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
“…….”
“……씨발. 먹기 싫음 마라.”
고사라도 지내는 것처럼 눈앞의 라면을 바라보기만 하는 둘을 견디다 못한 지후가 냄비를 들고 일어섰다. 그제야 지후의 팔을 잡아 만류하는 얼굴들은 그럼에도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냄비를 힐끗거리는 행위를 멈추지 못했다.
“근데 너 요리 잘 하지 않았…… 읍.”
“잘 먹을게.”
지후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것들은 콩트라도 하는 건지, 뭔지. 선우라고 했나. 운전을 하고 온 놈이 뭐라 말하려는 영민의 입을 막고 있었다. 탁자를 탕탕 치며 항복의 몸짓을 하는 영민을 보고서야 놓아준 그가 지후에게 눈을 찡긋해 보였다. 그리고는 수저를 드는 모습이 생긴 것만큼이나 정갈하고 단정했다. 냄비 안으로 깊숙이 손을 넣어 휘젓는 젓가락을 보고서야 라면으로 시선을 돌린 지후가 티 안 나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물을 너무 많이 잡았나. 라면이 원래 저렇게 국물이 많은 게 아니었던 것 같은데. 지후는 원체 요리에 능숙한 편이 아니었다. 배고프면 뭔가를 찾기보다는 굶고야 마는 성정은 요리 실력이 느는 것보다는 악화되는 데에 기여했다. 그래도 라면은 그럭저럭 끓였었던 것 같은데. 아닌가. 마지막으로 먹은 게 언제였지…… 머쓱하게 과거를 떠올리던 지후가 시선을 느끼고는 고개를 돌렸다.
“…….”
“…….”
“…….”
눈이 마주치자마자 시선을 후다닥 돌려 라면을 급히 건져 먹으려던 영민의 손은 계속 헛짓을 하고 있었다. 누가 보면 보물찾기라도 하는 줄 알 정도로 말이다. 거기다 그 헛짓을 통해 몇 가닥 건진 면발은 아주 천천히 영민의 입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배고프다고 찡찡거리던 건 언제고 어지간히도 맛이 없는 모양이었다. 민망해진 지후가 결국 옆으로 고개를 돌려 베란다에 놓인 고기 쪽으로 턱짓을 했다.
“……저건 언제 먹냐.”
말을 꺼내자마자 밝아지는 둘의 얼굴을 보니 제안하길 잘한 듯했다.
“그래. 고기는 싱싱할 때 먹어야 맛있어.”
그 말과 함께 젓가락을 쌩하니 놓고 고기 쪽으로 달려가는 영민과 토치를 들고 불판 쪽으로 다가서는 선우를 본 지후가 밑을 내려다봤다. 아까 제가 덜어놓은 라면이 보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젓가락을 든 지후가 면발을 입 안으로 넣었을 때였다.
“……아씨.”
황급히 뱉어낸 지후가 물을 들어 입을 헹궜다. 새삼 몇 젓가락이나 먹는 척을 했던 영민과 선우가 대단하게 느껴졌다. 저 새끼들은 정대현을 진짜 좋아하거나 아니면 큰 빚을 졌거나 둘 중 하나다. 그들의 우정에 대한 짧은 감탄까지 마친 지후가 결국 젓가락을 던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활활 타오르는 불.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구워지는 고기. 적당히 불어오는 바람. 마치 삼종세트라도 되는 것처럼 한 데 묶여 다가오는 것들 앞에서는 지후도 더 이상 부정적일 수만은 없었다. 풀린 얼굴로 고기를 먹고 있던 지후가 갑자기 들린 음악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영민이었다. 고기를 먹다 말고 갑자기 펜션 안으로 들어가던 그가 손에 무언가를 들고 나오고 있었다. 방금 들린 음악 소리도 거기서부터 나오고 있는 거였다.
“원래 여행에는 노래가 있어야 하는 거거든.”
하던 행동을 멈추고 제 손에 들린 휴대용 블루투스 스피커를 보는 지후를 어떻게 해석한 건지, 영민이 뿌듯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 칭찬이라도 바라는 듯한 얼굴이 웃겼다. 지후가 코웃음을 치고는 다시 몸을 돌렸다. 지후 옆에 엉덩이를 붙인 영민이 그에게 본격적으로 치댔다.
“신청곡 받는다.”
“……치워.”
“까칠하게 굴지 말고. 신청곡. 없으면 내 마음대로 튼다?”
“어.”
“내 마음대로 틀라고? 어?”
“맘대로 해.”
“후회하지 마 너.”
스피커를 식탁 위에 올려놓은 영민이 신난 표정으로 폰을 만지작거렸다. 가만히만 있으면 자못 불량해 보일 수 있는 얼굴이 입가에 가득한 장난기와 함께 다소 유하게 변해가는 걸 지켜보던 지후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의 눈이 영민의 눈썹 위쪽에 박힌 두 개의 피어싱, 가로로 길게 찢어진 눈매, 위아래로 거칠게 찢어진 청바지를 훑었다. 처음 볼 때만 해도 정대현이랑 정말 딴판인 인상이라고 생각했는데, 하는 행동 보면 왜 친구인지 알 것 같기도 하고.
“뭐 해.”
“노래 틀…… 아, 시발 너 담배 폈냐?”
“……냄새 나?”
“어. 환장할 정도로 난다. 아, 떨어지라고!”
선우였다. 어딜 갔나 했더니 담배 피러 갔었나 보네. 제 등에 턱을 얹으려는 선우를 밀쳐 내는 영민은 어느새 잔뜩 인상을 쓰고 있었다. 오만상을 하는 걸 보니 담배 냄새를 싫어하는 모양이었다. 생긴 건 자기가 더 피게 생겨가지고는. 의식하지 못한 채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던 지후가 멈칫 굳었다. 블루투스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온 노래 때문이었다. 익숙한 멜로디였다. 그리고 모르고 싶어도 모를 수가 없는 노래였다.
“정대. 그러니까 이게…….”
“이거 어떻게 끄는 거야?”
“일로 줘봐. 아씨. 왜 안 꺼져, 이거.”
강렬한 비트와 함께 시작된 노래에서는 어느덧 지후의 파트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더는 피할 수 없어.’
정말 피할 수가 없다고, 지후는 멍하니 생각했다. 몸이 바뀌고 나서 일부러 듣지 않으려, 보지 않으려 애썼다. 생각만 하는 것만으로도 너무 괴로웠으니까. 하지만 정말 웃기지 않은가. 피하려고 할수록 오히려 더 집요하게 따라오는 것 같은 이 얄미운 우연이라는 것은. 심지어 아이돌에 관심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정대현 친구들의 플레이리스트에서 이렇게 맞닥뜨리게 되는 것처럼. 씁쓸한 표정을 하던 지후가 조용한 앞을 눈치채고 시선을 올렸다.
“…….”
“…….”
“…….”
그러고 보니 이상하게 허둥지둥하던 둘이었다. 음악이 멈추지 않아서였는지 블루투스 스피커를 반쯤 던지려던 영민이 지후가 눈이 마주치자마자 머리를 긁적였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영민의 손에서 스피커를 빼낸 선우가 잠시 살펴보더니 이내 스피커 하단에 위치한 작은 버튼을 눌렀다. 딸깍, 소리와 함께 정적이 흘렀다.
그제야 어딘가 이상함을 느낀 지후가 둘을 번갈아 응시했다. 제가 노래를 듣자마자 놀랐던 건 그게 2주 전까지만 해도 몸을 담고 있던 그룹의 노래였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그가 피하고 싶어서 고군분투했던. 그런데 이 둘은 왜 이렇게 오버 반응을 한단 말인가. 스피커를 반쯤 던지면서까지 노래를 멈추려 하며, 제 눈치를 봐가며.
“옛날에 네가 들어보라고 선물해 줬을 때 넣어놨었나 봐. 듣다 보니까 나름 괜찮아서 굳이 안 빼놓기도 했었고…….”
“…….”
“아씨. 어쨌든 미안. 너 안 그래도 심란할 텐데.”
지후의 눈치를 살피며 말하던 영민은 진심으로 미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을 듣고서야 이게 어떻게 돌아가는 일인지를 이해했다. 이들은 정대현이 플러그를 좋아하는 것도, 그리고 그 그룹의 최근 상황이 좋지 않은 것도 알았던 모양이었다. 갑자기 집에 쳐들어왔을 때도, 거실에서 폐인처럼 누워 있는 저를 보고 놀라지 않은 것도 그래서였던 것 같았다. 좋아하는 그룹이 해체까지 한다는 소식에 망연자실한 거라고 생각했겠지. 제주도로 오는 내내 까칠했던 제 반응을 반쯤 장난스럽게 넘긴 것도 그 연장선에서 나온 배려였을 거고 말이다.
지후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정대현 친구 잘 뒀네. 라면을 먹을 때 했던 것이 이들의 우정에 대한 장난 어린 감탄이었다면, 이번 것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감탄이었다. 생각을 끝낸 지후가 아까 선우가 조심스레 올려놓은 스피커 쪽으로 손을 뻗었다. 어색함이 느껴지는 손짓이었지만 그럼에도 스피커를 들고 버튼을 딸깍, 누르는 손짓이 뜻하는 바는 명확했다.
“……폰.”
“어?”
“노래가 있어야 한다며.”
“어, 어…….”
지후의 손바닥 위로 자신의 핸드폰을 얹어준 영민이 그의 눈치를 보며 의자에 다시 엉덩이를 붙였다. 아까 한참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영민과 달리, 단 두 번의 손짓 끝에 스피커에서 노래가 흘러나왔다. 잔잔한, 그러면서도 리듬감이 느껴지는 팝송이었다. 좋아하는 노래였던 듯, 전주를 듣자마자 밝아지는 영민의 표정을 흘긋 본 지후가 핸드폰을 다시 식탁 위에 올려뒀다.
“노래 좋지 않아? 이거 이번 f/w ** 쇼 오프닝에서 나온 노래다?”
“또 시작이다.”
“뭐 이 새끼야. 넌 너무 패션을 몰라.”
“그래. 너라도 잘 알아서 다행이야 참.”
아웅다웅 다투는 앞을 보던 지후의 입가가 느슨하게 풀어졌다. 물론 스스로는 모르는 것 같았지만 말이다. 패션을 아느냐, 그럼 넌 경영학을 아느냐, 한참을 티격태격하던 둘이 다툼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보다는 xx쇼 오프닝 노래가 더 좋았는데.”
“어?”
패션계에 종사하는 어머니 덕분인지 지후는 옷에 관심이 많은 편이었다. 쇼들도 가끔 챙겨볼 정도는 됐다. 그래서인지 영민이 하는 말이 아예 낯설지는 않았다. 그 덕분인지 뱉을 수 있었던 말에 영민이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옆의 선우도 마찬가지였다. 의외라는 듯 바라보는 시선을 애써 피하며 지후가 헛기침을 했다. 얘네랑 있으면 왜 이렇게 민망한 기분이 드는 일이 많은지 모르겠다.