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지웅의 방이자 작업실인 곳은 생각보다도 더 컸다. 숙소 안에 어색하게 발을 들여놓았던 것은 잊은 듯, 대현은 휘둥그런 눈으로 작업실 곳곳을 훑었다. 지웅은 방에 딸려 있던 베란다를 터 만든 거라며 별거 아니라는 듯 말했지만 짧게만 훑어봐도 꽤 신경을 쓴 게 드러나는 곳이었다.
“집에 먹을 게 좀 있나 모르겠네. 보고 올게.”
“아, 어.”
지웅이 대현의 대답이 나오기도 전에 뒤돌아 방을 나갔다. 주인 없는 방에 혼자 남은 대현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시선이 닿은 곳은 책상이었다. 책상 옆 벽이 빼곡했다. 팬이 선물한 듯한 지웅의 초상화부터, 예스의 로고가 박힌 슬로건까지. 그 외에도 빼곡히 들어선 것들을 눈으로 하나씩 더듬어가던 대현의 시선이 한곳에 박혔다.
“…….”
지웅의 사진이었다. 그리고 그를 둘러싸고 웃는 다섯 명. 고깔모자를 비뚤게 쓴 지웅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양 볼에는 크림이 잔뜩 묻어 있었다.
생일날 찍은 사진인 모양이었다. 몇 번 만나며 웃는 얼굴을 많이 봤다고 생각했는데, 이 사진에서의 그는 여태껏 본 어떤 웃음보다도 더 진한 웃음을 띠고 있는 것만 같아 대현은 기분이 묘했다.
그러지 않으려 해도 자꾸 지후의 방이 떠올랐다. 첫날 들어서자마자 탄식이 나오게 만들었던, 텅 빈 책상에 벽에는 아무것도 걸려 있지 않았던, 그러니까, 방주인의 흔적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던 방이 말이다.
상념에 빠진 대현을 깨운 건 뜻밖의 소음이었다. 바닥을 울리는 둔탁한 소리에 깜짝 놀라 멈칫한 대현이 머뭇거리며 소리를 높여 물었다.
“무슨 일이야?”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무슨 일이지. 걱정이 된 대현이 조심스럽게 방 밖으로 발을 내밀었다. 지웅의 방은 나오면 바로 복도로 이어지는 구조였다. 복도에 섰던 대현이 반대쪽에서 걸어오는 사람을 발견하고 멈칫했다. 낯선 사람이었다. 그를 느낀 것과 동시에 대현은 제 자리에서 얼 수밖에 없었다.
“아, 알겠다고! 보긴 누가 본다고…….”
귀찮다는 듯한 표정을 하고 걸어오던 남자도 그제야 대현을 발견한 모양이었다. 어슬렁어슬렁 걷던 것을 멈추고 대현을 마주본 그가 이내 눈썹을 구겼다.
“너야?”
그리고는 건너온 물음에 대현은 대답할 수 없었다. 대답할 수 없는 이유는 세 가지나 있었다. 첫째, 대현은 남자를 몰랐다. 둘째, 뭘 물어보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세 번째이자 가장 큰 이유로는, 제 눈앞의 남자는 전라의 상태였다.
“강예준 너 얼른 안 가지……!”
방금 남자가 나온 곳 뒤에서 튀어나온 지웅이 대현을 발견하고 멍하니 입을 벌렸다. 지웅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겨우 고개를 돌릴 수 있게 된 대현이 꿀꺽 침을 삼켰다. 지웅이 머리를 짚는 게 보였다. 둘이 그러고 있는 와중에도 그 소란의 중심에 선 남자는 동요하는 기색 없이 태연하게 대현을 관찰하고 서 있었다. 시선을 어디 둬야 할지 몰라 방황하던 대현이 순간 남자의 하반신으로 내려갈 뻔한 제 눈에 화들짝 놀라 다시 고개를 뻣뻣이 들었다.
“옷 입히려 했는데…… 그 전에 봐버렸네…… 하하.”
지웅의 어색한 웃음소리를 들으면서도 대현은 목에 들어간 힘을 뺄 수가 없었다. 잘못했다가는 또 보게 될 것 같았다. 그러니까 알지도 못하는 남자의 그…… 그 부분을 말이다. 그 때문에 어색하게 고개를 돌리고 선 대현이 지웅에게 얼른 이 상황에서 벗어나게 해달라는 눈빛을 쐈다.
“둘이 초면인가? 인사는…….”
지웅도 이 상황에 어지간히 당황한 모양이었다. 신호를 못 알아들었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인사까지 권유하는 그를 본 대현이 질색한 얼굴을 했다. 정말 인사라도 할 생각인지 어깨를 으쓱하며 제게 다가오는 남자의 기척을 느낀 대현이 주춤하며 물러섰다. 그리고는 겨우 목을 쥐어짜내 대답했다.
“그, 옷…… 옷 입으시면.”
“어, 어, 그래. 강예준, 너 얼른 가서 옷 갈아입고 와.”
대현의 말에 지웅이 그제야 알아들었다는 표정을 하고는 남자에게 명령했다. 앞에 섰던 남자가 대답 없이 대현 쪽으로 다가왔다. 깜짝 놀라 거의 벽에 붙은 대현이 무색하게 그를 스쳐 지나간 남자가 지웅의 방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아, 저기가 방인가 보구나. 남자를 따라 시선을 올리던 대현은 또 제가 남자의 둔부를 바라보고 있었다는 걸 깨닫고서야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미안한 표정의 지웅과 눈을 마주한 대현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생각했다.
아, 집 가고 싶다.
“이거 아닌 것 같은데…….”
“뭐가.”
“초대한 건 난데, 대접해도 모자를 판에 요리나 시키고.”
대현이 칼질을 멈추고 슬쩍 앞을 봤다. 안절부절못하고 있던 지웅이 곧바로 시선을 마주쳐 온다. 그와 동시에 쑥 대현 쪽으로 뻗어진 손은 그의 손에서 칼이라도 뺏을 기세였다. 칼을 든 팔을 뒤로 쓱 뺀 대현이 대수롭잖게 대꾸했다.
“네가 시켰냐. 내가 하겠다 했지.”
물론 별 선택의 여지는 없어 보이긴 했다만. 겨우 걸음을 옮겨 부엌에 오자마자 마주쳤던 광경을 떠올린 대현이 지웅을 응시했다. 뭐든 곧잘 해내는 스타일이라 요리도 그럴 줄 알았는데…… 의외긴 했다. 다듬어진 게 아니라 거의 해체된 수준이던 양배추 더미를 떠올린 대현이 픽 웃었다.
“어쨌든 괜히 너 고생하는 거 같아서.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나가서 먹을 걸 그랬다.”
어지간히 불편하긴 한 모양이었다. 미안해 죽겠다는 표정을 하고는 반쯤 낑낑대는 지웅을 보다 못한 대현이 결국 소일거리를 나눠줬다. 그럼 계란이라도 좀 삶을래? 라는 말에 한 판을 꺼내오는 지웅을 본 대현의 입에서 결국 웃음이 터져 나왔다.
“마을 잔치라도 하게?”
지웅이 민망한 표정을 하며 대현의 눈치를 봤다. 그래도 말은 잘 듣는다. 계란 다섯 개를 두 손으로 나눠 들고는 냄비를 찾으러 가는 뒷모습을 보던 대현이 고개를 돌릴 때였다.
“악ㅇ티ㅏㅏㄴ러ㅏㅃ”
“강예준. 넌?”
대현이 귀신을 본 것 같은 표정을 하고 물러났다. 겨우 삼킨 욕이 그의 목을 타고 넘어갔다.
“뭐야! 왜! 다쳤어?”
대현의 고함에 덩달아 놀란 지웅이 소리치며 대현의 옆으로 다가섰다. 하얗게 질린 대현의 얼굴을 본 그가 인상을 구기며 앞의 예준을 노려봤다. 여전히 상체를 훌러덩 벗고 있던 그가 대현 쪽으로 내밀던 손을 거두지 않으며 오히려 왜 그러느냐는 듯한 표정을 했다.
슬쩍 발을 떼서 확인해 본 예준은 바지를 입고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대현이 선 쪽에서는 보이지 않았으니 아까처럼 아무것도 입지 않은 거라 생각했겠지. 한숨을 쉰 지웅이 아까 꺼내두었던 파를 집어 들었다.
“아, 왜 때려! 입었잖아!”
“윗옷도! 윗옷도, 새끼야!”
찰싹. 찰싹. 파 한 단과 예준의 피부가 부딪쳐 만들어낸 찰진 소리였다. 그 와중에 손을 위로 뻗어 방어하던 예준이 이내 부루퉁한 얼굴을 하고는 부엌을 나갔다. 한숨을 내쉬며 뒤돌던 지웅이 대현에게 또 다시 한 번 어색하게 변명했다.
“진짜 나쁜 애는 아냐…….”
변명같이 덧붙이는 소리를 듣던 대현은 또 한 번 집에 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요리가 끝나갈 때쯤에는 예스의 멤버들이 세 명 더 숙소로 돌아왔다. 늦는다고 하지 않았냐며 골치 아픈 얼굴로 묻는 지웅에게 앵기며 애교 아닌 애교를 부리는 그들을 대현은 자신도 모르게 자꾸 힐끗거렸다. 신기했다. 저렇게 스스럼없이 서로를 대할 수 있다는 게.
“형. 아까 얘 울었던 거 알아요?”
“미친놈아. 말 안 한다며.”
“말 안 ??며~”
“개새끼야!”
“야, 이 미친 새끼들아 뛰지 말라고! 아래층에서 또 올라온다고!”
참으로 시끌벅적한 숙소였다. 바라보고만 있어도 정신이 없을 정도였다. 사적으로 보는 게 처음일 대현을 앞에 두고서도 평소처럼 잘 노는 그들은 확실히 낯가림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물론 처음 들어왔을 때야 대현을 보고 놀란 얼굴을 했지만, 지웅을 보고 잠시 수군거리던 그들은 이내 다가와 먼저 밝게 인사를 건네기까지도 했다. 한 명은 제가 윤성이랑 친하다며 악수까지 청했다. 다소 어색한 포즈로 인사를 받았던 걸 떠올리며 대현이 머리를 긁적였다. 그래도 윤성이랑 친구라는데 조금 더 살갑게 굴었어야 했나.
“다 했어. 어때?”
“어? 어. 잘했다.”
굳이 제가 마무리를 하겠다며 샐러드 속을 식빵 사이에 끼우는 행위를 자처한 지웅이 눈을 반짝이며 묻고 있었다. 대현이 미리 만들어놓았던 반듯한 샌드위치들과 비교될 정도로 울퉁불퉁한 샌드위치들이었지만 그냥 고개를 끄덕여 줬다. 열심히 했다는 게 중요한 거지, 뭐. 별거 아닌 칭찬에도 신난 얼굴을 한 지웅이 거실의 눈치를 살피며 샌드위치를 접시에 조심스레 옮겨 담는 게 보였다.
덩달아 거실을 살피던 대현이 지웅 쪽으로 고개를 돌리다 말고 멈칫했다. 트레이 위로 수북이 샌드위치를 쌓은 접시와 음료를 올려놓은 지웅이 대현 쪽으로 비밀스러운 눈짓을 하고 있었다. 누가 보면 첩보 활동이라도 하는 줄 알 정도로 조심스러운 표정이기도 했다.
“왜?”
대현은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