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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애와 거리두기-40화 (40/119)

40화

“갑자기 뭔 개소리야. 누가 무릎을 꿇었다고……!”

가장 먼저 반응한 건 우람이었다. 당장이라도 튀어나갈 것처럼 몸을 움직이는 그를 본 대현이 재빠르게 걸음을 옮겨 그 앞을 막아섰다. 등 뒤로 씩씩거리는 우람이 느껴졌다. 대현이 뒤로 손을 뻗어 우람의 팔을 잡았다. 슬쩍 고개를 내리자 동그랗게 쥐어진 주먹이 보였다.

팔목으로 내려가 가볍게 위아래로 쓸자 움찔하던 우람의 손의 힘이 풀렸다. 대현과 우람의 눈이 마주쳤다. 대현이 고개를 저어 보였다. 대현의 눈에서 무엇을 읽어낸 건지 모르겠지만 사나운 눈을 하던 우람이 턱선을 따라 핏줄이 보일 정도로 세게 다물고 있던 입을 멍하니 벌렸다. 그를 확인하고서야 고개를 돌린 대현이 소란이 이는 와중에도 자신만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남자에게 대답했다.

“무릎 꿇는 건 안 어려운데.”

“…….”

“너네가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지를 모르겠어서.”

예상 못하던 말이었던 듯했다. 덤벼드려는 우람을 보면서도 입꼬리를 끌어올리던 남자가 처음으로 당황한 표정을 했다. 굳어가는 얼굴을 보던 대현이 일부러 눈을 접어 웃어 보였다.

“그러니까 하던 거 해. 같지도 않은 도발하지 말고.”

그 말을 끝으로 뒤돈 대현이 우람의 팔을 끌었다. 옆에 선 윤성의 등을 툭 치자 멍한 얼굴로도 걸음을 옮기는 게 보였다. 다행히 이번에는 뒤에서 들려오는 말이 없었다. 문을 닫은 대현이 제 뒤를 따라온 둘을 번갈아 응시했다. 고개를 숙인 우람과 울 듯한 표정을 하는 윤성을 본 대현이 한숨을 내쉬었다.

해체를 막기 위해 무릎을 꿇은 사실을 멤버들에게 알릴 생각은 없었다. 식은 어쩔 수 없이 보게 되었다 해도. 만에 하나 알려야 하는 상황이 온다 해도 이런 식으로 알리고 싶지 않았다. 대현이 머리를 긁었다. 이 분위기를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다른 연습실 찾아볼까?”

“…….”

“아까 보니까 저 쪽에 빈 연습실 있는 것 같던데. 불도 꺼져 있고.”

분위기 전환을 위해 일부러 톤까지 띄워 말했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없었다. 뻘쭘해진 대현이 고개를 숙여 손에 들린 카메라의 보호 캡 부분을 만지작거릴 때였다.

“진짜예요, 형?”

떨리는 윤성의 목소리에 대현이 고개를 들었다. 우람도 고개를 들어 대현을 쳐다보고 있었다. 제게 향해진 두 쌍의 눈은 그의 바람처럼 이 일을 모른 척 해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더는 피할 수 없음을 직감한 대현이 아까 오면서 봐뒀던 연습실 쪽을 가리켰다.

“어디라도 들어가자. 다…… 말해줄 테니까.”

“그러니까…… 그렇게 된 거야.”

대현이 어렵게 말을 이어나가는 동안에도 말이 없던 둘은 이야기가 끝을 맺은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근데 너네가 혹시 내가 무릎 꿇었다는 것 때문에 기분 안 좋은 거면…… 알아줬으면 해. 난 정말 괜찮다는 거. 잘 해결되었다는 게 난 더 중요해.”

진짜였다. 사실 대현은 오늘 이렇게 원치 않은 상황에 맞닥뜨리기 전까지는 그 일이 있었다는 것도 잊고 있었다. 물론 대현이라고 누군가의 앞에서 무릎 꿇는 게 좋았던 건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때 자신에게도 말했듯, 목적을 향해 할 수 있는 행위라고 생각했고. 결국 이렇게 보류라는 결과까지 이끌어냈지 않았나. 그게 이렇게 후배 그룹까지 소문이 퍼질 줄은 몰랐다지만.

식이 일부러 문까지 닫았으나 뒤에 서 있던 팀장 둘은 대현이 무릎 꿇은 모습을 봤다. 그럼 그 사람들이 소문을 퍼뜨린 건가, 아니면 그 모습을 본 또 다른 사람들이 있었던 걸까. 어느 쪽이든 씁쓸하긴 매한가지였지만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거기다 해체 보류를 위해 무릎을 꿇었던 것도 맞으니까.

대수롭잖게 생각을 마친 대현과 달리 앞의 둘은 여전히 착잡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둘의 표정을 살피던 대현은 이 상황을 만들어낸 슈어의 멤버를 욕할 수밖에 없었다. 살면서 한 번 해본 적 없던 안티 짓이지만, 몸이 돌아가 그 사람 기사를 보게 된다면 싫어요 라는 표정이라도 눌러야겠다고 다짐하기도 했다.

“이지후.”

우람이었다. 이야기를 듣는 내내 고집스럽게 입 한 번 열지 않고, 대현의 시선을 피하던 그라 그런지 반갑게까지 느껴지는 부름이기도 했다. 기쁜 표정으로 그를 보던 대현이 멈칫했다.

“……할게.”

그의 입에서 나온 차분한 목소리 때문이었다. 길길이 날뛰거나 욕을 할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대현과 여전히 시선을 마주치지 않고 있는 우람은 바닥에 시선을 둔 채 말을 이었다.

“나 진짜…….”

“…….”

“열심히 할게.”

말 끝머리에 고개를 든 우람이 한 손을 들어 눈을 거세게 쓸었다. 방금 저 눈에 눈물이 맺혔던 게 맞을까.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멍하니 입을 벌린 대현은 갑자기 달려든 윤성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지 못했다. 호리호리한 편임에도 키가 있어서 그런지 꽤 무게가 나가는 윤성의 몸이 대현 쪽으로 완전히 기울었다. 거울 쪽으로 거세게 밀쳐진 대현이 깜짝 놀란 얼굴로 제 목에 매달린 윤성을 내려다봤다.

“저도요, 형. 진짜 진짜 열심히 할 거예요…….”

“어어…… 윤성아…… 근데 목 좀 놓고 이야기를…….”

“진짜…… 세상에서 제일 열심히 할 거예요…….”

목이 축축해지는 걸 보니 이야기를 듣는 내내 눈이 그렁그렁하던 윤성도 결국 눈물을 흘리고 만 모양이다. 울리려고 꺼낸 이야기는 아니었는데 어쩌다 보니 둘 다 울리고 말았다. 불편해진 목의 느낌을 애써 무시하며 대현이 윤성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한참을 쓰다듬어 준 후 눈을 돌리자마자 우람을 마주했다. 발간 눈가를 바라보던 대현이 말을 걸려 했지만 우람이 더 빨랐다.

“너 이제…… 무릎 꿇지 마. 어디서든, 뭐 때문이든. 알았어?”

“어?”

“알았냐고.”

“……어…….”

“꿇으라고 하는 새끼 있으면 나한테 말해. 가만 안 둘 거야, 내가.”

아까의 차분한 태도는 어디 가고 어느새 평소처럼 잔뜩 흥분해 말하는 우람의 기세에 눌려 대답을 내놓던 대현이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그래도 아까 땅이라도 파고 들어갈 기세이던 것보다는 이게 나은 것 같기도 하고. 적어도 이건 우람 같아 보이긴 하니까.

180이 훌쩍 넘는 장정 둘이 대현을 위해 화를 내고 있었다. 물론 그 표출 방식은 달랐다만. 결국 결론이 열심히 하겠다는 것으로 난 건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되려나. 어깨를 으쓱한 대현이 품 안의 윤성을 다독이며 부러 밝은 목소리를 냈다.

“나도 열심히 할게. 그럼 우리 셋 다 뭐든 열심히 하기로 한 거다?”

“…….”

“…….”

슬쩍 ‘뭐든’이라는 단서를 붙였다. 대현의 목을 꼭 끌어안은 상태에서도 끄덕끄덕 고개를 끄덕이는 윤성과 달리 슬쩍 경계 어린 표정을 짓는 우람을 본 대현이 씩 웃었다.

“무르기 없기다.”

* * *

“식아, 컨디션 별로야?”

눈치를 살피며 물었지만, 굳은 표정의 식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손에 쥔 대본만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대본을 쥔 손에 얼마나 힘을 줬는지 대본 끝이 꾸깃해지고 있었다. 진수가 작게 한숨을 쉬며 메이크업을 고치려 다가오는 코디들에게 고개를 저으며 나가 있으란 눈짓을 했다. 눈치를 보며 물러선 코디가 문을 닫는 소리가 들리고서야 진수가 식에게 다가섰다. 옆의 물병의 뚜껑을 따서 식의 앞으로 밀어준 그가 식을 달랬다.

“그래. NG 몇 번 났다. 그래서?”

“…….”

“네가 여태껏 이상하리만치 잘해서 NG가 안 났던 거지. 연기 잘 하는 배우들도 어려운 장면 있으면 다 한 번쯤은 내고 그래. 감독님도 그거 아셔서 잠시 쉬고 다시 하자고 하신 거잖아. 무섭기로 유명한 감독님인데 혼내시지도 않은 거 보면 너 믿으시는 거야. 어?”

식에게서는 여전히 어떠한 대답도 나오지 않았지만 대본을 너무 꽉 쥔 탓에 하얗게 질리기까지 하던 손가락의 혈색이 원래대로 돌아오고 있었다. 결국 대본을 내려놓는 옆얼굴을 슬쩍 본 진수가 식의 어깨를 한 번 주물러 주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신의 몫은 얼추 끝났고, 혼자 있을 시간을 좀 줘야겠다고 생각한 것 때문이었다. 이는 식에 대한 신뢰에서 비롯된 행동이기도 했다. 오늘 유독 집중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는 식은 평소같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 마음을 스스로 다스릴 시간만 준다면 곧 원래대로 돌아올 것이다. 자신할 수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여태껏 늘 그래왔으니까.

“한 시간 뒤에 다시 촬영이니까 대본도 좀 보고 긴장 풀고 있어. 형은 나가 있을게. 아무도 못 들어오게 해둘 테니까 걱정 말고. 많이 피곤하면 눈 붙여도 돼. 촬영 시작 전에 시간 두고 깨워줄 테니까. 응?”

“……네, 형. 걱정 끼쳐 드려서 죄송해요.”

지금도 그렇지 않은가. 아까의 낯설었던 모습은 어디 가고 예의 바르게 사과하는 정돈된 얼굴은 역시나 진수를 실망시키지 않는다. 대답 대신 웃어 보인 그가 문으로 걸어갔다.

진수의 뒷모습을 따라가던 식이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서야 고개를 돌렸다. 거울 속의 자신을 바라보는 얼굴이 무표정했다. 목에 맨 타이를 느슨하게 당기며 단추 하나를 푼 그가 긴 한숨을 쉬며 눈을 감았다.

“…….”

눈을 감으면 차단되는 시야와 달리 그의 머릿속에서 결코 빠져나가지 않는 것들은 그가 이 순간 가장 반기지 않는 것들이었다. 촬영장에서 빈틈을 보이지 않으려 기를 쓰고 노력하는 그가 답지 않게 오늘 촬영 내내 집중하지 못한 이유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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