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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애와 거리두기-41화 (41/119)

41화

결국 욕을 읊조린 식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수가 제 외투를 걸어놓은 옷걸이 쪽으로 걸어간 식이 주머니 안으로 깊숙이 손을 넣었다. 손에 들려 나온 것은 식이 얼마 전 바꾼 신형 폰이었다. 홀드를 풀자마자 뜨는 문자는 식이 촬영장으로 오는 내내 들여다보고 있던 것이었다.

<생일 축하해. 마지막 촬영이라고 들었는데 촬영 잘 하고. 곧 숙소에서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지후>

여러 번 본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었지만, 식은 이미 백 번은 본 것 같은 문자를 또 여러 번 읽었다. 멈칫하게 되는 부분은 매번 같았다. 생일이라는 글자에서 한 번. 자신이 오늘 촬영하는 걸 알았다는 부분에서 한 번. 숙소라는 부분에서 한 번. 그리고 발신자의 이름에서 또 한 번. 낯설 수 없는 사이임에도 낯설었던 그의 이름이 식의 시야에서 벗어날 줄을 몰랐다.

“왜 나한테 이러는 겁니까.”

결국 입 밖으로까지 나온 음성을 뒤로하고 식이 홈 버튼을 눌렀다. 문자함과 메시지 창에서는 지인들의 생일 축하 문자가 쏟아지고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하나씩 넘기던 식이 멈칫했다. 자신도 모르게 찾고 있었음을 깨달아서였다.

……없으리란 걸 제일 잘 아는 게 자신이면서. 수많은 문자 사이에서도 찾을 수 없는 발신인들은 제가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한 자들임에도, 오늘이 무슨 날인지조차 모를 것이었다. 짧게 웃음을 흘린 식은 생각했다. 정말 웃기지 않은가. 성장과정에서 무수히 겪은 일임에도 매번 의연하지 못하는 자신이.

하지만 지금 이 복잡한 심경은 그 때문만은 아니었다. 굳이 말하면 지후의 문자가 가라앉는 것에 그칠 수 있었던 식의 마음에 불을 붙였다. 축하 문자를 보낼 거라고 고려해 보지도 않았던 그에게서 온 문자 위로 몇 주 전 보았던 그의 모습이 오버랩되었다.

무릎을 꿇고는 올려다보던 얼굴까지 떠오르자 식은 더 견딜 수 없었다. 핸드폰을 끄고 소파 위로 아무렇게나 던진 식이 다시 대본이 있는 의자로 돌아갔다. 대본을 훑던 텅 빈 눈은 이내 이를 악물며 집중하기 시작한 그로 인해 까맣게 물들었다.

컷. 감독의 사인이 울렸다. 열 번 만에 나온 사인이었다. 식의 머리 위에서 떨어지던 물이 뚝 그쳤다. 주위에서 지켜보던 코디들이 얼른 다가와 식의 어깨 위로 두꺼운 모포를 덮었다. 그제야 식은 제가 몸을 떨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영하의 날씨에 폭우 촬영이라니. 좋은 장면을 위해서 대배우들의 몸을 혹사시키는 것도 주저하지 않는다고 유명한 감독이 일개 아이돌 출신 배우에 불과한 식에게 관대할 리 없었다. 할 수 있겠으면 하고, 아님 말고. 선택권을 주는 듯한 안경 너머의 눈은 오히려 강압보다 더한 힘이 있었다.

모두가 말렸지만 식은 고개를 젓고는 답했다. 하겠습니다. 별 다른 대답 없이 뒤도는 감독을 보던 식은 걱정하듯 말을 건네는 주위 사람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웃어 보였다. 괜찮아요, 전. 아역 배우 시절부터 입에 붙었던 말은 익숙하게 흘러나왔다.

그래도 다행인 건 이 장면이 식의 마지막 촬영분이라는 것이다. 촬영이 남아 있는데 감기에 걸리기라도 했다간 더 큰일이었을 거다. 마지막 촬영인 걸 아는 감독이 더 혹독하게 굴려댄 걸지도.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생각을 하며 코디들이 건네준 핫팩을 쥐던 식이 멈칫했다. 롱패딩을 입고 종종걸음으로 걸음을 옮기던 선배 배우 하나가 식의 앞에서 걸음을 멈춰서였다. 의아하긴 했지만 어쨌든 연차가 꽤 높은 그녀의 등장에 식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인사를 받은 그녀가 말을 걸었다. 그녀는 식을 안타까워하는 듯한 표정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감독님도 너무하신다니까. 생일인 사람을 이렇게 비를 홀딱 맞게 해.”

“……네?”

“멤버들 마음 아프겠다. 잘 부탁한다고 밥차까지 보내줬는데.”

식의 얼굴 위로 덜 닦인 빗방울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옆의 코디가 호들갑을 떨며 손에 든 수건으로 닦아내는 걸 느끼면서도 식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촬영 들어갈게요~!”

“어머. 가야겠다. 어쨌든 잘 먹었어, 식 씨. 그동안 수고 많았어~!”

같은 아이돌 출신이라서 그런지 함께 촬영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유독 식에게 호의적인 편이었던 그녀였다. 그래서 이런 살가운 인사가 낯선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들은 죄다 낯설었다. 무엇보다 그녀가 제 생일까지 찾아 알 정도의 관심을 가졌을 리 없었다. 그리고 밥차라니. 누가 자신을 위해 밥차를 보낸단 말인가.

미간을 슬쩍 찌푸린 식이 그 말을 끝으로 사라지는 배우의 뒷모습을 좇다 말고 시선을 돌렸다. 진수를 찾기 위해서였다. 물어볼 게 산더미 같았다. 근데 이상했다. 진수가 보이지 않았다. 촬영 때마다 늘 주위에 있었던 그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에 식의 미간이 구겨졌다. 촬영장을 두리번거리는 그가 옆의 코디에게 물었다.

“누나. 진수 형 어딨어요?”

“어? 아까 밥차 때문에 나가셨는데. 잠시만. 전화해 볼게.”

또 밥차 이야기다. 두 번째로 듣는 이야기에 식은 저절로 구겨지는 인상을 막을 수 없었다. 결국 거친 손길로 어깨 위의 얹어진 모포를 팽개친 그가 촬영장 밖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식아! 어디 가! 너 그렇게 가면 감기 걸려!”

깜짝 놀라 쫓아오는 그녀들을 뒤로하고 걷던 그의 걸음 속도가 느려졌다.

“…….”

“어, 식아! 촬영 끝났어?”

진수가 화색을 하며 식에게 다가왔다. 만나자마자 물을 게 많았으나 식은 아무 말도 꺼낼 수 없었다. 그의 눈이 제 눈앞에 놓인 포장마차 형식의 밥차와 플래카드를 차례대로 훑었다.

-김 식의 21번째 생일을 축하합니다 from 플러그

플러그. 멍한 상태로도 식은 그 단어를 읊조렸다.

“주인공 왔네!”

“앉아 앉아!”

“촬영 끝이라며, 오늘?”

“생일 축하해!”

시끌벅적한 주변 공기에 식이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봤다. 출연진뿐만 아니라 식이 얼굴만 익힌 제작진들까지도 그의 주위를 둘러싸고 그를 밥차 앞에 마련된 식탁 쪽으로 끌고 있었다. 앉아 있던 사람들이 자리를 비켜주며 식에게 잘 먹었다는 인사를 했다. 얼떨결에 끌려 자리에 앉던 식이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지켜보는 진수를 보고 눈을 깜빡거렸다. 누군가 방금 식의 앞에 놓아준 도시락에는 쌀밥을 비롯해 갈비찜 등 푸짐한 음식들이 한가득이었다.

“생일상에 미역국이 빠지면 안 되지~!”

주위를 둘러싼 사람들 중 누군가가 건넨 국그릇을 받아든 식이 가만히 그를 내려다봤다. 김이 올라오는 미역국을 본 그의 표정이 흐트러졌다. 식이 얼른 먹기를 바라는 듯, 기대 어린 표정을 하는 사람들 틈에서도 식은 수저를 들다 말고 다시 고개를 들어 플랜카드를 확인했다.

아까는 보지 못했던, 크게 프린팅된 글 밑에 작게 덧붙여진 글이 있었다. 주의를 기울여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아채지 못할 정도의 크기였다. 문구를 확인한 식의 눈이 까맣게 침잠했다.

-저희 멤버 잘 부탁드립니다.

“좀 잘래?”

폭우에서의 촬영 이후 악화된 컨디션 때문인지 밴에 올라타자마자 건너온 진수의 말이 반가웠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식을 본 진수가 차 안의 불을 모두 꺼주었다. 무거운 눈꺼풀 덕에 금방 잠이 들 거라고 예상했던 것과 달리 상념이 그를 붙들었다. 밴에 타기 전까지 그의 옆에서 한 마디씩을 보태던 사람들을 떠올리던 식이 어둠 속에서 눈을 깜빡였다.

챙겨주는 멤버들이 있어서 좋겠다고 그랬나. 외로운 연예계에서 그렇게 지지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정말 부러운 일이라며. 생일을 맞아 보내준 밥차 하나로 어느새 식은 부러움의 대상이 되어 있었다. 물론 그들에게는 오늘의 일이, 그리고 식이라는 존재가 금방 잊혀질 것이다. 식을 대체할 아이돌 연기자는 나타날 것이었고 또 누군가가 커피차나 밥차를 보내준다면 오늘 식에게 했던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똑같이 건넬지도 몰랐다.

그렇지만 당사자인 식은 그럴 수 없었다. 한 번도 '특별'이라는 범주 안에 놓인 적 없던 이들의 선물이 그의 마음을 복잡하게 했다. 아까부터 얼굴로 올라오는 열과 지끈거리는 머리는 그 상황을 돌아보는 자신을 더욱 감정적으로 만들기만 했다. 그가 결국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기척을 눈치챘는지 슬쩍 돌아본 진수가 물었다. 왜 안 자고. 얼굴을 쓸어내린 식이 힘 빠진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잠이 안 와서요. 가서 자야겠어요.”

“너무 피곤해서 그런가 보다. 가면 우유라도 데워 먹고 자.”

“그럴게요. 형. 근데.”

“응. 말해.”

“저번에 집 알아봐 주시기로 한 거. 어떻게 되어가나 해서요.”

잠깐의 정적. 진수가 대답 대신 한숨을 쉬었다. 때마침 걸린 신호에 그가 몸을 반쯤 돌려 식을 응시했다. 식이 덤덤한 표정으로 그를 마주봤다.

“네가 말한 조건으로 알아보고 추리긴 했어. 그중 한 곳은 계약만 하면 바로 입주 가능하다고도 하고.”

“네.”

“근데 식아, 한 번 더 생각해 보면 안 되겠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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