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형은 저번에도 그랬지만 별로 안 내키네. 너랑 은호 둘 다 활동 많아서 나가서 사는 거나 들어와서 사는 거나 별 차이 없는 건 알아. 이번에도 촬영장 근처 오피스텔 잠깐 얻어서 유용하게 쓰기도 했었고. 근데 아무리 그렇다 해도 나가 사는 건 다른 문제거든.”
“…….”
“특히 지후가 요새 정말…… 노력하는 모습 보이고 있는데. 당장 밥차만 해도 지후가 다 알아보고 보낸 거야. 최근에 네가 숙소 가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지만 애들 분위기도 엄청 좋아졌거든.”
“…….”
“강요하는 건 아냐. 그냥 한 번만 더 생각해 보라고.”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는 식 덕에 진수의 말만 더 장황해지고 있었다. 물끄러미 바라보는 식과 눈을 맞춘 진수가 한숨을 쉬며 말을 맺었다.
“내가 괜한 소리를 했나 보다.”
씁쓸함이 묻어나는 말과 함께 고개를 돌리는 진수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식이 대답했다.
“……생각해 볼게요.”
작은 목소리였지만 백미러를 통해 식을 흘끔 쳐다보는 얼굴을 보니 전해진 모양이었다.
내내 힘이 들어가 있던 진수의 어깨가 눈에 보일 정도로 풀어지는 걸 보니 그도 그 이상의 대답을 기대하지는 않는 듯했다. 머릿속에 가득 들어찬 것들을 조금이라도 털고 싶어서 꺼낸 이야기였는데, 두 배는 더 무거워진 것 같다. 복잡한 머릿속을 외면한 식이 창밖을 응시했다.
띠릭.
자정을 훌쩍 넘긴 시간이었다. 촬영 때문에 밤낮이 자주 바뀌고는 하는 식에게는 익숙한 귀가 시간이기도 했다. 사실 이 편이 더 편하기도 했다. 누구와도 마주칠 필요 없었고, 그러면 괜히 불편한 감정을 느낄 필요도 없으니까. 제 방까지만 걸어가서 문을 닫고 나면 그 이후로는 온전히 제 공간이었다. 누구도 들어올 수 없고, 들어온 적 없는 식만의 공간 말이다.
문을 열자마자 마주한 어둠에도 성큼 걸음을 내딛던 식이 얼마 가지 못해 멈춰 섰다.
“…….”
“…….”
부엌에서 은은하게 흘러나오고 있던 빛 때문이었다. 식의 시선이 이내 식탁에 앉아 이쪽을 건너보는 지후를 향했다. 인기척에 고개를 든 지후의 눈이 커진다 싶더니 이내 그의 손에서 책이 팔랑 떨어졌다.
떨어지는 책을 따라가던 식의 얼굴이 굳었다. 제 얼굴로 쏟아지는 시선에도 불구하고 가만히 책을 내려다보던 식의 눈이 흔들렸다. 누군가 불을 붙이기라도 한 것처럼 가슴이 뜨거워졌다. 그제야 그는 오는 내내 제가 품고 있었던 것이 심지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누군가 한 마디만 더하면 불이 붙어버릴 수 있는 보잘것없는 감정 쪼가리.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던 감정의 발견은 식의 머릿속을 엉망으로 만들고 있었다. 결국 입 밖을 나간 목소리는 그조차도 낯설 정도로 낮게 떨리고 있었다.
“누가 시키기라도 했어요?”
식은 제 눈으로 올라오는 열을 느낄 수 있었다. 눈앞이 흔들릴 정도로 지끈거리는 두통도 함께였다. 온몸이 뜨거웠다. 지후의 얼굴이 그의 시야에서 파도치듯 흔들리고 있었다. 떨리는 눈을 감았다 뜨자 그제야 지후의 얼굴이 올곧이 보였다.
늦은 시간까지 부엌에서 불을 켜고 있었던 것은 자신이면서, 식이 방금 전까지 찍고 온 드라마의 원작 소설을 읽고 있었던 것도 자신이면서. 안 하던 짓을 해서 사람을 하루 종일 흔들어놓은 것도 그 자신이면서. 당황한 얼굴을 하고 자신을 올려다보는 그가 식은 그 와중에도 조금 우스웠다.
“무슨 소리를…….”
“아니라면.”
“…….”
“왜 이러는 건지 말해봐요.”
생각하면 할수록 그는 자신에게 이럴 만한 이유도, 애정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건 괜찮았다. 식도 마찬가지였으니까.
“칭찬이라도 듣고 싶어요?”
하지만 그렇다면 이런 행동을 해서는 안 됐다. 촬영장에서 누군가에게 챙김을 받는다는 느낌을 받게 해서는 안 됐고, 늦은 밤 자지 않은 그가 자신을 기다린 건 아닐까 생각하게끔 만들어서도 안 됐고, 지금 제 말에 상처받는 표정을 해서도 안 됐다. 이건 반칙이었다. 그어졌어도 한참 전에 그어졌을 선을 제 멋대로 훌쩍 넘어버린 그가 괘씸했다.
“그걸 바라는 거예요? 삼 년 동안 칭찬 한 번 못 받았다는 게 해체 이야기 나오니까 억울해지던가요?”
“그런 거…… 아니야.”
“그럼 뭡니까.”
“…….”
“대답도 못 할 일을 왜 했냐고 묻잖아요.”
이런 식으로 말할 생각은 없었다. 아니, 사실 그와 이렇게 대화를 나눌 생각도 없었다. 솔직한 마음으로는 모른 척하고 싶었다. 갑자기 호의적으로 구는 그의 의도가 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꼴사납게 반응하는 자신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렇지만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방금 그가 뱉어낸 수많은 질문 중 어느 것에도 대답 하나 시원하게 내놓지 못하면서 제 시선을 피하지 않고 있는 얼굴은 그동안 식이 견뎌온 모든 것들을 견딜 수 없게끔 만들었다.
어느새 쥐고 있던 주먹이 떨렸다. 주먹만이 아니었다. 눈 속에 맨몸으로 갇힌 사람처럼 오들오들 몸이 떨렸다. 식이 눈을 깜빡거렸다. 피곤했다. 몸도, 마음도. 더 이상은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어차피 의미 없는 대화였다.
판단을 마친 식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여전히 지후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몇 걸음만 더 가면 제 방이다. 이 집에서 유일하게 마음이 놓이는 자신의 공간. 문고리를 잡던 식이 멈칫했다.
“뭐가 됐든 상관없으니까. 다시는 이런 일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뒤돌지 않아 지후의 표정도 알 수 없었지만 차라리 이 편이 나았다. 어두운 방에 들어선 식이 침대로 걸어갔다. 촬영 후 물에 젖은 옷도 갈아입고, 신발도 갈아 신었지만 마치 그것이 착각이었나 싶을 정도로 떼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무거웠다. 겨우 발을 옮겨 침대 앞에 도착한 그가 침대 위로 무너지듯 누웠다.
베개에 얼굴을 묻자마자 찾아온 수마에는 저항할 수 없었다. 저항할 수 없는 몸 상태이기도 했다. 얼굴을 묻은 베개가 뜨끈해지는 걸 느끼면서도 식은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그의 입술 사이로 차마 털어내지 못한 말이 흘러나왔다가 이내 방 안을 잠식하는 침묵에 먹혔다.
……책임지지도 못할 거면서.
“야, 그냥 먹자니까? 깨워봤자 좋은 소리 못 듣는다고.”
“그래도.”
“이지후.”
“벌써 점심시간이잖아. 잠시만. 그냥 물어보기라도 할게. 너네 먼저 먹고 있어.”
뒤에서 성을 내는 우람이 뻔히 느껴졌음에도 대현은 걸음을 옮겨 식의 방문 앞으로 걸어가는 자신을 막을 수 없었다. 문을 두드리려 손을 올리던 대현이 잠깐 멈칫했다. 새벽에 있었던 일 때문이었다. 가라앉은 식의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했다.
‘다시는 이런 일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대현은 그런 경험이 처음이었다. 누군가 대현의 앞에서 보란 듯이 선을 긋는 걸 지켜보는 것 말이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그의 쏟아지는 질문에 답하지 못한 건. 이미 여러 번 선이 그인 곳 위에 힘주어 또 그은 선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한 건.
물론 그렇다 해서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물론 어제는 갑작스러운 식의 말에 놀라 대답하지 못했다지만, 식이 다시 물어본다면 제대로 대답할 자신이 있었다. 식이 의문을 표했던 모든 행동은 진심 어린 호의에서 나왔다는 걸. 누군가를 좋아하고 챙겨주고 싶은 데에 특별한 이유랄 게 있겠냐고 말이다.
생각을 마친 대현이 문을 두드렸다. 두 번을 두드렸으나 안에서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하다못해 작은 인기척조차 나지 않았다. 조용해도 너무 조용했다. 문에 귀까지 대보던 대현이 이상함을 느끼고는 문고리를 잡았다.
슬쩍만 확인하자고 생각하던 것도 잊고 처음 들어온 식의 방을 천천히 훑던 대현이 침대 위의 식을 발견하고는 숨을 죽였다. 일정한 속도로 오르내리는 등을 확인한 대현이 문을 닫다 말고 멈칫했다. 작지만 주의를 기울인다면 들릴 정도로 나는 작은 소리 때문이었다. 그 소리가 제가 아는 어떤 소리와 닮은 것을 눈치챘을 때는, 이미 그는 문턱을 넘어 침대로 다가서고 있었다.
가까워질수록 후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땀이 송글송글 맺힌 얼굴도 보였다. 손을 뻗어 식의 이마를 짚은 대현의 표정이 굳었다. 꽤 큰 인기척에 눈을 뜰 법한데도 곱게 감긴 눈은 조금의 미동도 없었다. 그와 달리 입에서는 작은 신음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식아. 김 식……!”
몸에서 뿜어지는 열기에 예상은 했다지만 이마가 불덩이였다. 입술을 깨문 대현이 식의 어깨를 흔들었지만 신음만 더욱 짙어질 뿐이었다. 대현이 결국 입술을 깨물며 밖을 향해 소리쳤다.
“한우람! 윤성아!”
“뭐야, 왜 그래.”
“형, 무슨 일이에요?”
우당탕 소리가 났고, 곧 우람과 윤성이 식의 방 문가에 섰다. 차마 들어오지는 못하고 문턱에 선 채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고 있는 둘을 본 대현이 다급하게 외쳤다.
“매니저 형한테 전화 좀 해줘.”
“진수 형?”
“누구든 상관없으니까 빨리.”
“뭐 때문인데. 그걸 알아야 전화를…….”
“아픈 것 같아.”
“어?”
“식이 아픈 것 같다고. 빨리!”
답지 않게 재촉하는 대현에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던 우람이 표정을 굳히고는 곧 어딘가로 달려갔다.
“윤성아, 너는 수건에 물 좀 적셔서 가져와 줄래?”
“아, 네! 금방 올게요!”
고개를 끄덕이며 후다닥 뛰어가는 윤성까지 확인하고 고개를 돌린 대현이 시선을 내렸다. 식은 새벽에 보았던 차림 그대로였다. 괴로운 듯 찌푸리는 얼굴 위로 새벽에 보았던 사나운 표정이 겹쳐졌다. 어딘가 상기된 얼굴을 보고서도 아플 거라고는 생각을 해보지 못했던 자신이 한심했다.
짧게 자책까지 한 대현이 시선을 돌렸다. 식의 왼쪽 손에 꽉 쥐여진 이불이 눈에 들어왔다. 이불을 붙잡고 밤새 끙끙거렸을 얼굴이 선했다. 잠시 바라보던 대현이 그의 손에 붙들린 이불을 빼고 그 자리에 대신 제 손을 끼워놓았다.
“……이러는데 어떻게 신경을 안 쓰냐.”
한숨이 묻어난 소리로 그가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