 싶어서였으리라.

“근데 이번에 이렇게 보게 되니까, 역시 그런 말은 걸러서 들어야 한다는 걸 알겠더라구요.”

”…….”

“사람들 말대로 정말 안 친한 거면, 그렇게 밤새워 간호를 해줄 리가 없잖아요. 그날 당직 섰던 간호사들도 다 정말 깜짝 놀랐다니까요. 저희가 괜찮을 거라고 눈 붙이시라고 해도, 체온 재러 들어올 때마다 깨 계시고.”

“……이지후가…….”

“네? 네! 계속 계셨잖아요.”

반쯤 신음처럼 나간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뜬 그녀의 확답이 돌아왔다. 멍한 표정이 된 식을 본 그녀가 망설이다가 이내 어색하게 인사를 했다. 반사적으로 머리를 약간 숙여 인사를 돌려주는 얼굴은 어딘가 정신이 팔린 모양새였다.

괜한 이야기를 했나 하는 생각에 병실을 나가면서도 흘끔 돌아보던 그녀가 고개를 돌리자마자 마주한 덩치 큰 남자에 혼비백산해 물러났다.

“어머!”

“안녕하세요.”

“네, 네.”

간호사가 저를 보고 놀라든 말든, 눈을 접어 사람 좋게 웃어 보인 진수가 그녀를 지나쳐 병실로 들어왔다.

“가자, 식아.”

“……지금요?”

“어. 퇴원 수속도 끝냈고 이제 가면 돼.”

“……지후 형은.”

“지후? 지후 갔는데?”

식의 깜짝 놀란 목소리에도 지후가 정리해 쌓아둔 짐을 하나둘 집어 드는 진수는 무덤덤했다. 오히려 뭘 그런 걸 물어보냐는 듯한 말투였다.

“먼저 가라 했어. 퇴원 수속이야 내가 밟으면 되니까. 그리고 걔도 좀 쉬어야지. 아까 보니 감기 기운도 있는 것 같던데.”

“……감기요?”

“어. 기침하더라고.”

그 말을 끝으로 진수는 얼른 가야 한다며 그를 재촉했지만 식은 선 자세 그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아침에 기침 소리를 들은 것 같기도 했다. 왜 몰랐을까. 감기에 심하게 걸린 사람 옆에서 간호를 하겠다고 사흘을 꼬박 붙어 있었던 그였다. 제 이마를 짚은 것만 해도 열 번은 될 거고, 그 외 사소한 터치를 합하면 바이러스가 옮아가기에는 충분하고도 넘쳤다.

하얗게 질려가는 식을 본 진수가 덩달아 심각해진 표정으로 그를 살폈다.

“너 왜 이렇게 창백해. 다 나은 거 맞냐?”

“…….”

“식아.”

“전…… 괜찮아요.”

“진짜지?”

“네.”

“그래. 시상식 갈 건데 정신 바짝 차리고, 인마.”

돌아온 대답에 한결 안심한 얼굴을 한 그가 짐을 들지 않은 손으로 식의 어깨를 툭 쳤다. 앞장서 병실을 걸어 나가는 얼굴을 본 식이 손을 들어 얼굴을 쓸어 내렸다. 스스로도 느껴질 정도로 뜨겁던 몸은 정상으로 돌아왔다. 호흡도 그랬고, 컨디션도 그랬다. 하지만, 지후는…….

“식아!”

“갈게요.”

짧게 한숨을 흘린 식이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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