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최애와 거리두기-35화 (35/119)

35화

“야…… 나…….”

한참을 멍하니 자신을 쳐다보던 영민이 뱉은 말에 지후가 슬쩍 눈을 돌려 그를 흘끗거렸다. 어느새 심각한 표정이 된 영민이 자리에서 일어서는 게 보였다. 식탁을 돌아 지후의 옆으로 다가온 영민이 지후를 뒤에서 와락 안은 건 다음 일이었다.

“야, 뭐 하는 거야……!”

“너무 감동이야…….”

“…….”

“너라서 더 감동이다…… 옷이라고는 흰 티밖에 모르던 우리 대현이가…… 내가 좋아한다고 패션쇼도 다 보고…….”

벗어나려 몸부림치는 지후의 목을 꽉 안은 영민은 그의 귓가에 정말 감동 어린 듯한 음성을 불어넣기까지 했다. 당황스러운 와중에도 지후는 영민의 말에 조금 수긍했다. 대현의 옷장은 자신이 보기에도 지나치게 밋밋하고 심심한 면이 있었으니까. 그렇지만 이런 스킨십까지 괜찮다는 건 아니었다.

“……놔.”

“싫은데.”

품 안의 지후가 바르작댈수록 영민은 더 몸을 기대왔다. 영민을 향해 으르렁거리던 지후가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가만히 지후를 바라보고 있던 선우가 눈이 마주치자마자 또 다시 눈을 휘어 보였다. 습관처럼 웃으며 지후와 영민을 번갈아 바라보는 얼굴은 아까처럼 애정을 듬뿍 담고 있었다. 멈칫한 틈을 놓치지 않고 더 꽉 몸을 붙여오는 영민을 견디다 못한 지후가 이내 소리쳤다.

“아, 좀 떨어지라고!”

그렇게 제주도의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지후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만난 지 하루밖에 되지 않은 이들과의 하루가 제 생각보다는 그리 어색하고 불편하지 않다는 걸.

* * *

“미안, 늦었지.”

“아냐. 나도 방금 왔어.”

“진짜?”

“어. 봐봐. 커피도 안 시켰잖아.”

그제야 눈에 띄게 안심한 지웅이 얼굴의 반 이상을 가리던 목도리를 풀어내며 대현의 반대편에 앉았다. 목도리를 대충 말아 옆으로 밀어놓고 외투를 벗는 얼굴을 보던 대현이 갸웃했다. 저번에 보았을 때보다 살이 빠진 것 같다. 연습 때문에 정신없다더니 정말 많이 힘든가 보네. 하긴 메신저로 연락을 나눌 때마다 연습실이라고 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상념에 빠져 있던 대현이 지갑을 들고 일어서는 지웅을 보고서야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야. 오늘은 내가 살게.”

“어허. 이런 건 원래 늦은 사람이 사는 거야.”

“저번에는 내가 늦었는데도 네가 샀…… 야, 내가 산다니까?”

카운터로 가는 뒷모습은 제 말은 들리지도 않는 것처럼 군다. 따라가려던 대현이 멈칫했다.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카운터에서 헤이즐넛라떼와 아메리카노 하나를 시키는 지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번에 만났을 때 지웅이 말했던 바에 따르면 그는 아메리카노 외에는 딱히 마시지 않는다고 했다. 그럼 헤이즐넛라떼는 저를 위한 거일 게 분명했다.

신기했다. 윤성의 연습 경기 이후 지웅과 만난 건 한 번뿐이었다. 그때 제가 뭘 먹는지 알아서 그걸 기억까지 하고 있다니. 역시 아이돌의 아이돌은 아무나 될 수 있는 게 아니군. 대현이 나름의 결론을 내리고 고개를 끄덕일 때가 되어서야 돌아온 지웅이 어느새 그런 대현을 보고 웃고 있었다.

“무슨 생각하길래 고개를 끄덕거려.”

“어?”

“계속 이러고 있길래.”

지웅이 방금 대현처럼 곰곰이 생각에 빠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척을 했다. 민망해진 대현이 지웅의 팔을 툭 쳤다. 그만해. 못 이기는 척 웃으며 따라하는 걸 멈춘 지웅이 들고 있던 음료 트레이를 대현 쪽으로 밀었다. 빨대까지 잊지 않고 챙겨주는 얼굴을 보던 대현이 픽 웃으며 말했다.

“넌 진짜 인기 많을 수밖에 없겠다.”

“어?”

“이런 거. 다 잘하잖아.”

되묻는 지웅에게 대현이 장난스럽게 덧붙였다. 역시나 그런 말을 들은 게 처음은 아니었던 듯, 지웅은 별로 놀라는 기색 없이 어깨를 한 번 으쓱했다.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내며 그런가, 라는 대답이나 내어놓았을 뿐. 자연스레 대현의 관심은 방금 지웅이 꺼낸 노트북으로 옮겨갔다. 노트북을 대현이 보기 편하게 돌려놓던 지웅이 조금 소리 내어 웃었다.

“예전부터 느꼈지만, 너 고양이 닮았어.”

“……고양이?”

“응. 근데 좀 느낌이 바뀌었다 해야 되나.”

“…….”

“옛날엔 항상 이렇게 발톱을 드러내고 있는 고양이 같았는데, 지금은 사람 좋아하는 고양이 같아.”

별 의미를 두고 한 소리는 아닌 듯, 장난스레 뱉은 말을 끝으로 고개를 돌려 키보드를 두드리는 얼굴을 본 대현이 괜히 얼굴을 쓸어 내렸다.

“이거야.”

“어?”

“노래. 듣고 싶다며.”

“아, 어어.”

대현이 그러는 사이에 이어폰까지 꺼낸 지웅이 한 쪽을 대현 쪽으로 건넸다. 귀에 이어폰을 끼우자마자 음악이 재생됐다. 풍부한 악기 사운드와 함께 시작된 노래에 대현이 와, 하는 소리를 냈다. 반응을 살피던 지웅이 초조한 표정으로 물었다.

“괜찮아?”

“장난해?”

“왜. 별로야?”

“아니.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이건…… 너 천재 아냐?”

반은 농담, 반은 진심이었다. 감상에 젖어 흥분한 목소리로 묻는 대현을 본 지웅이 환하게 웃었다.

“좋아해 주니까 좋다. 안심되기도 하고.”

“안심? 설마 걱정했었어?”

“당연하지. 너도 작곡해 봐서 알 거 아냐. 배울수록 더 어려워.”

“아…… 그렇지.”

아직도 방 한 켠에 놓여 있는 지후의 작곡 노트를 떠올린 대현이 한 박자 늦은 대답을 내놓았다. 그러고 보니 저번 만남에서 지웅이 그랬다. 제게 작곡을 가르쳐 주는 작곡가가 지후도 가르쳤기에 그에게 여러 번 이야기도 들었고 가끔 마주치기도 했었다고 말이다. 물론 마주칠 때마다 네가 얼마나 차가웠는지 아냐며 지웅은 장난 반으로 우는 소리를 하곤 했지만.

그러고 보니 이지후는 더 이상 작곡에 관심이 없는 걸까. 지웅의 이야기를 들으니 아이돌의 사교 모임을 비롯하고 연예인이 할 법한 모든 취미 활동에 일절 얼굴을 비추지 않던 지후는 작곡은 열심히 배웠던 모양이었다. 그치만 몸이 바뀐 지 삼 주가 지난 지금까지도 지후는 제게 작곡에 대한 어떤 말도 꺼내놓지 않았다. 하다못해 방에 놓인 노트를 가져다 달라는 말 정도는 할 수 있었을 텐데.

그건 작곡에 흥미를 잃어서일까. 아니면…… 아예 연예인 생활에 흥미를 잃어서인 걸까. 지후의 지친 눈동자를 떠올린 대현이 한숨을 쉬었다. 생각보다 몸이 바뀐 기간이 길어지며 시간이 날 때마다 이런 생각들을 하는 자신을 발견하곤 했다.

물론 자신은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지웅을 만나는 것도 그 최선을 다하는 행동 중의 일부였다. 예스는 플러그와 비슷한 시기에 데뷔한 그룹이었으나 플러그와 완전히 반대의 길을 걷고 있다고 해도 무리가 아니었다. 앨범 판매량은 물론이고 실력에서도 딱히 구멍이 없는 그들은 아이돌 나름의 느낌은 잃지 않으면서도 자신만의 브랜드를 구축해 나가고 있다고 평가받았다. 유독 멤버간의 사이가 좋기로 유명한 그룹이기도 했고, 실제로 지웅이 주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축구 클럽에도 예스 멤버 모두가 소속되어 있었다.

대현은 지웅에게 많은 것을 배워야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어색한 첫 만남에 이어 오래 지나지 않아 바로 만나게 된 건 적극적인 지웅의 태도가 작용한 결과기는 했지만. 거기다 지웅은 제 생각보다 더 괜찮은 사람이었다. 몸에 밴 배려는 대현이 딱히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될 만큼 기분을 편하게 만들었으며, 적당히 쿨하고 적당히 예민했다. 사실 이렇게 곡 이야기를 할 때 말고는 제 또래 친구와 별 다를 바 없이 느껴지기도 했다. 특유의 사람을 편하게 하는 분위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나 잠깐 전화 좀.”

핸드폰을 들며 양해를 구하는 지웅을 보던 대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웅이 자리를 뜬 사이 옆으로 치워두었던 핸드폰을 들던 대현이 인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생각보다 빨리 돌아온 지웅은 의아한 표정을 짓는 대현을 향해 씩 웃으며 뜬금없는 말을 꺼냈다.

“애들인데 지금 나간다네.”

“멤버들?”

“응. 그래서 말인데, 가볼래?”

“어딜? 지금?”

“우리 숙소.”

갑자기 숙소는 왜. 아니 그건 그렇다 쳐도 앉은 지 얼마나 됐다고. 당장이라도 갈 것처럼 들뜬 얼굴을 하는 지웅을 본 대현이 어리둥절하게 앞에 놓인 트레이를 훑었다. 대현이야 빨대에 입을 대기라도 했다지만, 지웅의 앞에 놓인 아메리카노는 말 그대로 다른 사람에게 팔  수도 있을 정도로 먹은 흔적이 없었다. 대현의 시선을 따라가던 지웅이 덧붙였다.

“너 저번에 와보고 싶댔잖아.”

“내가?”

“어. 내 작업실 있다고 하니까 너 눈이 막 튀어나올 것 같았는데.”

아…… 그랬나. 생각해 보니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민망한 기분이 된 대현이 헛기침을 했다. 확실히 자신도 작곡을 전공하는 사람이라 그런지, 음악 관련한 이야기를 할 때면 가끔 스스로도 부끄러울 정도로 눈이 돌곤 할 때가 있다.

“갈 거지?”

그렇게 묻는 지웅은 어느덧 노트북까지 접어 파우치에 넣고 있었다. 이건 계획에 없었는데. 난감한 표정을 짓는 대현에게 지웅이 쐐기를 박았다.

“거기다 나도 방금 안 거긴 한데, 우리가 지금 주목을 좀 받고 있는 것 같거든. 어차피 자리를 옮기긴 옮겨야 할 것 같은데.”

슬쩍 뒤로 고갯짓을 하는 지웅을 따라 고개를 돌린 대현이 그제야 저와 지웅에게 몰린 시선을 깨닫고는 당황한 표정을 했다. 허둥지둥 일어나는 대현을 바라본 지웅이 픽 웃으며 제 손에 들린 목도리를 대현의 목 주위에 칭칭 감았다.

“추우니까 얼른 가자.”

그 말을 끝으로 앞장서는 뒷모습을 대현이 느리게 눈을 꿈뻑이며 따랐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