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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애와 거리두기-43화 (43/119)

43화

식이 잠깐이나마 정신을 차린 건 제 몸이 좌우로 마구 흔들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을 때였다. 힘겹게 눈을 뜨자마자 보인 건 누군가의 뒤통수였다. 목덜미로 내려오기도 전에 끝난 짧은 머리가 식의 앞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이상한 건 남자의 머리가 흔들릴 때마다 제 몸도 같이 흔들리고 있다는 거였다. 멀미가 날 것 같다고 생각한 것도 잠시, 잠깐의 생각할 틈도 주지 않는 몸 상태는 눈앞이 흐려지게 만들었다. 결국 식은 다시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이 새끼는 대체 뭘 처먹었길래 이렇게 무거워.”

이 새끼가 설마 난가. 그 의문을 마지막으로 식의 의식이 굴러 떨어졌다. 끝이 보이지 않는 까만 어둠이 그를 집어삼켰다.

그가 다시 눈을 뜬 건 한참이 지나서였다. 비록 시계도 보지 못한 상태였지만 식의 감각이 느끼는 바로는 그랬다. 미간에 힘을 주어 들어 올린 식이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갑자기 찾아온 어둠에 적응하기 위해서였다.

몇 번 눈을 깜빡이고 나서야 주위의 사물들이 어렴풋이 보였다. 탁자, 가습기, 그리고 창문. 까맣게 어둠이 찾아온 창밖을 확인한 식이 고개를 숙여 제 손을 내려다봤다. 어딘가 답답한 느낌이 든다 했더니 링거가 꽂혀 있어서 그런 거였다. 일정한 속도로 떨어지는 물방울을 잠시 응시하던 식은 시큰둥하게 확신했다.

병원인가 보네. 놀랍지는 않았다. 식은 일 년에 꼭 한두 번씩 크게 앓았다. 잔병치레는 없는 편이었지만, 한 번 아플 때마다 지독하게 앓는 덕에 몸 상태가 조금만 안 좋아져도 경계해야 했다. 아픈 자신을 챙기는 건 자신밖에 없다는 걸 깨달은 후로는 더 그랬다.

그래도 올해는 운동도 꾸준히 한 데다 몸 상태도 괜찮은 듯해서 안심했더니 이렇게 한 해를 며칠 남기지 않고 병원 신세를 지게 만든다. 물론 거기에는 촬영장에서 인정사정없이 맞아댄 비도 큰 역할을 했겠지만. 한쪽 눈썹을 슬쩍 들어 올리는 걸 끝으로 나름의 수긍을 마친 그가 고개를 돌리다 말고 멈칫했다.

“…….”

불편한 오른손만 신경 쓰느라 모르고 있었다. 누군가 제 왼손을 쥐고 있었다는 걸. 생각해보니 이상했다. 링거 달린 게 아무리 불편해도 타인의 손에 붙잡힌 왼손이 불편해도 배는 더 불편해야 하는 게 정상 아닌가. 눈으로 확인하고서야 손이 잡혀 있었다는 걸 안 자신이 이상해서 식은 미간을 찌푸렸다.

손을 따라간 곳에는 지후의 얼굴이 있었다. 의자에 앉아 상체만 침대 위에 얹어놓은 자세가 불편할 법도 한데, 곤히 잠에 든 얼굴은 식이 깨어난 것조차도 모르는 듯했다.

잠시 그 얼굴을 바라보던 식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새 거칠어진 입술이 느껴졌지만, 알 바 아니었다. 손에 힘을 주어 빼내려 했지만, 예상보다 단단하게 맞물린 손은 그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일부러 힘을 주는 건가 싶어 지후의 얼굴을 잠시 관찰하듯 바라보기도 했지만, 일정한 속도로 오르내리는 등을 보았을 때 잠에 든 건 확실해 보였다.

식이 반쯤 포기하고 손에 힘을 뺄 때였다. 사실 더 할 힘도 없었다. 조금 움직인 것만으로도 몸이 금세 피곤해졌다. 그때였다. 눈앞의 등이 꿈틀거린 건. 맞잡은 식의 손을 꽉 잡는다 싶더니 이내 겹쳐진 손이 서서히 풀어졌다. 동시에 몸을 일으키는 지후를 본 식이 당황한 낯으로 눈을 깜빡거렸다.

지후도 마찬가지였다. 졸린 눈을 하고는 두어 번 눈을 깜빡이던 그가 초점을 잡아 식을 응시하기를 잠시, 이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성큼 다가와 이마를 짚는 손길이 거침없었다. 차가운 손이 이마를 여러 번 고쳐 짚었다. 처음에야 차가움에 몸을 움츠렸지만, 점점 시원하게까지 느껴졌다. 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를 깨달은 식이 얼굴을 굳혔다.

“내렸네.”

그러는 사이 식의 이마에서 손을 뗀 지후는 작은 중얼거림까지 내놓고 있었다. 안도가 묻어나는 음성에 식이 고개를 돌려 지후를 응시했다. 지후가 무언가 생각난 표정으로 몸을 물려 자리에 섰다.

“잠시만. 너 깨어나면 알려달라고 했거든. 다녀올게.”

“…….”

“금방 올 테니까 다시 자면 안 돼. 졸려도 조금만 참아. 알았지?”

신신당부를 하고는 병실을 나서는 지후를 보던 식이 멍한 머리를 굴려 생각을 정리했다. 그러고 보니 자신이 왜 병원에 온 건지는 알 것 같다 쳐도, 언제 누구와 함께 오게 된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지금으로서는 이지후가 데리고 왔을 가능성이 높긴 했다. 근데 그렇다면 제가 잠깐 정신을 차렸을 때 보았던 까만 머리통은 누구였단 말인가.

드문드문 이어가던 생각을 멈춘 건 사라졌던 지후가 간호사를 대동하고 병실에 들어서서였다. 들어오자마자 익숙하게 식의 귀에 온도계를 넣었다 뺀 간호사가 지후에게 고개를 끄덕이는 게 보였다.

“많이 내렸네요. 잘하셨어요.”

뭘 잘했다는 건지 이해할 수 없는 대화였지만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지후를 보니 애초부터 식이 알 수 없는 대화일 게 분명했다.

“이제 다시 주무셔도 돼요. 내일 선생님 회진 도실 거니까 그때 다시 체크할게요.”

링거까지 갈아준 그녀가 방을 나서자마자 지후가 다가왔다. 식은 지후에게 물어볼 게 많았지만, 그 질문들을 꺼내기도 전에 정신이 몽롱해졌다. 옆으로 다가온 지후는 허리 부근까지 내려간 이불을 끌어 올려 목까지 덮어주고 있었다. 식의 팔을 조심스럽게 들어 이불 위에 편하게 올려주고 이불을 정리하는 폼이 자연스러웠다.

“더 자. 피곤해서 그런 거래.”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서서히 느려지는 눈 깜빡임은 명백하게 그 반대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가슴 부근에 손을 얹고 다독이는 손길이 따스했다. 아픈 자신을 간호해 주는 이, 이불을 정리해 주고 잘 자라고 가슴 위를 다독여 주는 손길 모두가 낯선 것들뿐이었다.

적응할 수 없는 따뜻함이 저 멀리 가라앉아 있던 식의 마음을 둥둥 띄웠다. 모든 게 낯선 감정들뿐이었다. 그렇지만 저항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조금만 더 솔직해지자면, 저항하기 싫었다. 식의 눈이 감겼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진수가 있었다. 다가오는 심각한 얼굴을 보면서 식은 한숨을 쉬었다. 안도의 한숨인지, 아쉬움의 한숨인지는 알 수 없었다. 분명한 건 방금 진수의 얼굴 위로 지후의 얼굴이 겹쳐졌다는 거였다. 잠깐 병실 안을 둘러봤지만, 그는 없었다. 한 명이 쓰기에는 조금 넓은 병실에는 진수와 저뿐이었다. 집에 간 거겠지. 마음 속 소리가 곧바로 내놓은 대답을 되새기며 식이 진수와 눈을 맞췄다.

“일어났어?”

“형.”

“그래, 이 자식아. 아프면 아프다고 말을 해야지. 내가 애들한테 연락 받고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몸을 일으키려 하는 식을 도운 그가 얼추 자세를 잡고 앉은 식을 향해 잔소리를 시작했다. 하얗게 질린 얼굴을 보았을 때 놀랐다는 게 과장만은 아닌 것 같아서 식은 힘이 없는 상태에서도 입꼬리를 올려 힘 빠진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모습이 그를 더 괜찮지 않아 보이게 한다는 걸 모르는 것처럼. 진수가 잔소리를 멈추고 긴 한숨을 쉬었다.

“촬영 때문인 거지.”

“영향은 있었겠지만, 그것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아요.”

“그럼.”

“아시잖아요. 저 한 번씩 이러는 거.”

그 말에는 진수도 더 이상은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식은 작년부터 본격적으로 연기 활동을 시작하며 거의 그와 함께한 진수에게는 여러 번 앓는 모습을 보여주었었다. 아픈 모습을 보이기를 꺼려하는 식 때문에 진수가 할 수 있는 건 약을 사다주곤 하는 것 정도였다. 조금만 있으면 나을 거라고 말하는 식을 처음에는 믿지 못하던 그도, 며칠 후면 정말 멀쩡해지는 식을 보며 나중에는 그가 요구하는 약만 찾아 들려주고 말았다.

정면에 놓인 시계를 보며 식이 대수롭잖은 말투로 물었다.

“얼마나 이러고 있었어요? 저.”

“이틀째야, 오늘이.”

이틀이라. 눈을 뜨자마자 시간이 꽤 지난 것 같다는 생각은 했지만 이틀이나 지났을 줄은 몰랐다. 생각해 보면 그리 놀랄 만한 일도 아니었다. 어릴 때는 일주일을 끙끙 앓은 적도 있었으니까.

“그래도 이만하길 다행이지.”

“…….”

“더 늦게 왔으면 폐렴으로 넘어갈 수도 있었을 거라더라.”

“……폐렴이요?”

“그래, 인마. 지후가 발견해서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어후. 난 상상도 하기 싫다.”

질린 얼굴로 고개를 저어대는 진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식이 시선을 내렸다. 어제와 달리 아무것도 잡히지 않은 왼손이 눈에 들어왔다. 기다렸다는 듯이 떠오르는 것은 밤새 제 손을 꼭 그러쥐었던 지후의 손이었다.

이마 위로, 가슴 위로, 손 위로 올라왔었던 서늘한 손. 인정하기 싫지만, 인정하지 않으려 했으나 이쯤 되니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눈을 떴을 때 그가 있어서 안심했다. 우습지만 사실이었다. 그렇게 모진 소리를 내뱉고 돌아섰으면서, 눈을 뜨자마자 보인 그에 마음이 놓였다. 그래서 다시 잠들 수 있었다.

아까 전 눈을 뜰 때도 그랬다. 저도 모르게 지후를 찾고 보이지 않자 실망했다. 온기가 없는 손을 괜히 쥐었다 펴보는 그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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